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과 풍암 문위세 (上)
특별기고 -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과 풍암 문위세 (上)
  • 장흥투데이
  • 승인 2024.02.0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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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장흥을 「문림의향」 고을이라고 한다. 1986년 1월 16일에 목포→강진→장흥으로 진입하는 국도 23호선 주변에 충열리 소공원을 조성하고 존재 위백규 동상을 건립했다.

향후 광주→나주. 화순→장흥으로 진입하는 늑용 3거리에 가칭 『호국역사 공원』을 조성하였으면 하는 생각으로 정리하였다.

Ⅰ.문위세 학문과 선비정신

○ 1534년(중종29년) 장흥군 부산면 부춘리 춘정마을에서 출생했으며, 오늘날 장흥, 화순, 강진, 보성군 등 전라남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남평문씨는 모두 문익점(1331~1400)선생의 혈손이다. 부친 양(亮)은 일찍이 과거시험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된 뒤 선전관과 오포만호(萬戶:종4품)관직을 지낸 뒤 청영정(현 부춘정)을 창정하고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모친 해남윤씨는 강진. 해남지역 명문가문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1476~1543)의 둘째 딸이다.

○ 해남윤씨 외가 쪽에서 문위세를 각별히 아끼고 보살폈다.

1519년(조선 중종 14년)에 중종 즉위 이후 정국을 주도한 훈구파와 신진 사림파들의 갈등으로 발발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서 최산두, 윤성춘과 더불어 호남 3걸로 널리 알려진 큰 외숙 귤정 윤구(橘亭 尹衢,1495~1549)선생은 생질 문위세 에게 9세부터 글을 가르치면서 글 짓는 공부보다는 어진 마음을 닦는 성리학에 전심하도록 하여,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기까지 평생 동안 정신적 기저로 작용하게된 것은 첫 스승이자 외숙에게 익힌 선비정신이었다.

○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2~1571)선생은 큰 인물로 키우고자 문위세를 13세부터 학문을 34세까지 안동 도산서원에서 『주자전서(走者全書)』 가르침을 직접 가르쳤다.

특히, 퇴계 이황은 문위세 나이 27세에 팔진도(八陳圖)에 대해 설명한 다음 그 해설서를 베끼게 하면서 “이 역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일단(一端)이니 독서하는 여가에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연구하라.”라고 말했다.

성리학자 퇴계 이황선생이 경전(經典)이 아닌 병법을 격물치지(사물의 위치를 연구해 앎에 이름)하도록 하였던 것은 임진왜란 때 국란을 극복하려는 유학자로서 의병을 모집해 제갈공명의 팔진도를 전투실전에서 응용한 것이 특이하다.

Ⅱ. 팔진도(八陣圖) 병법(兵法) 실천

※ 팔진도는 제갈공명이 주역 팔괘(八卦)의 방위에 의해 만든 「군사조련 용병술」로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 의병장이 되어 왜군과 싸울 때 큰 힘이 되었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팔진도 군사훈련부터 익혔다는 사실은 왜란을 예측하여 대비했다. 임진왜란 발발 5년 전 1587년 거문도 근해에서 녹도만호 이대원 등이 전사하는 사건이 있을 무렵부터 유치면 늑용마을 앞 백운암(白雲菴)을 짓고 그 주변에서 아들과 조카에게 활쏘기, 말 타기 등을 가르쳤다.

따라서 임진창의록(壬辰倡義日記) 기록에 의하면 문위세는 1592년 7월 1일 장흥, 강진, 해남, 영암선비에게 창의통문(倡義通文)을 보낸 뒤 두 형님(위천, 위지)과 함께 청영정(淸潁亭,현재 부춘정)에서 의병 일으킬 것을 논의한 뒤 큰 아들 문원개(文元凱)로 하여금 집안 노복(奴僕)100여명을 동원하게 하고 군량을 모으는 한편, 강진출신 이충량(李忠良)을 자신의 부장(副將)으로 삼아 향병조직을 갖춘 뒤에 보성에서 거주하고 있는 자형 박광전과 의논하여 보성 임계영 등과 협조체제를 구축했다.

Ⅲ. 풍암 문위세 신도비(神道碑)

※ 신도비는 종2품 이상 높은 벼슬아치에 한하여 세울 수 있으며, 신도(神道)라는 말은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 원래 신도비는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택한 신도비 내용을 1700년에 받아두었다가 1729년 그 당시 유치면 늑용1구 마을 앞에 세웠으나 조선시대 남인(南人)들의 정치적 파란과 연관되어 매몰하였고, 현재 신도비의 내용은 임금의 특명으로 황경원(黃敬源,1709~1787)이 1785년에 택(擇)하고 유운제(柳運濟)가 썼다.

1812년에 강성서원 신실 앞에 다시 세워진 신도비는 장흥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자 2004년도에 강성서원을 유치면 조양리 677-5번지로 이건하면서 현재위치로 옮겨졌다.

※ 풍암 문위세 신도비 비문은 선생의 생전 행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 풍암 문위세 신도비 국역문>

…전략:前略 … 1592년에 섬 오랑케 왜적이 침범해 선조대왕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셨고, 전국 7도가 함몰 되여 호남만은 보전 하였으나,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 등 여러 의사가 잇달아 전사하니, 모든 고을이 허둥지둥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박광전(朴光前)에게 가서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양곡과 병졸을 오직 호남에만 믿고 있는데 호남에도 사람이 없으니 호남을 보전하지 못하면 나라는 망할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선비를 얻어 도망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웅거하여 맞아 싸운다면 훗날 회복할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군자는 죽을 때 마땅히 죽어야 할 터이니 쥐처럼 숨어 엎드려 살기를 도모할 수 없다.”라고 말하니

박광전은 “내 뜻이다.”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글을 지어 임계영(任啓英)에게 알렸는데 임계영은 이 일을 계획할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던 사람이엿기 때문에 달려와 공의 손을 잡고

“나는 그대가 세상일을 잊어버리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의병을 일으키자 하는구나.”라고 말하고 드디어 계책을 의논하여 격문을 여러 고을에 효유하고 있을 때 능성현령 김익복(金益福)이 달려와서 “우리들은 각자 의병을 모아 선두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문위세는 충의로써 친지와 일가들을 분발시키고 자제들을 겅진, 해남, 영암 고을 선비들에게 나누어 파견하여 장사 3백여 명을 얻어 7월 20일에 보성현(寶城縣) 관아대문 앞에 나아가니, 임계영과 박광전도 약속한대로 도착했는데 역시 수백 명을 모아 왔다.

문위세는 “장수가 없으면 군대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임계영을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박광전과 계책을 세우는 일을 주관하였다.

…전략:前略…임계영은 종사관 정사제(鄭思悌)로 하여금 공로에 대해 상소문을 올려 진술했고 순찰사 권율이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대궐 밖에 거동했을 때 머무는 곳)에 급히 아뢰어 의병들의 공로를 논할 때 문위세를 제일로 삼았으며 조정 중진들이 입을 모아 재능과 학문을 추천하여, 임금의 특명으로 6품에 승진시켜 용담(龍膽)현령에 임명하였다.

나라의 근심이 커서 감히 사직하지 못하고 있는데 적이 다시 쳐들어와 하나의 군대를 형성함으로써 적의 길을 차단하였다. 아들 5명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출몰하면서 적을 목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많으니 온 경내가 편안하니 명나라 장수가 감탄하면서 “호남과 영남이 적에게 휩쓸려 백성의 재물이 모두 탕진이 되었으나 이 고을만이 완전하니 그 원님의 현명함을 알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중략… 선조대왕이 공의 정치 실적을 생각하시어 품계를 뛰어넘어 파주(坡州)목사에 임명하셨으나, 병이 깊어져 운명하니 고향 장흥도호부 늑용(勒龍)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퇴계 선생께서 팔진도(八陳圖)를 다른 제자들에게는 주지 않고 문위세에게 줬던 것은, 훗날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진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권면한 것인데, 애석하게도 그 재능이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1785년에 월천사(月川祠)에 편액을 내리시어 강성사(江城祠)라 하고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을 주벽(主壁)으로 모시어 조정에서 제사를 내리면서 문위세를 배향하게 하였다.

공의 6세손 취광(就光)이 황경원에게 신도비명을 청하므로 명(銘)을 짓는다.

『선비로서 군대 일을, 스승의 문하에서 배워, 그 공로를 백성에게 미치니, 그 녹(祿) 마르지 않아 후손들이 받는구나.』

보국숭록대부(정1품) 행(行)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知經筵). 춘추관사 성균관사. 규장각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황경원(黃景源:1709~1787)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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