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14-부사골 장흥, 시가지의 변화와 그 정체성
■역사산책 14-부사골 장흥, 시가지의 변화와 그 정체성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1.2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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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수/시인, 수필가, 본지 논설위원. 장흥향토사 연구회장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면서 이를 시대별로 구분하는 이유는 각 시대가 가지는 특징을 분류하고 지나간 시대에 대한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지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장흥의 시대 구분을 조선시대 이후 장흥의 치소(治所)가 있는 장흥의 역사와 문화의 흐름으로 보아, 성안시대(城內時代)와 칠거리시대(七距離時代) 그리고 한들시대(大野時代)로 구분하여 기록하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결코 장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역사적으로 보나 문화사적 또한 장흥의 시가지를 비롯한 농어촌발달사를 기록하는데 있어 결코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1910년 이전의 부사 골

우선 성안시대라 일컫는 시기는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가 1414년(태종14년) 관아를 장흥읍 동동리 187번지(현 장원주택 지)에 평근당(平近堂)이라는 이름으로 청사를 짓고 업무를 보기 시작한 때로부터 1910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어 조선시대이다.

원래 장흥도호부라는 이름은 고려 인종조 때 공예태후의 고향인 정안현(定安縣)을 ‘길이 번창하라’는 의미의 ‘장흥(長興)’이라는 이름을 내려졌다. 이에 따라 정안현이 장흥부(長興府)로 승격하여 이때부터 중앙에서 정3품의 부사가 집무를 보면서 장흥부는 회령(會寧), 수령(遂寧), 장택(長澤), 탐진(耽津; 현 강진군 강진읍) 4개의 현(縣)과, 한때 두원현(荳原縣; 현 고흥군 두원면)과 도양부곡(道陽部曲; 현 고흥군 도양면)을 속현으로 관리하여 왔다. 현(縣)이라 함은 정5품의 현감(縣監)이 고을 수령으로 지역을 관리하였기에 고려시대에는 정3품인 장흥부사의 지휘감독을 받는 체계였다.

▲1936년 장흥읍 성안과 벚꽃 핀 남산공원 (정정진 소장)

 

▲1936년 장흥읍 성안과 벚꽃 핀 남산공원 (정정진 소장)

조선시대에는 각 도(道)에 관찰사(觀察使)를 두어 지방 고을들이 관찰사의 지휘지시를 받게 되어 장흥부사의 직접적인 관리 감독을 받지는 않았지만, 대신 장흥부사가 정3품인 관계로 지금의 고흥에서 해남군까지의 서남해 군사지휘권을 가지고 있어 휘하 5품 현감들에게 지휘 지시를 하여왔다. 그러다가 1895년 5월26일자의 칙령 제98호로 그동안의 8도(道)제를 23부(府)제로 변경 시행하면서 종래의 목(牧), 부(府), 군(郡), 현(縣)의 명칭과 부윤(府尹),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의 관명(官名)을 다 없애고, 고을의 명칭을 군(郡)이라고 하고, 그 수장(首長)의 관명을 군수(郡守)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1906년 9월24일 칙령 제49호로 “지방구역 정리에 관한 안건”의 반포로 오늘과 같은 관할구역을 확정한 후 “장흥군청(長興郡廳)”이라는 간판을 걸게 되자 군사권은 중앙정부로 사법권은 1909년 11월1일 “광주지방재판소 장흥구재판소”에 넘겨주어 이른바 우리역사에서 왕조시대가 문을 닫고 근대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오늘날 지방수령으로서 자치단체장은 굳이 품계를 따지자면 정무직 3급으로 모두가 동일시되지만 이른바 성안시대 장흥부사는 인근 5품 수령을 지휘감독하고 거느렸던 수령이 아닌가! 때문에 인근 수령들과 인근 관아의 아전들이 장흥동헌을 출입했을 때의 조심스런 언행과 행동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이야기다. 때문에 장흥은 장흥에 사는 선비뿐만 아니라 백성들에 이르기 까지 지역의 자존을 높이기 위한 자정의 노력은 “문(文)과 의(義)”로서 표출된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문림의향(文林義鄕)”이라는 별칭과 장흥이 “문학관광특구”로 지정됨은 모두가 이러한 지역의 역사에 기인된 당연한 것일 것이다.

■1910-1980년 칠거리 시대의 장흥

이후 1910년대에서 1980년까지를 칠거리 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와 물질문명의 급격한 발전으로 보인 시기이다.

무엇보다 이시기는 일제의 토지약탈과 식민지 착취를 목적으로 1910∼1918년간에 걸쳐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민족말살과 식민지교육은 우리 국민들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보이게 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주권을 완전히 강탈하여 식민지로 강점하여 행정권만이 아니라 사법권까지 장악해 일반경찰이 헌병제도와 결합해 우리국민을 국사적인 방식으로 사찰하고 1912년 3월에는 제령 제13호로서 이른바 “조선태형령”을 제정, 공포하여 우리국민에 대한 인권을 유린하였던 시기였고, 해방 이후는 동족상잔이라는 아픔을 겪은 격동의 삶이 있었던 시절이다.

특히 장흥은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격전지로 일본군들의 우리국민 탄압과 감시가 많은 곳이었기에 국권피탈(國權被奪, 1910.08.29) 이전인 1907년 6월30일부로 내부령 제3호로 “전남경무서장흥분서(全南警務署長興分署)”가 설치되어 보성,영암,강진,해남,완도분파소를 두게 하였는가 하면, 1909년 10월21일 자로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소 장흥구재판소” 군 단위 최초의 재판소를 설치하였다. 때문에 1908년부터 수시로 의병들이 장흥경찰서와 헌병대를 습격하는 구국활동이 빈번하자 1910년 8월5일 통감부령으로 “조선주차헌병(朝鮮駐箚憲兵) 장흥분대”를 설치하여 장흥에서 강진,해남,완도,진도,제주,정의,대정군을 관할하게 하고, 장흥군관내 안양면에 “교동분견소”와 장서면에 “양촌분견소”를 설치하여 헌병정치를 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장흥에는 서남해 일대의 의병은 물론 의병 활동자는 물론 일반 경범자들까지 잡아드려 곤혹을 당하게 하는 곳이 되었기 당시 어른들이 아이가 울면 “순사온다”는 말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현재까지 사법기관인 “법원 장흥지원”과 “검찰장흥지청”이 존재하며 장흥경찰서는 1984년까지 1급지 경찰서로서 1972년 5월30일 이전까지 서남해 인근 고을의 경찰서장이 경감이었던 것과는 달리 장흥경찰서장 만이 총경이 보임되었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아픈 역사의 한 대목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통이 원활하게 되자 장흥의 인문 활동이 활발해져 시가지 형성도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장흥읍성 동문 앞 거리는 당시만 하여도 ‘지막(紙幕)거리’ 또는 ‘주막(酒幕)거리’라 불리는 곳으로 약간의 상가 형성이 되어 있었으나 1909년 7월12일 기양리 65번지에 ‘금융조합’(NH농협은행 장흥군지부협 전신)이 들어서면서부터 시가지로서 활기를 띠기 시작해 1910년부터 본격적인 신작로 개설되면서 1920년 9월에는 장흥의 길동식(吉東植)이라는 분이 장흥-수문간 자동차 영업허가를 얻어 운영하게 되었고, 1926년도에 장흥교(長興橋)가 시멘트화하여 교통이 더욱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되며, 1927년6월에는 ‘장흥전기(주)’가 기양리 87번지에 들어서고, 1921년에 예양리에 ‘전매서’가, 1929년에는 ‘장흥산업조합’이 예양리에, 1932년에는 이진영(李珍永)이 운영하는 ‘호생병원(好生病院)’이 들어서 활기를 얻게된다.

이후 1932년 11월 1일부로 장흥면과 부동면이 합병하고, 1943년 3월에는 동동리에 위치하던 ‘상업은행’이 기양리 71번지(전 광주은행)로 이전하였는가 하면, 1933년 4월부터 7월까지 장흥교 아래쪽 탐진강 모래사장에 위치한 ‘장흥시장(長興市場)’을 현재의 시장부지 쪽에 취로사업을 실시하여 당시 전남에서는 가장 큰 부지를 만들어 시장을 옮겨 활성화시켰다. 당시 동아일보 신문보도에 의하면 ‘장흥시장 매축공사에 1천2백여 명이 매일 참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 후 장흥시장에 ‘우시장(牛市場)’을 지금의 민속광장 자리(예양리195번지)에 조성하여1939년 3월2일 장부터 거래를 실시하여 시장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렇게 예양리에 시장이 조성되어 활기를 띄었으나 1936년 8월 말에 태풍과 집중호우로 장흥군의 강우량이 447mm나 되었고 탐진강이 범람하여 사망9명, 행불9명, 부상9명, 가옥 14동이 유실되고, 51동이 도괴 되었으며, 671동이 침수되었다. 이로 인해 장흥군에서는 주민 노력동원을 통하여 탐진강변의 호안공사를 실시하여 1941년도에 완공을 된다. 그런 과정에 예양리에 위치하던 ‘장흥면사무소’가 지금의 장흥읍사무소가 위치한 장흥읍 기양리 110번지로 신축이전하자 장흥읍성 내에 위치하던 기관단체는 물론 대중 이용 편의시설들이 칠거리 쪽으로 서서히 옮겨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새롭게 상가가 신설되고 상권을 이루게 되자 칠거리에서 읍성안의 구시가지에 잇대어 각종 편익시설이 형성되었다. 그중에서도 법원과 경찰서를 찾아오는 타 고을 사람들이 위한 편익 시설로 일본식 여관으로 ‘태양여관’, ‘만월여관’, ‘옥자여관’ 등이 있었고, 해방이후 70년대까지 ‘호남여관’, ‘장일여관’, ‘흥아여관’, ‘해동여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장흥을 찾은 그들 모두는 장흥에서 편한 잠을 자는 곳이 아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들이 장흥의 관리들과 원활한 업무 진행을 위한 소통의 자리로 일반인들이 쉽게 갈 수 없었던 ‘남산관’, ‘성동관’, ‘은주장’, ‘신덕관’, ‘해동정’과 같은 유흥음식점에서의 접대와 교섭 이후의 상황이 늘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민들의 모처럼의 외식에서 웃음꽃을 피게 하던 왕화산(王和山)이 운영하던 ‘흥화관(興和館, 현 우인수 법률사무소’)과 시장통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왕경신(王慶信)이 운영하던 ‘송화관(松和館)’의 짜장과 탕수육은 지금도 눈에 밟히던 음식이 아니던가? 이때가 국가시책으로 경제개발 5개년 1차 계획의 성공적인 성과에 힘을 얻은 60년대 중반으로 장흥의 인구가 14만을 넘기던 시절이다.

이후 70년대가 깊어질수록 경제개발의 붐을 타고 농촌의 젊은이들이 하나 둘 산업현장으로 떠나기 시작하고, 농어촌의 경제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할 무렵 그동안 장흥시장을 걸어 다니던 인근 사람들도 자동차를 이용하게 되자 차를 기다리고 떠나보내는 장소로서 칠거리 “차부”라 일컫는 “버스공용터미널” 주변은 늘 분주하기만 하였다. 이를 이용한 음식점과 다방 거기에 1975년 6월1일 기양리 117번지에 손국원(孫國源)이 신축 개점한 ‘장흥슈퍼마켓’은 장흥인들에게 상업이라는 직업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소비문화에 대한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어 우리들의 생활을 새롭게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거기에 관주도의 반공집회나 정부시책 홍보 집회 등 각종 정치적인 집회를 칠거리에서 상습적으로 실시하여 더욱 북적거리는 곳이 되었다. 당시 특기할 만한 큰 군중집회로는 해방직후 만세삼창과 한국동란 당시 인민재판, 동란이후 신탁통치반대 집회 등의 정치적 집회 등은 읍사무소 뜰에 서있는 소나무와 그 나이만큼의 어른들 만이 기억하는 이야기들이다. 또한 비교적 요즘 토박이라 말하는 이들이 기억하는 큰 행사는 1971년 4월15일부터 매년 개최하기로 한 “보림문화제” 행사이다. 보림문화제가 펼쳐지던 그날은 탐진강변에서 벌이는 고싸움 줄다리기 뿐 만아니라 남산공원의 벚꽃이 만개하는 계절로 장흥군민은 물론 인근 고을 사람들도 함께 즐기는 날이 되어 칠거리의 가게는 물론 장흥시장 상인들의 음식과 물건이 동이 나 재미를 보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이런 시절의 이미지 때문일까 경제개발의 붐을 타고 떠나던 젊은이였던 그들이 향우라는 이름으로 오랜만에 고향을 찾으면 의례히 그들의 향수는 늘 장흥의 칠거리와 남산공원에서 느끼지 않는가 한다.

■1980년 이후- 칠거리의 변화

이제 1970년대까지 성시를 이루던 칠거리는 토요시장 날 외에는 유동인구가 거의 없는 쓸쓸한 거리가 되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겠다는 1918년도에 건축되어 이제 101살이 된 옛 ‘금융조합’(구 NH농협은행 장흥군지부)과 ‘조흥은행’(1943년 건축), 태양여관(1935년 건축)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어느 곳보다 칠거리의 사연을 많이 지켜 본 ‘칠거리다방’은 너무 오래 살았나 싶어서 일까 ‘다소원’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도 칠거리의 사연을 기록하고 있다. 읍사무소 또한 칠거리의 좌장으로 이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드는 ‘정남진농협서부지소’와 ‘마을금고’를 거느리고. . . . . . , 아직 죽지 않았다는 장흥읍성안의 두 터주대감 같은 ‘장흥법원검찰청’과 ‘장흥경찰서’. 연륜으로 따진다면 결코 만만치 않은 옛 ‘전매서’(담배인삼공사)와 ‘장흥서초등학교’ 그리고 이미 이름마져 잊어버린 ‘도정공장연합사무실이었던 2층집’(기양리 88-7번지) 과 ‘나카시마(中島)의 이층 가게집’(예양리 22-6번지)은 지금도 옛 모습을 성실하게 지니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예양리 8-6번지 주택’은 일제시대 서초등학교 밑의 농장을 경영했던 ‘사카이(酒井)’라는 사람의 주택으로 해방 이후 ‘장흥교육구청’으로 그리고 한국동란 초기 ‘인민공화국 정치보위부’로 그리고 불과 30년 전까지 ‘남인의원’으로서의 활약과 명성을 오늘까지 이웃과 자랑스럽게 옛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칠거리는 재롱둥이 녀석들로만 알았던 아이들을 더 나은 세상으로 날개를 펴게 한 노부부의 집 마냥 허전한 느낌에 추억만을 남긴 거리가 되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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