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놈을 물리친 마을」이라 새겨진, 장흥 각왜비(卻倭碑)는 장흥읍 평장리 금안마을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정유재란 때 왜적이 장흥을 침입해 오자 오우당 김응원(1569~1638)선생은 현재 장흥읍 평장리 금안마을 당시 토구동(菟裘洞)에 1,000여명 의병을 모아 진지를 만들고 매복해 있다가 왜적을 물리쳤다.
장흥도호부사(종3품)가 왜적의 무리가 달아나자 오우당 김응원 선생의 공적에 감탄하고 조정에 알리자 침랑(寢郞)벼슬을 제수했으며 승전지역 바위에 『각왜비(卻倭碑)』세(3)글자를 새겨서 표시하였으니 후대 사람들은 이 마을을 도고동(道高洞)이라 불렀다.
장흥각왜비는 정유재란 때 도고동에 살던 김응원이 마을 뒷산의 나뭇가지 마다 관솔 등불을 달아 왜적들이 이를 지켜보고 조선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으로 잘못알고 물러갔다하여 「왜놈을 물리친 마을」 이라는 내용의 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장흥각왜비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88호이다.
오우당 김응원 선생의 호(號) 오우(五友)는 소나무(松), 대나무(竹), 매화(梅), 국화(菊), 자신인 나(我)를 의미한다.
오우당 선생은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을 제수 받아 역임했으며 1624년(인조 2년)에 이괄(李适,1587~1624)이 조선후기 인조반정 직후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이괄의 난>을 진압하려고 의병을 모집하는 모병도유사(募兵都有司)로서 군량미를 모아 큰 공을 세웠다. 그 후에 고을 유림의 여론으로 장흥 예남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광주․전남 5란(五亂)충의사록 p.189 (1992년 발간)
■ 의병을 규합하여 새로운 복병전략 펼쳐
오우당 김응원 선생이 과거 글공부를 열심히 하던 23세 때 일본 풍신수길은 15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 강토를 침략케 했던 임진왜란이 1592년(선조 25년)에 일어났다.
김응원 선생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정의감에 불타서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젊은이들이 나서야 한다는 격문을 만들어 배포해 향토보위군을 결성했는데 그 숫자는 수백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임진왜란은 애국충정이 충만한 여러 의병장들과 명나라 원병의 지원을 받아 화의가 성립되긴 했으나, 5년 후 1597년(선조 30년)에 또다시 재침(정유재란)이 있었다.
오우당 선생은 맏형 송천(松川) 김응규(金應虯)와 함께 의병을 모았다. 일본군이 강진 구강포에서 장흥을 침범하기 위해 수천 명으로 추산되는 남해안 진출병력으로 장흥을 향한 진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지금의 장흥읍 금안마을 뒷산에서 임진왜란 직후부터 의병성격을 가진 향토보위군을 조직하여 훈련을 시킨 남녀 청장년 1,000여명을 집결시켜 현대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전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우당 선생의 전술은 강진에서 장흥으로 침입하려면 반드시 우리 마을 앞길을 지나가야하기 때문에 복병을 매복시켜 기습공략할 수밖에 없다는 새로운 복병 전략을 세웠다.
바로 그것은 매일 밤마다 소나무에서 나온 관솔에 등불을 밝혀 마을주변에 매달고, 마을 뒷산에는 나뭇가지 마다 관솔 등불을 매달아 함성과 함께 횃불을 흔들어서 많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의심을 갖게 하여 마을 앞을 왜군이 지나갈 수 없게 만들자는 지략이었다.
그래서 오우당 선생이 이끄는 장흥의병들은 하늘을 찌를 듯한 사기를 내뿜으면서 매일 밤마다 마을 뒷산에 관솔 등불을 나뭇가지에 매달고 큰 함성을 지르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인해전술을 펼쳤다.
그 인해전술은 의병이 갖고 있는 재래무기는 창과 칼뿐인데, 일본군은 현대식 무기여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세이기 때문에 오우당 선생의 번뜩이는 지혜에서 나오는 눈속임 전략이었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탐진강(당시 예양강)에 횟가루를 뿌려 수많은 의병들의 취사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을 본 일본군 척구병의 첩보는 “조선군 장흥의병의 숫자가 수천 명을 헤아리고 이들이 중무장을 하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다.” 는 보고가 일본군의 수뇌부에 전달되어 이에 왜군의 주력부대는 강진에서 장흥으로 통하는 하나밖에 없는 길목에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수천 명 의병이 있는 줄 잘못 알고 총 한방 쏘지 못한 채 퇴각함으로써 장흥 땅이 왜놈의 말굽에 짓밟히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역사현장 체험교육장으로 활용해야
이런 사실을 장흥부사가 전라도 감영인 전주관아로 보고하고, 조정으로 전달되어 침랑(寢郞)이라는 벼슬을 특별히 제수하였고, 장흥부에서는 창의도유사(倡義都有司)라고 명명했으며 장흥부사가 직접 도고동에 와서 마을 뒷산에 있는 개울가 바위에 각왜동(卻倭洞:왜놈을 물리친 마을)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놓았다. 427년이 지난 지금도 마을 뒷산 개울가에 오르면 각왜동(卻倭洞) 이라는 글씨가 너무 선명하다.
오우당 김응원 선생의 애국충절 정신을 길이 빛내고 이 세대를 살아가는 후학들에게 충효정신을 이어받아 선조의 뜻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2019년 3월에 경주김씨 두개공파 장흥중중에서 「오우당 각왜전(卻倭殿)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앞으로 각왜비 주변 환경을 정비하고, 역사현장 체험교육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각왜전(卻倭殿)’을 짓고, 각왜(일본을 물리침)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역사전시관’을 만들고, 각왜 정신함양을 위한 제반시설을 마련함은 물론, 기타 부속시설과 주차장까지 완비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한다.
※자료출처 : 김두석(장흥유교학당 논의자 자료 : 2021.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