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호 사설 - 마하수 공이 왜 정유년 조선의 영웅이었는가,
제212호 사설 - 마하수 공이 왜 정유년 조선의 영웅이었는가,
  • 김선욱
  • 승인 2024.02.0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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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 전인가, 해남 우수영 관광지를 견학한 일이 있었다. 그때 ‘마하수 5부자’ 조형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왜 이 조형물이 장흥이 아닌 여기에 있을까? 그날 대면한 마하수 5부자 조형물은 필자가 마하수(馬河秀)에 대하여 비로소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우수영관광지 공원 전면부에 ‘울돌목의 의병항쟁’이라는 주제로 3개의 기념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세 기념동상 중 ‘마하수 5부자’는 ‘울돌목의 의병항쟁(1)’이라는 첫 번째 동상으로 세워져 있는데, 그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명량대첩은 해남 진도 등 해안지방 사람들이 수군과 같이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항쟁의 승리였다. 부자 형제와 이웃들이 함께 참전하여 끝까지 싸웠으니, 마하수 일가 5부자의 혈전이 그 한 예이다. 부친이 적선에 포위된 통제사를 구원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그 시신을 안고 일성통곡으로 복수를 맹세한 마씨 형제들, 그들은 적이 패퇴할 때까지 결사의 항전을 그치지 않았다.”

마하수 공의 네 아들은 마성룡(成龍)·마위룡(爲龍)·마이룡(馬而龍)‧마화룡(馬化龍)이었다. 『호남절의록』, 『충무공전서』 등 공식적인 기록에는 마하수의 명량해전에 참전한 아들로 장남 성룡과 차남 위룡만 나온다. 그런데 위백규의 ‘마하수사적’이나 행장, 마성룡·마위룡 등의 행장에는 분명히 네 아들 이름이 모두 나오고 이들의 전투 기록도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이를 근거로 ‘마하수 5부자 명향해전’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장남 성룡은 33세, 둘째 위룡은 21세로 성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공식적인 기록에는 거명되었지만 셋째 마이룡은 16세, 넷째 마화룡은 10세로 약관이 되기 전인 아동이었기 때문에 굳이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지난 해 9월부터 본지에 연재하였던 마하수 관련의 기획물도 따지고 보면, 그때부터 가져왔던 마하수 관심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하수 관련 기획물을 연재하면서, 우선은 마하수와 네 아들의 절의(節義)에 초점이 모아졌지만, 임진왜란‧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맞아 창의(倡義)하거나 의병으로 참여했던 장흥 마씨들의 빛나는 그 절의(節義)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연유가 바탕이 되어, 마하수 공의 전·후대를 관통하는 장흥 마씨의 빛나는 절의정신에 새삼 감탄하며 마하수 공과 장흥 마씨 전체를 훑어보는 글도 정리하게 된 것이다.

지역 신문에 연재되는 마하수 기획물의 주제가 당초는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였다. 그런데 이 기획물이 책으로 엮어지면서 ‘조선의 영웅 마하수’로 바꿔졌다.

왜 그랬을까.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는 감히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였다. 이는 정유재란 초 충무공의 명량대첩으로 인한 결과였다. 명량대첩은 한 마디로 수장되어 가던 조선의 운명을 일거에 건져 올린 ‘기적의 승첩’이었다.

이 명량대첩에는 결사 항전한 수많은 영웅이 있었다. 이 영웅 중에 가장 돋보인 영웅이 바로 장흥의 마하수였다.

당시 명량해전에 전투병도 아니요, 단순히 후원군으로 참여했던 마하수였다. 젊고 패기 넘친 중장년도 아닌 노쇠한 60세 노구였던 마하수였다. 중무장한 전투선도 아니어서 무장하지도 않았으며 네 아들과 수많은 가솔들을 태웠던 향선으로, 전장의 먼 바다에서 후원 세력으로 포진한 100여 척의 피난선 중에 유일하게 혈혈 단선(單船)이었다. 그런데도 왜선들에게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놓였던 충무공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중무장한 왜선들을 향하여 돌진을 감행, 결사 항쟁 중 전사했던 마하수였다.

마공의 그러한 결행은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굳건한 선비로서 나라를 위해 자기 죽음은 물론 네 아들의 목숨까지도 불사한 대단한 결기(決起)의 충절과 절의 정신의 발현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이러한 마하수 공의 그 절의(節義), 그 의기(義氣), 그 용단 넘친 결행이야말로 ‘영웅 중의 영웅의 정신’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곧 장흥의 ‘의병 정신’에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결행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그 수많은 전란의 전투 현장에서 이 만큼의 의기 넘친 결행이 조선의 땅 그 어디에서, 그 누구에게서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리하여 필자는 당시 마하수의 결행을 ‘조선의 영웅’ 정신으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히 마하수 공의 그때의 그 충절과 절의의 표상으로서 결행은 당시 조선 땅에서는 최초요 유일한 경우였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리하여 마하수 공의 그 절의 정신에 바탕한 그 결행은 ‘조선의 영웅’ 같은 대단한 절의와 기개가 아니면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숭고한 결행이었고 그러하였기에 필자는 마하수 공의 정신을 장흥의 영웅을 넘어 ‘조선의 영웅’으로서의 표상이었다고 거듭 확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하수 공은 조선의 영웅 정신으로 순절하였지만 전란 이후, 거의 그것으로 잊혀지고 말았다.

마하수 공에 대한 그 흔한 정려문 등 정문 관련 유적도 없다.

마하수 공의 경우 최소 2,3회 정도로 정려문이 세월질 법도 했는데, 단 한 번도 정려문이 세워지지도 않았다. 물론 지역에서도 선양되거나 크게 현창되지도 못했다. 최근까지도 마하수는 장흥사람들에게는 거의 잊혀진 인물이었다. 마하수 공이 배향된 충렬사가 장흥군 지정문화재로도 지정돼 있지 못하기도 했던 것이다.

장흥 마씨의 대표적인 위인의 표상인 마천목 장군은 무인 출신이었다. 무인인 마천목 장군의 충절을 계승한 장흥 마씨도 전통적으로 무인의 가계요. 문인보다 무인 쪽에서 강세를 보여 왔다고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충절과 절의 정신을 가통으로 이어받은 장흥 마씨들은 국가 위란 때는 과감히 창의하고 의병으로 참여하며 절의를 지킨 사람들이 다른 성씨들에 비해 유독 많았던 것도 이런 가통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시에 장흥 마씨들은 가통의 무인적인 성향 등으로 세상의 명예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중점을 뒀던 후예들이 많았는데, 이 역시 무인적인 성향과 기질 때문이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마하수공이 그동안 장흥사회에서도 잊혀진 인물이 되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다소 이러한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으로 유추된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그 숭고한 마하수 공의 그 훌륭한 절의정신을 장흥군민은 많은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장흥 의병사에서도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는 마하수공의 그 위대한 정신과 공훈을 기리고자 이번에 ‘조선의 영웅 마하수’를 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번 ‘조선의 영웅 마하수’의 책자 발간을 계기로 마하수공을 제대로 이해하고 장흥의 의병사가 제대로 조명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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