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반곡 정경달에 대한 심각한 오해들…이제 불식시켜야 한다
사설-반곡 정경달에 대한 심각한 오해들…이제 불식시켜야 한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3.2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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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 정경달에 대한 유고집이 오늘날에 이르러 처음으로 소개되기는 1985년 이수봉 교수(충북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가 <호서문화연구> 제5집에서 소개한 ‘반곡의 난중일기 고(攷)(1)’에 의해서였다.

이후 1987년 이해준 교수(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에 의해 <반산세고>(반산세고 해제)가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되었고, 이후 지난 2013년 김경숙 교수(조선대학교 사학과)의 ‘임진왜란 초기 지방관의 수토활동―선산부사 정경달 형제의 활동을 중심으로’가 <조선시대사학보 65’에 발표 되었다. (이 논문은 2012년 8월 23일 보성문화원에서 개최된 ‘호남지역사와 문화연구 학술심포지움’에서 발제자의 한 사람으로 나선 김경숙 교수가 발표한 논문이었다)

이후 2016년 3월 <반곡 난중일기 상, 하>가 보고사(국역 전남대학교 신해진교수)에 의해 서 출판된 데 이어, 2017년 6월 <반곡 정경달 시문집1.2>가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국역 박종우 교수)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다른 역대 인물들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관련 책자 출간에 비하면, 아주 미약한 실정임에 분명하다. 이같은 실정은 장흥군이라고 해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장흥군이 1995년에 발간한 ‘청소년을 위한 향토인물열전’에서 ‘반곡 정경달’은 50여 명의 장흥 출신 역대인물 중 한 사람으로 4페이지 분량으로 간단히 소개한 바 있다. 또, 장흥군의 문화 역사에 대한 정체성 규명에 노력해 온 장흥문화원 발간의 연간 <장흥문화>에서도 1998년 제11호에서 ‘반곡의 난중일기 考’가 소개되었는데 사실, 이 글은 이미 이수봉 교수가 <호서문화연구> 제5집에 실린 글을 이수봉 교수의 허락으로 그대로 전재한 것일 뿐이었다.

지난 2016년 <장흥문화>제38호에서 김희태(전남도문화재연구위원)의 ‘정다산이 장흥사람에게 보낸 편지 7통’이 발굴되어 소개되었는데, 이는 정수칠 편지 등의 내용이었지(일부 편지에 반곡에 대한 내용이 나오긴 했다) 반곡 관련의 글은 아니었다.

또 그동안 장흥군에서는 반곡 정경달을 조명하는 학술대회 한 번 개최하지 못했다. 학술대회 등에서 정경달이 소개되기는 장흥군이 아닌 보성문화원에서 지난 2012년 8월 23일 개최한 ‘호남지역사와 문화연구 학술심포지엄’에서 김경숙 교수가 반곡과 그 형제의 활동상을 소재로 발제한 것이 전부였다.

이러한 형편이다 보니, 장흥 문화계의 한 원로는 “장흥사람들 중 반곡 선생을 아는 사람이 백여 명도 안될 것이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장흥이 아닌 타지역 사람들, 전문가들마저 반곡 선생을 영광사람이나 보성사람으로 하고 오해하고 있음은 당연해 보인다.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인 김희태 씨도 정다산이 정수칠에게 보낸 ‘비를 대하여 규전에게 보이다(對雨示逵典)’ 라는 시를 해제하면서, “일부 해설 자료에 ‘반곡’을 보성군 복내면 반곡리로 설명하고 있기도 한데, 잘못 이해한 듯하다”고 쓰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이순신에 대한 조명 운동이 활발해지고 이순신 일대기를 기록한 책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이 책들은 이순신 수하들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정경달에 대해 출신지등이 잘못 기록되기도 했다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김종대/북포스/2004.6.15간), <중학생이 보는 난중일기>(성낙수외/신원문화사/2002.7.30 간), <충무공 이순신 전집 1>(최두환주역/우석출판사/1999.04.28 간), <칼의 노래1,2>(김훈/생각의나무/2003.12.08간) 등의 책에서 한결같이 장흥 출신의 반곡을 ‘영광사람’으로 잘못 기술하하였다. 반곡의 본관이 '영광'이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빚어졌던 생각된다.

특히, 사서 류와 달리 소설로 각색해 ‘동인문학상(2001년)’의 수상작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된 <칼의 노래>에서는 반곡 선생에 대해 오기 투성이었다. 이 소설 부록 ‘인물지’에서 작가는 정경달을 “정경달-영광사람이다. 젊어서 문과에 급제했다.…1595년 이순신은 임금에게 요청하여 정경달을 자신의 종사관으로 맞아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소설에서는 종사관으로 정경달 대신 ‘김수철'이 등장한다. 1권 '바람 속 무싹' '내 안의 죽음'에 나온 ‘종사관 김수철’의 행적이 문관 출신으로, 김성일 막하에서 금오산에서 이긴 일, 이순신 장군이 하옥될 때 서울까지 올라가 임금을 대면하며 탄원한 일 등은 실제로 ‘이순신 종사관으로서 정경달’과 일치, 정경달을 김수철이라는 인물로 내세웠음을 알게 해 준다.

그런데 여기서 이름 정도야 그렇다 해도 정경달 대신으로 김수철을 등장시켰다면 조금은 실제 모습과 닮아야 하는데 묘사가 전혀 다르다 “…김수철은 곡성의 문관이었는데 임진년에는 의병장 김성일 막하에 들어가 금오산에서 이겼다. 예민하고 담대한 청년이었다. 문광이 반듯하고 행동이 민첩했다…”고 기록, 실제의 정경달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반곡은 이순신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았고(이순신은 당시 50세, 반곡은 52세), 문관으로 이순신에 비해 결코 지위가 낮지 않았다. 물론 이순신을 만난 뒤 수하의 한 사람으로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만, <칼의 노래>에서처럼 ‘청년 종사관’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오해들이 어디서 비롯되는가?

장흥군이, 장흥 사람들이 반곡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반곡=장흥군의 임진왜란의 영웅이었다’ ‘장흥 출신 반곡=위대한 시인이었다’는 등의 인식이 먼저 장흥 사람들에게 널리 펴져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반곡 정경달’ 대한 조명 사업이 필요한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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