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21-멀리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전화(2)
■역사산책 21-멀리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전화(2)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5.16 14: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기수/ 본지논설위원, 시인, 장흥향토사 연구회장

<지난 호에서 계속>

전라남도에 최초 전화기 설치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1897년 12월23일 한성(서울)과 무안(목포)간 전선가설과 무안전보사(務安電報司) 설치를 부령제15호로 공고하여 무안우체사(務安郵遞司)를 1897년12월29일 개설하고, 이듬해 2월7일 현재 목포시 죽교동에 무안전보사(務安電報司)를 개설하였다는 기록과 1902년 1월23일 무안(목포)-광주간 전선가설공사를 마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당시 전신업무로 전신전보(電信電報)만을 위한 전선 가설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전하는 바에 의하면 1908년 6월에 경성우편국에 교환국의 전지 하나로 모든 가입자가 전화기의 송화용이나 신호용으로 공동 사용하는 방식인 공전식(共電式)과 하나의 회선이 여러 교환대에 복식으로 수용되어 있을 때 그 회선을 어느 교환대에서나 접속할 수 있게 하는 복식교환대(複式交換帶)가 최초에 설치된 그해 7월에 광주에 처음 전화가 개통되어 군용과 관용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1911년 4월1일 광주의 특설전화는 보통전화로 변경된 이후 1912년 6월에야 138대의 전화가 가설되었고 우편국에는 9명의 여자교환원이 3명씩 3교대로 근무하였다 전한다.

장흥군에 전화가 처음 가설된 때는 1908년 10월30일 장흥과 보성간 경비전화가 개통되었다고 황성신보(皇城新報)에 보도하고 있고, 이후 1909년 4월13일 장흥과 해남간의 경비전화가 개통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물론 이 당시의 전화는 자석식 전화였다.

장흥에 공중전화가 가설된 시기는 장흥우편취급소에서 장흥우편국으로 승격하던 1910년 10월1일로 장흥우편국에 “0번전화”가 공전식 전화기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당시 장흥군내에 전화가 얼마나 시중에 보급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동아일보와 시대일보를 보면 1922년11월3일자로 장흥에서 영산포간에 일반전화가 개통되었고, 1925년 6월6일부터 장흥우편국의 전화는 80회선으로 증설되어 교환업무를 시작하고, 전보규칙 제91조에 의한 가입자 탁송업무를 취급한다는 보도가 당시의 매일신보(每日新報)와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세차례나 보도하고 있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가늠하게 할 뿐이다.

무엇보다 당시는 일제가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공급을 가속화 하였고, 그나마 이 시기 전화선 대부분이 일본인에게 공급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했던 일본인이 전화 가입자의 80%에 이를 정도였다. 그래서 였을까? 당시 전화는 단순한 대화를 위한 기구로서가 아니라 전국의 정세를 파악하여 대처할 수 있는 정보을 파악하는 기구로서의 역할도 있어 장흥군에서 면단위에 일본인이 비교적 많이 거주하던 장평면에서 전화가설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당시 매일신보 12월3일자의 보도되어 있다 그 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장흥군 장평면에서는 일찍이 숙원 중에 있던 당 지방 전화가설에 대하여 가설 총공비의 약 반액에 해당한 칠백원을 지방유지의 기부를 받아 총독부 체신국에 진정하여 속진책을 맹렬히 운동한 결과 직접 주무에 당한 부산국으로부터 근일 중에 전기 가설재료가 도착될 예정이므로 도착 즉시 공사에 착수할 터이라는데 본 공사가 완성되면 당지방 곡곡의 동향에 다대한 활기가 유하리라 하여 일반에 다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해방이후 전화설치와 보급

1945년 광복으로 전기통신 전화 사업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하지만 전기통신은 기본적으로 전신선을 가설해야 하는 설비산업으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체신부(遞信部)가 발족되어 전기통신설비의 재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초창기 재원의 부족으로 만족할만한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당시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전신선 가설을 위한 기본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고, 전국의 전화교환설비 등의 약 80%가 파괴 훼손되었는가 하면, 기자재와 기술 부족으로 당시는 식민지시대 도입된 일제전화기와 미군정기 도입된 미제전화기들이 주종을 이루는 이러한 상황은 휴전 이후에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52년에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가입해 통신분야의 국제협력활동을 시작하여 1957년에 이르러서야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이후 1960년대 경제개발과 더불어 1962년도에 ‘체신 1호 전화기’(자석식,공전식,자동식)들이 늦게나마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최초의 국산전화기라는 의미를 갖고 출시되면서 통신분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이후 1973년에는 ‘체신1호전화기’를 개선한 ‘체신 70호’ 시리즈가 개발되었고, 드디어 1981년 국가에서 보급(관급제)하던 전화기의 구입절차가 개인이 직접 구입하는 ‘자급제’로 바뀌면서 다양하고 편리한 기능과 화려하고 개성화된 전화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964년 12월14일부터 장흥우체국에서도 국제전화를 취급하게 되었고, 1965년에는 전화 다이얼 등으로 상대가입자를 호출하여 인쇄통신기에 의해 통신하는 텔렉스(telex) 자동교환망이 설치되어 수출입국을 지향하는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을 위한 효과적인 지원수단이 갖추어졌다.

1967년에는 마이크로웨이브 전국통신망이 개통되어 대용량통신과 텔레비전 전송중계가 가능해졌으나 장흥은 1967년 8월3일부터 그동안 자석식 전화를 사용하던 것을 공전식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장흥의 민간인 전화가입자는 총 356대로 69%인 247대가 장흥읍에서 사용하고 있었고, 관산47, 대덕30, 용산3, 안양11, 장동3, 장평10, 유치3, 부산 2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기록이 1966년에 간행한 장흥지(長興誌)에 기록되어있다.

1970년에는 위성지구국이 구축됨으로써 전 세계와의 대용량통신이 가능해지고 1971년에는 서울-부산 간 장거리자동전화(D.D.D)가 개통되어 전국이 교환수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연결되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러나 급증하는 전기통신의 수요에 대처해 전기통신분야의 설비확장 노력이 계속되었음에도 경제개발계획의 수행으로 전화 수요증가 속도가 공급의 증가속도를 크게 뛰어넘어 전화 적체가 사회적 문제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경제가 급격하게 팽창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심각해졌다. 이른바 1970년 8월30일 이전, 전화 회선(回線)의 부족으로 전화 가입을 정부에서 개인에게 거액을 받고 소유권을 인정하여 이를 개인과 개인간에 양도할 수 있도록 하는 백색전화와 1970년 9월1일 이후 개인이 양도할 수 없는 국가 소유의 청색전화로 구분지어 운영하자 백색전화 값의 폭등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백색전화와 청색전화는 건화 가입원부가 흰색과 청색으로 구분되었기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전화공급 부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는 전화선을 대중이 동시에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교환기를 도입하고 개발함과 동시에 지역단위의 교환기 설치나 자동 장거리전화의 설치와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전화수급의 불균형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한편, 가정과 직장 등에서 사용하던 개인전화기가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고, 휴대폰 등 무선통시기가 없던 시절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공중전화가 있었다.

​ 해방 후 공중전화기로 동전(鑄貨)투입식이 처음 도입된 때는 1960년으로 “옥내 탁상형 공중전화기”로 일본 제품을 도입하여 조립 생산하였다. “옥외무인공중전화기”는 1962년 7월 1일 산업박람회장에 설치된 것이 국산공중전화기로는 처음으로 “한국통신기공업”에서 제작한 ‘통신1호 공중전화기’이다. 산업박람회가 끝나고 박람회장에 설치되었던 공중전화 10대가 서울시내 번화가에 설치되면서 공중전화는 본격적으로 가설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전화요금은 1통화 당 주화 50환이었고, 1969년에는 “한국통신기공업”에서 제작한 ‘체신1호 공중전화기’가 1통화당 주화 5원의 전화요금으로 선보였다. 이 전화기는 1977년 요금이 10원으로 인상되었으나 구멍가게에도 탁상형 공중전화가 있어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 수 있어 집전화가 없거나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는 일반서민들에게 유용한 통신수단으로 각광을 받았다. 이후 1978년 12월에는 그 동안 시내통화만 가능하던 공중전화가 시외 전화까지 가능하게 되었고, 1983년에는 시내와 시외 겸용 DDD 공중전화기가 국내 기술로 개발되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86년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카드식 공중전화기가 등장하였고, 이후 신용카드로 국제전화까지 가능한 주화와 카드 겸용 공중전화기까지 보급되어 활기를 띠었으나 가정용 전화 보급과 휴대전화 보급으로 공중전화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공중전화의 효용도에 대한 존폐가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다음호에 계속>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동교3길 11-8. 1층
  • 대표전화 : 061-864-4200
  • 팩스 : 061-863-49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욱
  • 법인명 : 주식회사 장흥투데이 혹은 (주)장흥투데이
  • 제호 : 장흥투데이
  • 등록번호 : 전남 다 00388
  • 등록일 : 2018-03-06
  • 발행일 : 2018-03-06
  • 발행인 : 임형기
  • 편집인 : 김선욱
  • 계좌번호 (농협) 301-0229-5455—61(주식회사 장흥투데이)
  • 장흥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흥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htoday7@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