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과 풍암 문위세 (中)
특별기고 -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과 풍암 문위세 (中)
  • 장흥투데이
  • 승인 2024.02.0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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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Ⅳ. 전라좌의병(全羅左義兵) 문위세 활동

1.전라좌의병 조직

전라좌의병은 고경명 군사의 금산패전과 관계없이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성군하였다. 우선 성군과정을 살펴보면 장흥 문위세, 보성 임계영, 화순 김익복 등 전라좌도 남부지역 퇴계 이황 선생의 사림이 주축이 되어 1592년 7월 20일 1천여명 (문위세 의병 300여명, 임계영 의병 200여명, 박광정 의병 200여명, 김익복 의병 300여명) 의병을 모아 기치를 세운 주요 일정별 내용은 아래와 같다.

○ 7월 1일: 문위세가 두 형님을 만나 뵙고 장흥군 부산면 춘정마을에 있는 청영정(현재 부춘정)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협의한 후 장흥, 강진, 해남, 영암고을 선비들에게 통문을 보내고, 두형님(위천, 위지)과 장흥도호부 객관(客館)이었던 관산관(현재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 모여서 논의하고 의병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먼저, 집안 노복 100여명과 다섯 아들, 조카(문희개), 사위(백민수)와 문위세제자 몇 사람으로 하여금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도록 하였으며 지형 박광전과 의논하여 임계영을 만날 것을 약속하게 하였고, 강진 사람 이충량을 군무(軍務)에 참여시키고, 능성(현재 화순 이양면)현령 김익복을 합류시켰다.

○ 7월 8일: 문위세(장흥), 임계영(보성), 김익복(화순)이 의병을 인솔하여 7월 20일 보성관아 대문 앞에 모이기로 의논하였고 보성 정사제(鄭思悌,홍문관 정9품 벼슬)를 합류한 후 ‘호(虎)’자로 장표(章標)를 삼아 『전라좌의병』이라 명명하고, 박근효(朴根孝)를 참모관(參謀官), 김익복을 호표장(虎標長),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고, 문위세는 양향관(糧餉官:의복, 무기, 비품 등 군수물자와 재정을 담당)으로서 전라좌의병 운영일체를 관장하였다.

○ 7월 10일: 임계영, 박광전, 문위세, 김익복은 여러 고을 친구들에게 격문을 보냈다.

2. 전라좌의병 출전하면서 보내는 격문

○ 1592년 7월 20일 보성에서 낙안, 순천, 구례, 남원으로 출진하면서 세 의병장(임계영, 문위세, 김익복)은 00지역 선비들에게 보낸 격문의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다.

- 의병은 유생들이 먼저 일으킨 것인데 즉 선비가 마땅히 분기하여 군졸의 선두가 되어야 함에도, 지금은 비록 어리석고 용렬한 병졸과 게으름을 피우는 무리들도 모두 의병으로 나아가고 있다.

00지역은 큰 고을인데 동지 한 두 사람 이외는 모두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이에 따르지 않으니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인가?

이 때에 신하된 사람은 진실로 삶을 바랄 수 없을 터인데 여러분들은 홀로 임금을 생각하지 않은 것인가? 공론이 일어나면 과거(科擧)시험에 응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을 늦출 수 있겠는가?

군대 규율이 지극히 엄격하니 지금도 잠시 기다릴 것이니 다른 의병과 함께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기 바란다.

- 종사관(從事官) 정사제(鄭思悌:홍문관 정9품 벼슬)가 격문을 돌릴 때

임제(任濟). 소상진(蘇尙眞), 김홍업(金弘業)이 함께 왔다.

3. 의병운동에 뛰어든 일가창의(一家倡義)

○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등재된 전라좌의병장 동 창제공(全羅左義兵將 同 倡諸公) 즉 전라좌의병 지도층 인사들은 의병장 임계영을 포함하여 모두 21명이다. 출신지역별로 살펴보면 장흥 10명, 보성 9명, 강진.흥양(고흥) 각각 1명인데 보성 박광전과 박근효(박광전의 장남)는 문위세 매형이자 고종간(박근효)이여서 일가친척이다.

장흥 출신 10명 가운데 남평문씨 집안사람이 6명 차지하고 있으며, 문위세 사위 백민수(1577~1615)를 포함하면 7명이다.

○ 풍암 문위세를 주축으로 한 남평문씨 일가 5부자와 조카, 사위가 모두 의병운동에 뛰어든 일가창의(一家倡義)의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문위세와 함께 전라좌의병 지도층을 형성한 임계영(任啓英)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진보현감(珍寶縣監, 전북 임실)을 지낸 전직관리로서 도내에 이름난 인물이었다. 특히 왕자사부(師父)였던 박광전은 문위세 자형(姊兄)이니 전라좌의병을 봉기함에 있어서 처남과 자형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으며, 두 사람의 협력관계가 의병활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4. 전라좌의병 활동 전과

1) 개령전투, 지략으로 패전 면해

○ 1592년 10월 10일 개령(현재 경북 구미시, 김천시 일부)전투 잔승은 문위세 역할이 매우 컸다. 개령에서 전라도 좌의병 및 우의병 부대와 김면(金沔,1541~1593) 경상도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왜적과 세 번이나 싸워 세 번 다 후퇴했고, 연합의병부대가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려고 했을 때 문위세는 “적이 여러 번 후퇴하는 이유는 반드시 속임수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추격하는 적을 적극적으로 만류하면서 척후병을 보냈는데,

해저물녘에 척후병이 돌아와서 “모처에 왜군이 매복해 있는데 구 수가 1만 명도 넘었다는데 우리 군사가 추격하지 않자 모두 해산해 버렸다.” 라고 보고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크게 놀라 :어찌 그렇게 될 줄 알고 추지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묻자

○ 문위세는 양쪽 진영이 한참 싸우다가 상대방이 아무 이유 없이 스스로 퇴각하는 것은 반드시 유리한 지점에 매복해 있다가 우리가 추격해 오면 우리를 덮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추격하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러워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항상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제갈공명(諸葛孔明,181~234)이 공명정대하고 근신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2) 문위세 백의 의병장(白衣 義兵將)

○ 1592년 8월 9일 전라도 의병 부대가 남원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문위세 몸 차림새를 살펴보고 “유생으로서 의병장으로 나섰으니 휘하 병졸들이 오합지졸인줄 알았는데 잘못 행각했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당초에는 하얀 무명옷을 이은 문위세가 의병 창의할 때 사람들은 백의 서생(白衣書生)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군대 일에 익숙하지 못할 것이라고 냉소하였고 여러 고을 수령들도 하찮은 선비로 치부하고 잘 도와주지 않았다. 교만한 장수들과 군졸들도 비웃으면서 방해하고 헐뜯기까지 했다.

○ 그러나 그란 저런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수장(首將)으로서 업무를 처리했으며, 전라좌의병의 군졸 식량과 군수물자 일체를 개인적으로 마련하고 조달해 주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무주․ 금산에서 왜적을 토벌하면서 칼이나 창을 포획하여 대체할 수 있었으며 식량이나 의복조달은 여전히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의서생(白衣書生)이라고 놀려댔던 여러 장수들로부터 신임을 얻었고 그의 휘하 군졸로부터 엄격한 통솔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 1592년 9월 22일 윤안성(尹安性,1542~1615) 남원도호부사는 문위세 휘하 군졸들을 둘러보면서 “문위세가 군대 장비를 단속하고 군무(軍務)를 시행하는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제갈공명을 본 것 같구나”라고 말하면서 남원고을 여러 선비들에게 권유하여 병사 500여명을 넘겨주니 이웃 고을에서도 200여명이 모여들여 흰 옷 입은 백의(白衣)의병장 문위세 에게 앞을 다투어 달려들어 강성한 의병군으로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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