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반곡 정경달(1)-반곡 정경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시문학(1)
●역사인물/반곡 정경달(1)-반곡 정경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시문학(1)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4.0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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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정수칠 통해 ‘반곡 정경달’ 알고 ‘반했다’할 정도였다
정수칠에게 보낸 서신 5통 중 3통, 詩 등서 ‘반곡 언급’은 이례적

“결국 존재 선생에 대해서는 일어반구도 없었던 다산이었다.

그러한 다산이 제자 편지에서 수차례 ‘반곡’을 언급하고,

반곡의 ’난중일기‘을 크게 평가했으며, <반곡집> 최종본 간행에서도

직접 서문을 쓰고 산정刪定‧편집도 주도하고, 친구에게 서문을 쓰게 하고,

또 제자에게 교정토록 하는 등 최종본 <반곡집> 간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단언컨대

반곡에 대한 관심도 차원을 넘어 ‘다산은 반곡에게 크게 반했다’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인물/반곡 정경달’에 글은 지난 2007년 7월 모 지역신문에 2회로 연재한 글이 모태가 되었다. 당시 반곡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채 취재, 작성하였는데, 그 이후 반곡의 ‘난중일기’며 시문집이 국역화된 상태에서 고찰해 보니, 이전의 글이 상당부문 미흡한 점이 많아 다시 재정리, 재고(再稿)하는 차원에서 보완, 재정리 하였음을 밝혀둔다. –필자 주.

 

(1) 다산 장약용과 빈산 정수칠

 

■반곡 정경달 개요

반곡 정경달(盤谷 丁景達. 1542∼166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이회(而晦)이며, 호는 반곡(盤谷)이다. 장흥군 장동면 반산리에서 태생으로 벼슬이 통정대부(정3품의 上階)에 이르렀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선조 25) 선산부사로 재임하였다. 선산부사 때 임진란이 일어나 군사를 모아 경북 금오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으며, 1594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종사관이 되어 공을 세움으로써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유고로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시문 등으로 이루어진 <반곡집>을 남겼다. 정경달은 임진왜란 발발시부터 ‘난중일기’를 썼는데, 당시 해전뿐 아니라 육전의 상황도 상세히 기술하였고, 대외교섭에 관한 기록도 남기고 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난중일기’는 <반곡집>에 포함되어 있다.

정경달은 <반곡집> 외에도 ‘진법(陣法)’, ‘광국공신계회도(光國功臣契會圖’ ‘흉배(胸背)’ ‘공신록권(功臣錄券)’ 등을 유품으로 남겼는데 이들 유품이 1988년도에 ‘반계사유물일괄(盤谿祠遺 物一括’이라는 명칭으로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반곡집> 최종본 –다산 정약용이 편집자

반곡의 유고집 <반곡집>은 현재 9권 3책이다. 이 유고집의 간행 경위를 보면, 처음에 필사본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아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의 문집으로 간행되지는 못했다.

이것이 오늘날 <반곡집>으로 간행된 경위를 보면,

⓵1761-1763년 후손 이익(以翼)·윤필(允弼)·수칠(修七) 등이 <반곡집>을 필사본으로 정리하였다-이 필사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⓶1781년 7대손 정호필 등이 <반곡일기盤谷日記> <반곡연기盤谷年紀>를 필사하였다.

⓷1792년 정조에 의해 이순신의 <이충무공전서> 간행 시 <반곡집>의 초본(필사 정리본)이 내각에 들어갔다.

⓸1793년(정조 17녀) 충무공 후손 이민수(李民秀-당시 운봉현감) 지원으로 <반곡집>이 목판으로 처음 간행되었지만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⓹1815년(순조 15)에 다산 정약용의 산정(刪定-쓸데없는 글자, 불필요한 구절 등을 깎고 다듬어서 잘 정리함)을 거쳐 <반곡집>이 9권 3책의 목판으로 다시 간행되었다. 이 <반곡집>의 실질적인 편집자는 다산 정약용이었다.

한편 <반곡집>, 또는 <반곡유고(盤谷遺稿)>와 달리 반곡과 관련된 또 다른 책명이 있으니, <반산세고(盤山世稿)>이다. 이 책은 1800년(정조 24년) 정수익(丁修翼)이 선대(인걸仁傑-반곡 父, 경달景達, 명렬鳴說-반곡 子, 남일南一-반곡 孫)의 시문(詩文) 각 1권씩 기록하고 이를 <반곡집> 목판본과 합하여 ‘반산세고(盤山世稿)’라 이름하고 정다산에게 서문을 부탁, 다산이 ‘반산세고서(盤山世稿序)’를 써 주었다. (<반곡집> 9권 3책에는 다산의 이 서문과 함께, 병산 한치응(甹山 韓致應.1760∼1824)의 서문, 그리고 정수칠이 쓴 발문跋文도 함께 편집되어 있다). 그리고 <반산세고>는 1987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본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반산세고>에 대해 다산이 1800년에 서문을 써 주긴 했지만, <반곡집> 9권 3책과 합본한 형태의 발간은 훨씬 뒤에 이루어진 듯하다. <영광정씨족보>에는 ‘정수칠이 1822년(임오년)에 선조(정인걸, 정경달, 정명열, 정남일) 4대의 문집을 발행했다’고 하는데, 정수칠과 함께 문집 발행에 참여한 정수항(丁修恒)이 <서선조사적후<書先組事蹟後)>을 쓴 것이 1823년 가을인 것으로 보아 선조 문집 간행은 1823년으로 보기도 한다(김희태).

이처럼 <반곡집>이 최종 간행은 다산의 산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그래서였을까. <반곡집> 9권 3책에서 교정도 윤동(尹峒)이 보았는데, 윤동은 다산초당 주인인 윤당의 아들로 다신계 18제자 중의 1인이었던 윤종심(尹鍾心.1793∼1853)의 초명이었다. 해서를 잘 써 다산의 저서 500여 권을 정서하였다고 하는 인물이다.

결국 <반곡집>9권 3책이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은 다산이 산정과 편집을 하였고, 교정은 다산 의 제자 윤종심이 맡는 등 다산의 큰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장흥 외면한 다산-‘반곡 만 수차 언급’

정조가 죽은 1801년,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40세의 나이로 정적들에 의해 사지에 몰렸지만 겨우 목숨을 건져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간다.

강진에서 유배동안 다산은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학문적 업적으로 승화시킨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써서 500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게 된다. 특히 다산초당에서의 후반기 유배생활 10년은 어찌 보면, 다산의 학문적 대업을 성취한 생의 절정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배생활 동안 다산은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많은 저작과 시문을 남겼지만, 바로 이웃 고을인 장흥에 대해서나 그리고 장흥 사람들에 대해 어록을 남기는 일은 별로 없다. 바로 앞선 시대, 강진의 바로 이웃 고을인 장흥의 실학자 존재 위백규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없었다.

존재 위백규(1727∼1798)는 다산(1762∼1836)보다 35년 앞선 사람이다. 존재 역시 실학의 전성시대에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 1729~1791), 규남 하백원(圭南 河百源. 1781∼1844)과 함께 ‘호남 실학의 3걸’로 불리어지며,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손재 박광일(遜齋 朴光一. 1655~1723)의 뒤를 이은 거물로 지목될 만큼 학문적 명성이 높았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존재 선생에 대해 몇 마디 하고도 남았을 법한 데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다산이 장흥사람 중에 유일하게 수차례 언급한 이가 바로 반곡 정경달이었다.

특히 다산은 ‘반곡 정공의 난중일기에 제함(題盤谷丁公亂中日記)<어유당전서 第一集 詩文集 第十四卷/題>이라는 글을 통해, 반곡의 <난중일기>가 실록의 중요성으로 볼 때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백사 이항복의 <임진록> 못지않게, 아니 그것들보다 나은 가치를 지닌다고 높게 평가하였으며, 제자 정수칠에게 보낸 여러 편의 서신에서도 반곡을 언급하며, 반곡을 아주 우호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정수칠-다산의 18제자 중 1인

다산이 반곡을 알게 된 것은 정수칠(丁修七. 1768~1835)로부터였다.

정수칠은 반곡의 후손으로, 반곡으로부터 200여 년 후대의 사람이다. 그는 당대 장흥에서 살았고, 당시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 정약용이 강진 귤동의 다산에서 가르친 18명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다산에게 <반곡집>의 산정(刪定)을 요청하고, <반곡집> 발문을 직접 쓰기도 했으며, 반곡을 중심으로 반곡의 부(父), 반곡의 아들과 손자 등 4대 선조들의 유고집인 <반산세고(盤山世遺稿)> 간행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자는 내측(乃則), 호는 반산((盤山)이었던 또는 연암생(烟菴生-영광정씨 족보)이었던 정수칠의 집안은 지금의 장흥군 장동면 반산에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었는데, 당시 정수칠은 이미 마흔중반의 중년이었다. 다산이 그에게 한 말을 통해 정수칠의 집안은 장흥지방에서는 이른바 ‘선망받는 씨족’으로 행세깨나 했던 듯하다.
“(이보게!) 한 고장에서 명망 있는 집안으로 행세하면서 한 사람의 학자조차 없다면 그야말로 부끄러운 노릇이 아니겠는가. 조상 이름 파먹고 살면서도 그에 걸맞는 덕행과 학문을 갖추지 못했다면 얼굴을 들 수가 없는 법이지. 이렇게 되면 소년 후생(少年後生)이 본받을 바가 없어 점점 모두 어그러지고 망령되고 어리석어져서 토호(土豪)와 향간(鄕奸)이 될 뿐이지 않겠가.(宗族世居數十餘家,爲望族於一鄕,其中無一學者,便是大羞恥,抗顏擧頭,橫行里閭,皆愧甚矣。少年後生,無所矜式,漸皆狂悖妄愚,爲土豪鄕奸而已-‘爲盤山丁修七贈言(<정본 여유당전서 3>문집권17)’ 중에서.

이처럼 다산과 늦깎기 제자 정수칠의 관계는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 문집 ‘여유당전서’나 ‘다산시문집’에도 다산이 정수칠에게 준 글이 시詩 ‘비를 대하여 규전에게 보이다〔장수칠〕(對雨示逵典〔丁修七)’ 1편(<정본 여유당전서1’/시집 권5)을 비롯, ‘반산 정수칠에게 주는 말(爲盤山丁修七贈言<정본 여유당전서3>문집권17, 393-397쪽’, ‘또 정수칠에게 주는 말(又爲丁修七贈言<정본 여유당전서3>문집권17,397~398쪽)’등 증언(贈言) 2편, 서신 ‘반산 정수칠에게 보냄(與盤山丁修七書<여유당전서 第一集詩文集第十九卷○文集/書. =서신①) 등 모두 4편이 들어있을 정도였다.

2편의 증언贈言에는 선비로서 지켜야 할 도리, 학문의 길, 선비로서 읽어야 할 도서들을 알려주는 형태의 글, 즉 학문의 대가인 다산이 후학으로 제자인 시골의 선비 정수칠에게 친절하게 가르치고 교훈을 주는 내용으로, 다산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글로 곧잘 인용되기도 한다.

또 ‘반산 정수칠에게 보냄(與盤山丁修七書-서신①)에는 다산의 반곡 정경달과 관계의 시작이 언급되어 있어 관심을 가지게 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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