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14-하 부사골 장흥, 시가지의 변화와 그 정체성 (하)
■역사산책 14-하 부사골 장흥, 시가지의 변화와 그 정체성 (하)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2.0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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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수/ 시인, 수필가, 본지논설위원, 장흥향토사학회장

<전호에서 계속>

장흥 사람들이 다리 건너라고 부르던 건산리는 건산동편(1구)과 서편(2구) 그리고 괘야(4구)와 동교통(3구) 만을 제외한 건산5, 6, 7구는 토박이가 없는 마을이다. 토박이라 하면 그곳에서 출생하여 평균 1세대를 넘겨 그 지역에서 아이들을 분가를 시킨 세대를 토박이라 한다. 다시 말해 적어도 30년 이상을 살아 온 사람을 토박이라 한다. 그런데 지난 2018년도 장흥문화원에서 편찬한 ‘장흥읍지’를 보면 건산 5,6,7구에 이제 들어와 샛방을 살고 있는 장흥의 타 읍면과 인근마을에서 이주해 온 사람까지 토박이로 정리해 놓아 지역사를 연구하는데 혼란을 빚게 하고 있어 안타깝다.

건산리의 마을 발달 경위를 보면 최초 ‘죽산 안(安)씨 여주(汝舟)’가 지금의 장흥고등학교가 위치한 건산 1구 동편마을에 터를 잡았다. 전하고 이후 1392년 당시 장흥부사 황보 덕(皇甫德)이 장흥의 치소(治所)를 마을 뒤 중녕산(中寧山)에 토성을 쌓고 옮기면서부터 각처에서 주민들이 모여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괘야(掛也)마을”까지를 통합하여 “건산리(巾山里)”라 했다가, 1949년 7월 지방자치법(地方自治法)이 제정되어 “장흥읍조례(長興邑條例)”에 의하여 중녕산 서편쪽 마을이 커지자 “서편마을”을 “건산2구”로 독립시키고, 기양리(岐陽里)를 장흥교(長興橋)로 잇는 “동교통(東橋通)”을 “건산 3구”로 그리고 “괘야(掛也)”를 “건산 4구”로 분구시켰다.

건산리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길의 하나로,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 낸 칠거리에서 동교다리(東橋=長興橋)를 지나 관덕리 벽사역(碧沙驛)으로 가는 큰 길이, 지금의 건산 3구 동교마을로서 동교를 바로 건너 주막과 지금의 문화당 서점 자리(건산리 699-1번지)에 일본인 ‘니시에저로(西古猪郞)’의 주택과 취락식당 옆(건산리 720-21번지)에 물래방아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이곳에 지금의 “NH농협은행 장흥군지부”가 위치한 곳에 빨간 벽돌과 기와지붕에 유리창 문을 설치한 당시 현대식 건물의 “장흥토목관구사무소”가 1921년 5월23일 들어섰다. 이곳은 1910년부터 신작로가 개설되기 시작하자 이 도로를 관리하던 기관으로 보성군에서 해남까지의 도로를 맡아 관리하던 곳이다. 또한 지금의 장흥군청 앞 수강약국 터(건산리 720-11번지)에 철도역 수화물 취급소가 1931년경에 들어 섰는가 하면, 1932년 지금의 장흥군청 건산리 소재의 주차장과 도심공원이 있는 곳(건산리 702번지)에 “장흥국자조합주식회사(長興麯子組合株式會社)”가 들어섰다.

또한 1937년 10월18일 지금의 장흥초등학교가 남외리에서 이전해 오면서 서서히 도시 형태를 갖추어 지자, 평화리 고동석(高東錫;고영완의 부)이 현 장흥군청 앞 사거리에서 평화리 내평마을까지 일직선의 도로를 개설하게 된다. 이후 1949년에 ‘장흥중학교’가 지어지고, 1950년 2월 동동리에 있던 ‘장흥군청’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자 1950년 7월10일 ‘문화당서점’이 현 위치에 개업하는가 하면 생활용품 가게들이 줄줄이 도로를 따라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남북의 이념대립으로 사회가 시끄러워지자 장흥경찰서 동부파출소가 1951년 10월1일 들어서고, 1958년도에 김형서(金瀅瑞)를 비롯한 월남민들이 주축된 ‘한국정착사업개발흥업회’ 사무실이 원도리 308번지선(읍내지구대 앞)에 건축됨과 동시에 월남민들의 주택인 일명 “열동네”가 건산리 471번지선에 들어 섰는가 하면 1961년도에 “가내수공업쎈타”가 읍내지구대 뒷길에 들어서 도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에 맞추어 원도리에 ‘장흥농업기술쎈터’가 들어서고, 동동리에 있던 ‘장흥우체국’이 지금의 자리로 1965년 2월 옮겨오자 본격적으로 도시의 면모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해 12월에는 장흥여자중학교도 장흥중학교에서 분리되어 건산리에 들어서게 된다.

▲1960년대 말~70년대 초 장흥시가의 모습.
▲2019년 1월 장흥읍 전경.

1970∼현재의 장흥읍

이후 1969년도에 백번택시회사가 그리고 대영화물이 들어오는가 하면, 1974년 10월 교도소가 완공되어 이듬해 4월 15일부터 수감자를 수용하자 건산리 일대의 상가와 숙박업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시가지로서의 모양을 갖추어 왔다. 이어 1978년도에는 장흥우회도로가 개설되는가 하면, 칠거리에 있던 버스정류장이 1979년 7월15일 건산리 382번지(현위치)로 옮겨 “장흥공영터미널”로 영업을 개시하면서부터 시가지가 확대된다. 이에 따라 1980년 1월1일자로 건산5구 6구가 새롭게 행정리 탄생되는가 하면 1988년 2월23일 ‘장흥군민회관’ 준공과 1988년 8월6일 ‘장흥병원’ 개원과 8월8일 ‘백병원(현 우리병원)’의 개원은 한들을 도시화로 촉진하는 지름길이 되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때문에 1980년 이후 도시형성을 이루어 장흥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지금을 ‘한들시대’라 말할 수 있다. 물론 ‘건산시대’라 불러도 좋으나 지난날 장흥의 곡창으로 장흥인의 배를 불려주었던 이곳의 건산 5,6,7구의 원래 이름이 “한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욱 정겹게도 하지만 장흥인의 배를 영원히 불려 줄 이름으로 남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기도 하다.

2019년의 장흥읍

언제부턴가 선거철이면 칠거리와 성안의 부활을 외치던 선거꾼들은 선거가 끝나면 조용해져 버리고 만다. 그렇게 외치던 선거꾼들 역시 지난날의 장흥의 영화가 성안과 칠거리에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선거가 끝나고 6개월이 지났다.

이제 새로운 자치단체의 운영을 자치단체장으로서 또한 의원으로서 장흥을 어떻게 이끌어야 발전시킬 수 있겠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여론도 경청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성안과 칠거리의 부흥과 활성화에 대한 필요성을 충분하게 공감하리라 믿는다.

다만 칠거리에 대한 부흥과 활성화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군수의 노력으로 “도시재생 뉴딜 공모사업”과 “칠거리 간판개선 및 벽면 정비사업”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왕 계획한 사업이라면 시대의 흐름에 따르되 칠거리와 성안의 전통과 문화를 부각할 수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꾸며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 곧 장흥 부사골 시가지의 변화를 통하여 장흥의 정체성을 확립해 이를 관광 상품화 하자는 얘기다.

사람마다의 추억은 다를 수 있으나 역사의 흐름은 하나임으로 가능한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누어 우리의 아픈 기억과 즐거웠던 기억 그리고 장흥인만이 가질 수 있는 자존삼과 자부심을 보존하고, 이를 문화라는 여유로운 이야기로 꾸며 새로운 성안과 칠거리 시대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시절 배 고품을 탈출해 떠났던 그 친구들의 잦은 귀향과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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