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호 사설 - 조선 영웅 주촌 마하수 의병장을 조명한다
제216호 사설 - 조선 영웅 주촌 마하수 의병장을 조명한다
  • 김선욱
  • 승인 2024.03.2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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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장흥의 의병장 마하수 학술 심포지엄 개최한다

영웅(英雄)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탄생될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국가 수난의 시대에 나타난다. 특히, 국가, 민족이 칠흑 같은 절체절명의 위란을 맞았을 때, 그 어둠을 헤치고 일어서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여 존경을 받게 되는 사람이 영웅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선 이순신, 권율, 김좌진, 안중근 등이 영웅으로 불리었다.

이 문제를 지역으로 한정해 보자. 과연 우리 장흥에도 영웅이 있었을까. 고려, 조선조 할 것 없이 많은 ‘위대한 인물’이 출현했지만 대부분은 고관이요 학자요 문인으로 그쳤다. 장흥의 대표적인 인물로 기봉 백광홍 선생이나 존재 위백규 선생이 있었지만, 그분들은 영웅은 아니었다. 기봉은 가사문학의 효시를 연 대문인으로, 존재는 호남의 대실학자로 칭할 수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등 국난의 위기에서 살신성인으로 국난 위기 극복에 앞장섰던 분으로 문위세, 임계영 등 여러 뛰어난 의병장들이 있었긴 하지만, 그분들 역시 유명한 의병장이었지만 영웅으로까지는 칭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웅이라 칭할 만한 인물이 있었다면 임진·정유재란 때 멸사(滅私) 충의로 헌신했던 반곡 정경달 선생, 그리고 정유재란의 명량대첩에서 4부자를 대동하고 참전, 이충무공을 구하려다 순절한 주촌 마하수 의병장 그리고 조선 말 동학농민혁명 때 장흥동학을 이끌었던 이방언 장군이 있었다. (이 난에서는 3인의 장흥 영웅 중 반곡과 주촌공을 거론하고자 한다)

1591년(선조 24) 선산부사로 도임했던 반곡은 다음 해인 1592년(선조 25) 4월, 임진난을 맞이한다. 4월 28일 상주가 함락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이처럼 왜군을 맞아 모두 도망가는 다른 수령과 달리, 반곡은 문관 출신임에도 잠시 몸을 피했다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있는 관군과 군민들을 모아 금오산에 진을 치고 참호를 파고 복병을 매복시킨 채 종일 적과 싸워 많은 병기를 노획하였으며 많은 왜군을 포로로 잡았다. 1592년 5월부터 이듬해인 1594년 5월까지 반곡의 선산 의병이 일 년간 적을 죽인 숫자가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명나라 군의 영남 진격에 따라 각 고을에서 식량을 공급하게 되었는데 고을마다 식량이 바닥이 났다. 그때 반곡은 금오산 도선굴에 비축하여 두었던 양곡으로 일부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로 충당하여 명나라 장수 유총병(劉總兵)이 반곡을 ‘식리장군(識理將軍)’이라 하며 치하하는 글과 금빛 부채를 주어 선산 의병의 공적을 찬양하였다.

이처럼 반곡 선생은 선산의 의병 활동으로 조령(경상도에서 서울로 통하는 요충지)을 경유하는 주력 부대의 진출을 견제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힘이 되었던 것으로 사가들은 평했다. 이러한 선산 전공으로 반곡 선생은 유명세를 탔다. 1594년 당시, 전쟁이 장기전이 되면서 군량미 확보에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이순신의 계청과 유성룡의 승인으로, 금오산 전승으로 잘 알려진 선산부사 반곡이 이순신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순신의 종사관이 된 반곡은, 특히 군량미나 군대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병사가 경작하던 토지인 둔전(屯田) 책임을 맡아 호남지역 여러 곳에서 둔전을 운영, 조선 수군의 식량을 조달하고 군수물자를 성공적으로 관리하게 되어 이순신의 군영 운영을 효율적으로 이끌었다. 이순신은 반곡이라는 최고의 일류 병참 참모를 곁에 둔 것이었다.

1597년 3월 이순신이 모함으로 투옥 되자, 반곡은 조정에 나아가 탄원서를 내고 직접 선조 임금을 독대하여 그의 석방을 위해 결사적으로, 종횡무진으로 노력하였다.

또 이순신의 종사관 이후, 반곡이 1595년 2월 남원부사 재임부터 청주 목사 재임 때는 주로 청국의 장수들을 상대한 접반사, 영위사 등의 업무를 도맡아 탁월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여, 조선국의 위상을 재고하는데 혁혁한 공을 남겼다.

이순신은 통상 성웅(聖雄)으로 지칭한다. ‘가장 드높은 영웅’이란 뜻의 성웅은 우리나라에서는 곧 이순신을 뜻하며, 성웅이라는 말 자체가 이순신의 고유 호칭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한 성웅의 존재는 반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여 문관 출신임에도 반곡은 임진란 선산의 금오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일구었던 탁월한 지략가요 의병장이요 장군이었으며, 해전의 성웅 이순신의 종사관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으니, 우리는 능히 그분을 영웅으로 칭할 수 있는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성웅 충무공 이순신의 명량해전에 참전한 조선국의 함선은 겨우 13척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작 13척의 병선으로 왜선 133척을 맞아 필사의 전투를 벌여 31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적의 함대를 물러나게 한 기적 같은 전승을 올린 전투가 명량해전이었다. 이 해전은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이 서해를 통과하여 한강 유역으로 침입하려는 그 왜군의 길목을 완전히 봉쇄하였다는 의미를 갖는, 정유재란에서 아주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왜군의 재침으로 자칫 수렁에 빠질 위기에 놓은 조선국의 운명을 건져 올린 대전투요 대승이었던 것이다.

그 기적의 전승을 올린 명량해전에는 13척의 이충무공의 병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충무공의 전투를 지원하고 후원하기 위해 장흥, 보성, 고흥, 강진, 해남, 진도 등지에서 몰려 온 선비들의 100여 척의 후원 향선이 전투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장흥에서도 수많은 상인이며 농민, 선비들이 의병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당시 장흥의 선비들인 마하수, 백진남, 정명렬, 문영개, 김성원, 변홍원, 김택남 등 10여 명이 향선을 이끌고 후원군으로 참여하였다.)

9월 16일 전투가 벌어진 그날, 이충무공이 왜선으로 포위되어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그 100여 척의 후원세력 중 유일하게 마하수 의병장만이 단독으로 향선을 몰아 적진을 향해 돌진, 왜군과 전투하다 장렬히 순절했다. 당시 마하수는 60세 고령이었다. 또 그 향선에는 33세 장남 마성룡, 둘째 21세 마위룡, 셋째로 16세 마이룡, 넷째로 10세 마화룡 등 네 아들이 함께 승선하고 있었다. 이른바 마하수 공은 네 아들의 목숨과 향선의 수많은 가솔의 목숨을 담보로 위기에 처한 이충무공을 구하기 위해, 전혀 무장도 안 된 향선으로 왜선을 향해 돌진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국 어느 전투사에서도 볼 수 없는 마하수 공의 대단한 절의(節義) 정신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능히 마하수 의병장을 장흥의 영웅이요, 조선의 영웅으로 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마하수 의병장을 조명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오는 4월 19일 개최된다고 한다.

이날 마하수의 절의정신을 조명하는 이 학술대회가 장흥의 의병사를 재조명하고, 의향(義鄕)의 고을로 불리운 우리 장흥의 그 빛나는 전통을 재확인하는 학술대회이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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