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리를 휘감은 자드락길이 겨울이 돼서야 선명하게 제모습을 드러냈다. 온갖 것에 숨겨진 길이다. 여름에는 푸른숲 사이에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녹음에 짓눌러 있었고, 굽은 청가시 넝쿨이 은근슬쩍 길을 가로막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였다. 그럼에도 길은 자신을 지키며 사람을 기다리고, 바람을 기다리고, 산짐승을 안내하였다. 그런 자드락길을 오르다 보면 숨을 고르고 잠시 쉬어가라고 유혹하는 후덕진 곳이 있다. 시커멓게 그을린 바위와 늙은 나무가 다소곳이 반겨주는 곳, 숨 쉬는 공간이다. 그곳에 앉아있으면 허우적거리던 세상과 단절이 시작된다. 조금은 헐거워진 숲에서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바위에 앉으면 늘 고요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혼란스러운 것들을 털어내고자 유난을 떨지 않아도 되고, 일부러 고요와 하나 되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곳에서는 소리와 몰입이 가능하고, 풍경과 눈맞춤이 가능하고, 순환하는 자연에 겸허해진다. 그곳에는 친소親疎가 없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 그곳은 꾸밈이 없기에 관절 꺾인 풀 한 포기만을 바라봐도 행복한 맥시멀리스트
maximalist를 느끼게 된다.
바람이 지나갈 때 시퍼런 황칠나무 잎사귀가 ‘뚝’ 떨어졌다. 자연은 이토록 삶과 죽음의 사이가 간결하다. 그런 낙엽들이 모여든 자리로 겨울바람이 지나가면 서로에게 비벼대는 소리를 나는 좋아한다. 나뭇잎은 어느 나무 아래에서 거름이 되든 그 모든 것이 다 하나 됨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떨어진 자리에서 온전히 썩기를 바라며 풍겨오는 은은함이 좋다. 그래서 마음이 허해질 때면 숲에 몸을 기댄다. 숲은 세상 밖의 소리가 고요를 해쳐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숲은 낯선 것에 대한 경계가 없기에 훌쩍 다가갈 수 있다. 아무렇게나 찾아가도 포근하게 받아주는 숲은 날 선 가슴을 풀어 놓게 만든다.
길을 따라 지나가는 바람이 위무慰撫할 때 슬그머니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낮은 물소리와 나무에 매달려 떨고 있는 누런 잎사귀의 몸부림 소리가 정겹다. 어느 음악 소리보다 더 그윽하다. 뮤직 포레스트Music Forest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보채거나 서두름이 없고, 억지스럽지 않고 잔잔하다. 일정하지 않은 음률이 포개진 소리와 풍경이 포근하다. 이런 소리를 들으며 두리번거리는 지금 나는 무소유의 자유로움 속에서 고독한 일기를 쓰고 있는 기분이다. 자연에서 느끼는 감정은 무너지지 않는 행복이다.
법정 스님은 “겨울은 우리 모두를 뿌리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이라고 했다.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날들을 잠재우고 침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절이라고 말한다.” 새벽녘, 눈보라 치는 소리는 삭막하지 않다. 어쩌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자연의 몸부림인지 모른다. 그래서 겨울바람에 문지방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심한 고독감을 느끼곤 한다.
모퉁이를 돌았다. 나무는 홀가분하게 서 있다.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그냥 평범한 작은 나무다. 가까이 다가가 눈 맞춤했다. 가지 끝에 떨켜를 붙들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어린 나무가 숭엄하다. 봄이 오기까지 떨켜는 맑은 바람을 품고 있다가 삼월 햇살에 맑은 향기를 토해 낼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러기에 입 다문 떨켜 하나가 새싹을 틔울 때면 우주는 숨을 죽이는 것이다.
며칠 전, 빈 숲으로 흰 눈이 쏟아졌다. 주섬주섬 걸치고 숲으로 갔다. 무엇에 홀린 듯 거침없이 오르다가 자리 잡고 앉아 흰 눈과 마주했다. 까칠한 삭풍이 흔들 때마다 숲은 숨넘어갈 듯한 소리를 지르며 추위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갔다. 온갖 더러움을 털어낼 듯이 눈바람과 마주했다. 그것은 뒷산 이름 없는 무덤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살기 위해 “먼지 하나 남김없이 털어내는 무심의 의식”을 실행했는지 모른다.
새들이 떠난 겨울 숲에 고요함조차 숨을 죽였다.
새털처럼 쓸쓸하기도 하고 편안하다. 그래서일까?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듬직해 보이이기도 하고, 숭숭뚫린 숲사이로 겨울 하늘이 낮게 보이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소리가 들뜬 나를 침잠沈潛케 한다. 그래서 오늘이 좋다.
눈 내리는 겨울 숲에 들어와 침묵으로 마주한 오늘은 존재가 단순했다. 조금은 외로워도 또 다른 나를 응시했다. 쓸모없는 것에 한눈팔지 않았다. 편협한 눈으로 함부로 결정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족쇄 같았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털어냈다. 소유라는 단어를 기억하지 않았다. 오롯이 나에게 귀 기울인 소중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