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삼재령, 잊혀진 시간을 찾아서
특별기고 - 삼재령, 잊혀진 시간을 찾아서
  • 장흥투데이
  • 승인 2024.03.2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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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서울대 명예교수

겨울 금강을 개골(皆骨)이라고 부른다. 먼 옛날, 열아홉 젊은 선비였던 율곡 이이는 개골에서 “맑고 고요한 기운”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그에게 금강산은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꿈이 생성하고 또 명멸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천지가 개벽하기 전 하늘과 땅을 나눌 수 없었네”라고 아득한 심정을 표현한 후 금강산에서 “하늘과 땅이 열리고 비로소 위아래가 나누어졌네.”라고 표현했다. 그는 1554년 늦은 봄날, 장안사 뜰에서 붉게 핀 작약을 보았다. 그 꽃에는 어떤 꿈이 영글고 있었을까?

나는 이번 겨울의 초입에 인제 북쪽의 1,052고지에 서서 아련히 솟은 개골의 연봉들을 바라보았다. 군사분계선 북쪽의 무산(巫山)과 남쪽의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에서 우리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두 손을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설악금강마을의 천제(天祭)

인제군 서화리는 내금강에서 발원한 인북천이 흘러내리고, 외금강으로 들어가는 남강이 발원하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들어가 한참 북쪽으로 올라가면 1,052고지가 있고, 저 밑으로 눈을 돌려 백두대간과 군사분계선과 만나는 지점에 삼재령이라는 고개가 숨어있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이 고개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내금강이고 오른쪽 계곡을 따라 오르면 외금강이란다. 반대로 향로봉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설악산이다. 그래서 서화리주민들은 자기 동네를 설악금강마을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에서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 계절에 생명의 고귀함을 깨닫고 삼재령 고갯길이 다시 이어지기를 소망하는 천제가 열렸다.

우리 문화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는 익숙한 듯 낯선 전통이다. 마니산의 참성단이나 태백산 천제단이 천제가 매우 오래된 전통임을 증거하는 듯 하지만, 실은 이들이 모두 100여년전에 만들어진 전통에 가까운 듯하다. 역사기록으로 보면, 고려 성종 2년(983)에 원구단(圜丘壇)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는데, 설치와 폐지를 되풀이했다. 조선 세조 3년(1457)에 원구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7년만에 중단되었다. 중국의 간섭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제가 우리에게 낯설게 된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고종 34년(1897)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원구단을 회복했지만, 전국적으로 천제는 확산되지 못했고,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몇몇 의병들이 그 뜻을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가졌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서화리의 천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최근 몇 년간 확연히 느끼게 된 기후위기는 건강한 생태적 환경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했을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다가온 평화의 위기를 일깨우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또한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어느덧 금강산관광의 추억들이 거의 잊혀져가는 상황에서 어렵게 기회를 되찾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협의와 교류의 시간은 불신과 단절의 시간보다 훨씬 짧았다. 남북이나 북미간의 정상회담은 1991년 만들어진 남북기본합의서가 아직도 유효한가를 시험하는 마지막 기회였는지 모른다. 우리는 평화의 문을 다시 열었지만 한발짝 더 나가는 용기를 내지 못했고, 미국과 북한의 속내 또한 우리의 기대를 빗나갔다. 그렇게 기회를 상실하자 엄중한 시간이 도래했다. 남은 북을 다시 주적으로 삼고, 어렵게 만들어낸 군사합의의 파기를 선언했으며, 북은 기다렸다는 듯이 남을 제1적대국이라고 응답하고 초음속 미사일을 연달아 쏘아대고 있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갈 수 밖에 없는 ‘정상적인’ 길인가?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나는 을지 하늘길이라고 부르는 DMZ 평화의 길을 외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걸었다. 공교롭게도 몹시 강한 바람이 불었고, 공중으로 날리는 나뭇잎들이 마음을 스산하게 했지만, 평화의 기원을 담은 작은 리본들을 그물코 엮듯이 매달았다. 전방 고지에서 서화리로 돌아오는 길에 너구리가 나타났고, 또 산양도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 평화의 상책이요, 힘으로 내리누르는 것이 평화의 하책임을 왜 모르느냐는 눈빛이었다.

선거에 의해 책임자가 바뀌고 정책이 바뀌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늘 있는 일이지만, 정책실패가 너무 중차대하여 회복 불가능한 것일 때, 국민들은 운명을 탓하기보다는 그 책임을 엄중하게 묻곤 한다. 멀지 않은 장래에 그런 순간들과 마주칠 것인가. 세상이 어지럽고 방향이 모호할수록 냉철하고 진지하게 균형을 잡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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