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인/ 시인
벌초를 하며
할머니는 땅속에 앉아 아직도 배추와 무를 다듬고 계신다.
석양에 비친 내 허기의 그림자를 보시곤 배추 뿌리를 하나 깎아 내 입에 넣어 주신다.
노을 한 점을 삼킨 듯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할머니의 웃음 같은 금니가 반짝 내 눈을 스쳐 지나간다.
앵앵앵 돌며 풀잎을 자르던 예초기 날이 돌맹이에 닿았는지 사나운 금속성을 내며 허공으로 퉁긴다.
할머니는 땅속에 앉아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시는 것인지 사념의 풀이 늘 웃자라 있다.
나는 그 뿌리에 닿도록 날을 눌러 무성하게 자란 근심의 잎사귀들을 깎아 낸다.
동백기름 바르고 은비녀를 지른 가지런한 할머니의 쪽진 머리, 오늘따라 윤기가 유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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