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장흥동학농민혁명군 이백호(李栢浩)를 아시나요?
특별기고 - 장흥동학농민혁명군 이백호(李栢浩)를 아시나요?
  • 장흥투데이
  • 승인 2024.03.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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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동학혁명은 1860년에 경주사람 최재우 선생이 개창(開創)한 민중 중심의 민족종교로 우리나라 근대사에 크게 이바지한 동학사상이다.

19세기 중엽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슬로건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民生)을 구제하고,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출하자는 동학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 사회개혁을 지향했다.

장흥에서는 1894년 12월에 3만명 동학농민혁명군이 벽사역(정보기관)과 장흥도호부, 강진현, 전라병마절도사가 주재했던 병영을 점령했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장흥 ‘석대들’ 대혈전이 벌어졌다.

장흥동학농민혁명군 이백호(李栢浩)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해서 무사가 되라는 뜻으로 자(字)를 무향(武鄕)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학문연마에 힘써 문무를 겸한 유생으로서 장흥동학농민혁명군으로서 무사답게 활약하다가 51세에 동학 농민군이라는 죄명으로 분살형(焚殺型)을 당했다.

이백호는 이방언 장태장군 막하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활동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오늘날 장갑차와 같은 구실을 했던 ‘닭장태’ 모양의 방어무기를 고안하고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방언 장태장군과 이백호는 삯과 같은 산짐승에게 닭을 안전하게 키우려는 ‘닭장태’를 크게 변형해 총알을 피하는 방어무기로 사용하려고 바퀴를 달아 굴러가게 하고 그 ‘닭장태’속에서 총을 쏘며 진격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군이 전투마다 승리하는 것이 ‘닭장태’ 도움이라 하여 이방언 접주를 장태장군이라 불렀다.

황룡강 전투 이후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전주성을 입성한 후 관군 측과 「전주협약」을 했고, 농민군 측의 폐정개혁을 수행하기 위해 집강소를 운영했다.

집강소는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농민군이 설치한 행정기관으로 고을의 수령들은 이름뿐이고, 모든 행정을 농민들 스스로가 맡아 실시했으며, 맨 위에 집강, 다음으로 서기, 성찰, 집사, 동몽 등 직원을 두어 관청의 면목을 갖추었다.

이백호 집강은 이방언 접주가 활동한 묵촌 집강소의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이방언 남도장군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막장이었다.

1894년 5월 7일 전주화약 이후 동학농민혁명군은 정부 측으로부터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지켜지지 않아 농민군이 다시 봉기했는데, 이백호 집강은 5천명 동학 농민혁명군을 모집하는데 공로가 매우 컸다고 구전되고 있다.

장흥일대 집강소 업무는 1894년 5월 전주 화약 이후 장흥도호부사 박헌양의 방해공작으로 그 해 10월부터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동학접주 이방언은 동문수학했던 유생 김한섭으로 동학농민군 활동을 중단할 것을 권고 받았으나 거절했으며, 이백호 집강 역시 선친의 제자들과 유림으로부터 갖은 회유책을 받았으나 이방언과 같이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이백호 집강은 장흥 ‘석대들’ 전투와 옥산 전투에 참전하여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퇴하고 모질게 살아남아 부하동료 2명과 함께 관산읍 용전리 외가집에 잠깐 피신했고 천관산에 숨어 있다가 안양면 당시 하양리처가집에서 은거했는데 토벌군에게 체포되었다.

관군들은 이백호 집강과 부하직원 2명을 끌고 가서 논바닥 말뚝에 묶고 머리에 유지개를 씌워 마른나무를 모아 불을 질러 시체가 까맣게 탔다.

이백호 가족들은 먼발치인 산속 숲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동학도인 역적이 불길에 타고 있어도 관군이외에 누구 한사람 찾아갈 수 없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자기 남편이, 자기 아버지가, 자기 시아버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불타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가족들은 산속 숲속에서 소리 없이 울고만 있어야 했다.

논바닥에 가맣게 탄 시체가 뒹굴면서 찬바람이 검은 재를 흩날려 이백호 시신을 큰 며느리와 둘째 며느리가 지나가는 행인처럼 사방을 경계하고 확인한 후에 해가지기를 기다렸다가, 네 명 며느리는 어둠을 뚫고 35리 떨어진 이백호 마을로 시신을 운반했다.

그리고 아들 넷은 분살당한 아버지의 부하 직원 두 명을 동네 떨어진 곳으로 운반하여 안양 무지개 산 밑에 묻어 주었다.

역적이라는 누명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집으로 모실 수 없어 아무도 모르게 인적이 드문 월림 마을 논자락 한켠의 산 밑 한적한 곳에 아버지를 묻었다.

이백호 집강은 이렇게 51세로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리고 이백호 후손들은 역적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다.

이백호 집강이 가신지 130여년이 지난 오늘 그 누구 한사람 장흥동학농민혁명군 이백호의 생애를 기억해 줄까?

그 당시 역적이라는 죄명 때문에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갖은 고생을 다했다. 증손자 이문갑(85세)은 증조부의 숭고한 동학정신을 자랑으로 삼고 살아왔다.

이문갑은 어렸을 때 할머니 품에서 시아버지의 한 많은 슬픈 이야기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들으면서 이야기 끝에 증조할아버지는 역적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늘날 민주화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지금부터 130년 전 동학농민혁명 운동이 그 당시에는 역적행위였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이 3.1운동으로, 5.18 광주항쟁으로, 오늘의 민주화 운동이 되었다. 그 누가 부정하겠는가?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주역은 이방언 접주였고, 이방언 장태장군 밑에서 묵촌 집강소의 집강으로서 혼신을 다했던 이백호 그분은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장흥동학농민혁명군 이백호 집강은 그 공적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 초라한 묘 앞에는 불망비도 없다.

※ 자료 출처: 증손자 이문갑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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