안중군은 중국‧한국의 영웅이었다
안중군은 중국‧한국의 영웅이었다
  • 김선욱
  • 승인 2018.11.30 17: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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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더듬다(1)-안중근 국외유적 현장조사팀 동행 취재기

중국인들 ‘안중근, 아시아의 제일 의협第一義俠’ 칭송

하얼빈 현장 일본인들, 안 의사 숭모, 위패 봉안 배례

중의동양평화론, 21세기 동북아 새로운 담론으로 부활

 

◆…장흥군은 ‘안중근 의사 사당 관광자원화 사업’에 대한 예산 70억원을 확보, 본 사업을 2019∼2002년까지 추진한다. 이에 장흥군은 본 사업의 본격적인 추진과 함께 보다 효율적인 본 사업 추진을 위해 ‘안중근 국외 유적 현장 조사 연구단’을 지난 11월 14일∼11월 19일까지 5박 6일 일정으로 안중근 의사 유적·기념시설 등이 산재되어 있는 러시아 연해주 일원과 중국 만주‧간도 일원에 파견하였고, 본 기자는 이 조사 연구단에 동행 취재하였다. 다음은 동행취재기로, 몇 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1)시작하는 글

안중근 의사가 중국 1909년 10월 26일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하였는데, 먼저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의 의의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것으로 본 동행 취재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근세사 최고 국민적인 영웅은 안중근

조선조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충무공 이순신이 있었다면, 근세사에서 국민적 영웅은 단연코 안중근 의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국민적인 생각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지난 2015년 삼일절을 앞두고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5명에게 ‘항일 독립운동가’ 하면 누가 생각나는지 물은 결과 ‘안중근’(47%), ‘김구’(45%), ‘유관순’(37%), ‘윤봉길’(30%), ‘안창호’(13%), ‘김좌진’(11%), 윤동주 순으로 나타났던 일이 있었다.

국가보훈처도 ‘2019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후보 48명을 선정하기 위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지난 5년간 빅데이터(뉴스, 블로그, 트위터) 139억 건을 분석해 국민적 관심도가 높은 독립운동가를 선정한 일이 있었는데(2018.8.1 발표), 안중근 의사가 압도적인 1위였고 이어 김구 선생, 윤동주 시인이 각각 2·3위를 차지했다. 이때 빅데이터가 집계한 국민 관심도가 가장 높은 독립운동가 1위 안중근 의사의 경우 빅데이터 언급량은 무려 106만5448건이었다. 김구 선생도 그 절반수준에 그친 64만8084건이었고, 저항시인 윤동주도 56만1228건이었다.

이처럼 최근년에 2회의 전 국민적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이 선정한 최고의 독립운동가는 김구 선생이 아닌 안중근 의사였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안 의사가 우리에게 영웅이듯이 안 의사에게 격살당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일본인에게 근대 일본의 기틀을 잡았던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1963년부터 1984년 11월까지 일본 1천엔 지폐에 그려지기도 했으며 지금까지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일본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일본 초대 총리에 이어 제5대, 7대, 10대총리까지 총리를 역임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그 초대 통감까지 지냈고 명성황후 시해를 직접 지시했던 일본의 한국침략의 원흉이었다.

그러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해 당시 중국에서도 큰 충격과 찬탄을 금치 못했다.

중국의 영웅이 된 안중근

​▲모친이 보낸 수의를 입고 있는 안중근 의사​
​▲모친이 보낸 수의를 입고 있는 안중근 의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 건으로 안중근은 중국 대륙에서도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안중근 의거는 20세기 초 중국 항일구국운동을 밝힌 한 줄기 횃불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중근 의거·순국에 대해 중국 내 20여 개 신문·잡지가 약 400여 편의 보도를 등재(徐明勋 주편, <中國人心目中的安重根>)하며 안중근을 ‘영웅’, ‘호걸’로 칭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청말(淸末) 저명한 지식인이요 혁명가였던 장타이옌(章太炎)은 안중근을 “아시아 제일의 의협(亞洲第一義俠)”으로 극찬했으며, 장제스(蔣介石)도 “장렬한 뜻 천추에 빛나다(壯烈千秋)”라고 안 의사의 의거를 극찬해 마지않았다.

1914년 상하이 대동편집국은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저술한 <안중근전>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 중국의 유명 인사들은 너너없이 안중근을 ‘영웅’이요 ‘세계의 대영웅’으로 찬사하는 글을 남겼다.

중국의 근대혁명가이자 당시 저명인사였던 한염(韓炎)도 “삼한의 현인이요 세계의 영웅(三韓之賢人, 而亦世界之英也)”으로 찬사했고, 저명인사 고관오(高冠吾)도 “안중근의 기적은 족히 온 세상을 놀라게 하고 귀신이라도 감동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안중근은 세계의 영웅호걸이다. 전송을 하나, 하지 않으나 그의 업적은 천고에 빛날 것이다”라고 썼으며, <민립보(民立報)> 주필 증용(曾鏞)도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기실은 세계의 공적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고 찬사했다.

중국 현대 문학사의 거장으로 불리는 바진(巴金)도 자서전에서 “안중근의 이토 사살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안중근은 내가 청소년 시기에 처음으로 숭배했던 영웅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신해혁명 때 임시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도 “평생을 하고자 한 일 이제야 끝냈구려/죽을 땅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은 장부가 아니려니/몸은 삼한에 있어도/세계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 년을 가리(安重根義士輓/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圓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라는 안 의사 만시(輓詩)를 지었다.

중화민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孫文)도 ”공功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니/살아 백세는 못가도 죽어서 천년을 가리/약국의 죄인과 강국의 재상이라/처지를 바꾸면 이토 히로부미도 죄인되리(功蓋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弱國罪人强國相 縱然易地亦藤候)“라고 조시를 지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근대 지식인이었던 량치차오(梁啓超)도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이라는 96구절의 장시에서 ‘다섯 발자국 지척에서 피 뿌려 대사를 마쳤으니/그 웃음소리 저 산의 달보다 높구나(流血五步大事毕, 狂笑一声山月高)”라고 읊으며 안 의사 애국심을 찬양하고, 안 의사의 의거를 중국은 정면교사(正面敎師)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의 시를 지었는데, 특히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사마천이 안자를 추모하듯 그대를 경중하고/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그의 무덤과 나란히 묻히리라(尘路思承晏子鞭,芳邻拟穴要篱家)”라는 극찬 절구의 시를 헌사했다.

중국공산당을 창건한 초대 당수였던 천두슈(陳獨秀)는 계몽잡지 <신청년新靑年>을 창간하고 ‘삼가 청년들에게 고한다(敬告靑年)’는 유명한 창간사에서 "중국 청년들이 톨스토이나 타고르가 되기보다 콜럼버스와 안중근이 되기를 원한다(吾愿青年之为托尔斯泰与达噶尔,不若其为哥伦布与安重根)"고 갈파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수상이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천진 남개대학 재학시절, 그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와 함께 ‘안중근’ 주제의 연극을 했을 정도였으며 훗날인 1963년 6월 중조역사 관련 담화에서 “중일 갑오전쟁 후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중국과 조선인민의 공동 투쟁은 본 세기 초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中日甲午战争后 中朝人民反对日本帝国主义侵略的斗争 是在20世纪初 安重根在哈尔滨刺杀伊藤博文开始的)”고 언급, 안중근의 의거로부터 중국과 조선 인민의 항일 투쟁이 시작됐다면서 높은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우파 좌파를 가리지 않고 당시 중국의 정치가‧지식인들은 안 의사 의거를 극찬하기에 바빴으며, 이로써 안중근은 중국에서 당파를 초월하여 ‘반일 애국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고 애국정신의 상징적인 인물로 급부상했는데, 이러한 안중근의 열풍은 교육‧문화계로까지 폭넓게 번져나갔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소학교 교과서, 애국영웅 표본으로 안중근 게재 ▲1910년 상하이 진화단進化團 ‘안중근, 이토 격살(安重根刺伊藤)’-중국 전역에 수개월간 공연-쑨원(손중산) 이 극단을 칭찬, “이것도 학교다(是亦學校也”란 제사 내려줌 ▲혁명지도자 리다지오李大釗, 1919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했다’ 가죽인형극 공연, 화제 ▲개혁파 소설가 황스중黃世仲, 광저우 ‘난웨바오南越報’에 <조선의 피朝鮮血> 연재(안중근 등 한국애국지사들 소개, 중국인 애국심 각성 기여) ▲동방의 섹스피어로 불렸던 성조재成兆才, 1920-1928년 하얼빈서 평극 ‘안중근, 이토를 격살하다’ 수차 공연 ▲1927년 군인·정치가 장쉐량張學良 지시, 중국 동북 각지 36개 모법소 학교 수업 전에 안중근 찬양노래 합창 ▲1928년 상하이, 안 의사 거사 다룬 영화 제작, 상영 ▲1937년 남사南社극단, 연극 ‘안중근’ 수차 공연 등이 대표적인 예로, 실로 당대 안중근의 찬양 열풍은 중국대륙을 휩쓸었다. 거의 1세기가 지난 1992년에도 중국인이 쓴 오페라 ‘안중근’이 공연되기도 했다.

“혁명가가 되려거든 손문처럼 되고, 대장부가 되려거든 안중근처럼 되라" 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였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 안중근 의거를 찬양하며 안 의사를 존경한 것은, 안중근이 패망이 짙어가는 중국인들을 각성시키며 민족‧애국 혼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인들은 시간을 많이 흘렀음에도 안중근을 기억하고 있다. 2005년 항일전쟁승리 60주년 기념을 전후해서도 안중근을 잊지 않았다 2006년 1월 1일까지 ‘바이두 百度(백도)’검색 사이트에 안중근 의거 기념 글이 수천편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리성걸, <안중근 연구>).

한편, 중국은 2014년 1월 19일 국인의 영웅이기도 했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역사 현장인 헤이룽장 흑룡강성 하얼빈 역에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을 세워 문을 열었다. 일본이 이토 히토부미 추모비를 세웠던 자리였다.

2013년 말 한·중이 안중근 의사 의거 기념 표지석 설치를 협의할 때, 일본이 크게 반발하자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안 의사는 역사 속에서 항일 투사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중국인은 그를 존경한다(安重根是历史上著名的抗日义士,在中国也受到尊敬)”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 의거 표지석 설치에 대한 일본의 반발을 중국은 기념관으로 화답했던 것이다(현재 안중근 기념관은 하얼빈 역사 개조작업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다).

안중근을 숭모한 일본인들

​일본 혼슈 미야기현 구리하라시 대림사에는 지바 도시치 부부와 안중근 의사가 함께 모셔져 있다.​
​일본 혼슈 미야기현 구리하라시 대림사에는 지바 도시치 부부와 안중근 의사가 함께 모셔져 있다.​

안 의사의 의거는 일본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접촉하였던 일본 관헌들은 오리려 안 의사를 숭배하였다.

그들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행위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의거였으며 숭고하고 뛰어난 인품을 지닌 인물임을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알고 존경하였던 것이다.

구리하라 사다키치(栗原貞吉) 형무소장,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淸四郞) 검사, 미즈노 기치타로(水野吉太郞) 관선 변호사,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 뤼순 고등법원장,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간수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특히 뤼순 감옥의 간수로 복무한 ‘치바 도시치(千葉十七)’가 대표적인 인물로, 안중근으로부터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유묵을 받기도 했다. 그는 고향 미야기 현으로 돌아온 뒤 집안 불단에 안중근 의사의 위패와 사진, 안 의사로부터 받은 유묵을 앞에 배례하고 불공을 드렸으며(유묵은 1980년 후손들이 한국에 반환했다), 자신이 다니던 대림사(大林寺)에도 안 의사 위패를 모셨다. 그의 시후에도 부인 아오키상과 손자 지바 세이치도 안 의사 불단배례를 계속했다. 당시 대림사 주지인 사이토 다이켄는 안중근에 감동, 구리하라에 기념비와 기념관을 세웠고 매일 불공을 드려왔으며 <내 마음속의 안중근- 치바 도시치의 생애>의 책도 펴냈고, 매년 9월 안중근을 숭모하는 일본인들을 모아 추모제를 열고 있다.

1979년 안도 도요로쿠(安藤豊祿) 오노다(小野田)시멘트 회장 등은 ‘안중근연구회’를 창설한 이래 안 의사를 연구하고 알리는 일을 계속해 오고 있다.

하얼빈 역 현장에서 안 의사에게 총을 맞았던 남만철도주식회사의 이사였던 다나까 세이치로(田中淸次郞)도 안 의사를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다나까(中野泰雄)가 저술한 <안중근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는가>라는 책에서 “…현장에서, 안중근은 아직 총탄 한발을 발사하지 않고 남겨두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안중근의 인격이 미 발사된 총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으로 생각했다…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사람 중에서 안중근이 제일 위대한 사람이라도 본다”고 증언했다. 이외에도 안중근의사의 무죄를 주장했던 동경변호사회 회장 등 많은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안중근 의사를 높이 평가했다.

동양평화론-21세기 담론으로

안중근 의사는 한중일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요 국제적 평화주의자였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 수감 중에도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며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주창하였고, 마지막 유언으로 동양평화를 남겼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요체는 ①한중일 3국의 ‘상설 평화회의체’ 구성-유럽연합(EU)같은 다자간 협의기구 구성 ②뤼순항의 개방과 공동관리 ③한중일 3국이 공동출자한 공동은행의 설립과 공용 화폐 발행 ④한중일 3국 공동군단 편성과 2개 국어교육을 통한 평화군 양성 ⑤한중일 3국의 공동 경제발전 ⑤로마교황으로부터 3국 독립 보장 획득 등 독창적인 평화안이었다. 기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유럽공동체(EU)와 유사한 구성안으로 무려 EU보다 1세기나 앞선 시기에 제안되었다는 점에서 안 의사가 미래 지향적 선각자로서 시대를 초월한 통찰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특히 안 의사의 동북아 평화론 구상은 21세기 국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옮겨오는 문명사적 전환기인 이 시대의 동아시아 평화담론과 일맥상통하면서 21세기의 동아시아담론으로 다시 부활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8월 15일 광복 73주년 경축사에서 '동아시아 철도 공동체'를 제안했다).

그러므로 미래는 필연코 평화의 문화와 문명으로 세계가 리드되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될 것이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의의와 가치는 더욱 새롭게 조명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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