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과 풍암 문위세(下)
특별기고 -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과 풍암 문위세(下)
  • 장흥투데이
  • 승인 2024.02.0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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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Ⅴ. 문위세 의병활동

5.용담현령 5년간 임명

○ 1594년 4월 전국 의병을 모두 해산시키고 김덕령 휘하 부대만 남기는 조치가 내려질 때 문위세는 향리(장흥군 유치면 늑용마을)로 내려와 아들과 백운암(白雲庵)과 사군정(思君亭)에서 성리학에 뜻을 두고 학문하고 있었다.

그때 의병활동의 공적을 평가하여 1595년 봄, 조정 고관들이 용담현령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연로하여 취임을 안하려고 했지만 국가형편이 병란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부임하였다.

전북 용담고을은 노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섬진강과 금강 분수계가 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호남과 영남 왜적이 왕래하는 길목의 요충지여서 중요한 작전지역이었다.

○ 그래서 왜란의 피해가 많아 창고 곡식이 다 없어져 토착민들은 뿔뿔히 흩어져 있어 토착민들의 정착을 위해 1596년 1월 23일 용담현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통문을 보냈다.

…전략:前略… 용담고을은 영남과 호남이 왕래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비로 전투는 조금 멈추었다 하더라도 외인(外人)이 넘보는 일이 적지 않았으므로 무엇보다 군대를 사방으로 강화하여 평정할 수 있으니, 산속에 피난하고 있는 우리 현민들은 하산하여 생업에 안정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구제해주는 은혜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감히 명령을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농업과 양장을 하게 하여 그 때를 잃지 않기를 어양(漁陽, 중국 하북성에 위치, 중국 목화 최대 생산단지)사람들처럼 하게 한다면, 비록 장군(張君:장거정, 명나라 대 정치가)과 같은 정치가 없더라도 그 즐거움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고을에 어진정치가 없다하여 안도하기를 아니하였더라도 성스러운 조정이 깨끗한 교화에 흠뻑 젖을 것이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위 내용에는 현령의 치자(治者)로서 겸손함과 굳은 결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6.파주목사 임명

○ 1597년 4월 23일 정유재란이 시작되어 1597년 8월 16일 남원성과 진주성이 모두 함락된 직후 그 인접지역이었던 용담고을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 전라좌의병 장흥군 의병부대 이충량 부장과 문위세 큰 아들 문원개를 위시한 다섯 아들과 조카와 사위 백민수 등에게 명하여 1,500여명 의병을 규합한 다음 동원된 전 병력을 3개조로 편성한 뒤 1대는 남원의 적을 추격케 하고, 다른 1대는 영남으로 통하는 요충지 양치(良峙)를 방어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1대는 용담읍성을 방위하게 함으로써 고을의 안전을 지켜낼 수 있었다.

○ 용담고을을 무사하게 지켜냈던 것은 현령 문위세와 휘하 의병활약 때문이었다. 그의 업적들은 임진왜란 전쟁 7년이 끝난 1600년에 재평가되어 선조 임금으로부터 정3품 파주복사 임명 교지가 내려졌다.

Ⅵ. 맺는 말

○ 풍암 문위세는 문익점 선생 9대 손이며, 기묘명현 귤정 윤구 생질이여서 전통 사림파 가문 인물이었다.

귤정 윤구, 미암 유희춘, 퇴계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아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한 과거지학(科擧之學)보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도학자(道學者)였으며, 스승에게 이어받은 투철한 선비정신은 평생 그의 정신적 지저로 작용하여 임진왜란 의병운동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 되었다.

○ 임진왜란 때 장흥도호부를 대표하는 문위세 의병활동은 전라좌의병 지휘부 핵심인물로 참여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그래서 남평문씨 일가 6부자와 조카, 자형, 사위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일어난 전형적인 일문창의(一門倡義)라는 점에서 차별화 되며, 문위세와 함께 그의 아들 문영개, 문형개, 문홍개, 문여개, 사위 백민수, 조카 문희개는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등재되었다.

1798년(고종35)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유생 임오원(任伍源) 등 600여명 상소하여 풍암 문위세를 병조참판 증직이 하사되었고, 부조묘(父祧廟:공적이 탁월한 신하에게 국가에서 사당에 영구히 제사모시도록 허락하는 것)를 허락하여 지금도 매년 10월 4일 향사해 오고 있다.

○ 그리고 장흥도호부를 대표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문위세 의병활동은 의병의 군량조달은 물론 관군의 군량까지 공급하는 일에 천신만고의 고난을 다하였다.

비정규군인 의병활동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가징 중요한 문제가 바로 군량확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 장기화 되고 흉년이 거듭된 당시의 실정에서 볼 때 의곡 지원 및 전지운송에 집중된 문위세 의병활동은 실전의 전투 활동에 못지않게 높이 평가 되어야 할 업적이라 하겠다.

○ 전라좌도 남부지역 사림이 주축이 되어 처음에는 전라좌의병 양향관으로 뒤에는 호남운량관으로서 호남지방에서 모은 곡식을 영남지방으로 수송하여 의병군량을 공급하는 한편, 행주산성 전투에 참전했던 전라도 관군의 군량미와 군사를 지원하는 책임까지 직접 맡았다.

향토방위가 아닌 국란극복차원에서 성군된 전라좌의병의 전공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향후 『의향 장흥』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향(義鄕)」은 인간의 존엄과 생명존중의 기틀이 되는 정신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 고장 장흥에는 어느 고장보다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임진왜란 때 문위세는 그의 다섯 아들(원개, 영개, 형개, 홍개, 여개)과 사위 백민수, 조카 희개 등에게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자신은 군량을 조달했으며 특히, 전라좌의병이 경상도 성수성 수복 전투를 1592년 12월 12일에 승리로 이끌게 했다.

그래서 광주→나주. 화순→장흥으로 진입하는 국도 23호선 한켠 늑용 3거리에(풍암 문위세 묘소 아래) 가칭 『백의(白衣) 의병장 호국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풍암 문위세 동상이 건립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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