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의 모태-보림사’의 창건비화(1)-가지산문 보림사–한국 조계종의 시발점이었다
■‘조계종의 모태-보림사’의 창건비화(1)-가지산문 보림사–한국 조계종의 시발점이었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5.2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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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내산문 주렴-‘江西禪脈이 모두 東國(신라) 승려로 돌아갔다”
달마·혜능·마조 선맥(禪脈)이 신라국 가지산문 보림사에 뿌리 내리다
보림사 1조 도의=한국 조계종 종조(宗祖)
가지산문 보림사=한국 선종의 모태가 되다
神光不昧 萬古輝猷/入此門內 莫存知解
부처의 光明이 어둡지 않고 만고에 찬란하니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百丈曰江西禪脈 /摠屬東國之僧歟
백장이 말하길 강서 선맥(남선종 선맥)이
모두 동국(신라국)의 승려로 돌아갔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神光不昧 萬古輝猷/入此門內 莫存知解

부처의 光明이 어둡지 않고 만고에 찬란하니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百丈曰江西禪脈 /摠屬東國之僧歟

백장이 말하길 강서 선맥(남선종 선맥)이

모두 동국(신라국)의 승려로 돌아갔다

-보림사 내산문 주렴珠簾 구句

보림사(주지 일선)는 지난 5월 5일, 내산문에 새로운 주렴(珠簾)의 현판을 내걸며, 구산선문의 종찰로서 보림사의 새로운 부흥 의지를 다졌다.

내산문에 걸린 주렴의 글은 서예가 치인 이봉준(社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이 쓰고 각(刻) 철우(鐵牛) 곽금원(중요무형문화재108호 각자장 이수자)가 새겼다.

주렴 글귀는 전면은 ‘神光不昧萬古輝猷/入此門內 莫存知解(부처의 광명이 어둡지 않고 만고에 찬란하니/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이고, 후면은 ‘百丈曰江西禪脈/ 摠屬東國之僧歟(백장이 말하길 강서선맥南禪宗이 모두 동국(東國,신라)의 승려로 돌아갔다’는 글이다.

전면의 ‘신광불매神光不昧…’는 참선(參禪)을 수행하는 구도자들이 가장 즐겨 읽는다는 휴정(休靜,서산대사, 1520-1604)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나오는 글로, 그 중 최종장에 나오는 법어인데, 이 법어의 뜻하는 의미가 커, 많은 사찰 일주문 등에 현판으로 내걸린 글귀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후면의 주렴 글인 ‘百丈曰江西禪脈백장왈강서선맥…’은 부연 설명이 필요한 글이다.

중국의 선종의 계보와 도의(道義)

석가모니 부처가 처음 깨달음의 문을 연 이래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마음 자리를 바로 보고 깨달음에 이른다’는 선종(禪宗)으로 발전한다.

그 시조가 달마대사로 달마(達磨, ?∼528 추정)는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된다. 달마 이후의 중국 선맥(禪脈)은 혜가(慧可,제2조, 487∼593) → 승찬(僧璨,제3조, ?∼606) → 도신(道信, 제4조, 580∼651) → 홍인(弘忍, 제5조, 601∼674) → 혜능(慧能, 제6조, 638∼713) → 남악회양(南岳懷讓,제7조, 677∼744) → 마조도일(馬祖導一,제8조, 709∼788)로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 중에, 중국의 선종은 혜능(제6조)에 이르러 확립되어 크게 번창하였고, 이어 남악회양(제7조)을 거쳐 마조도일(제8조) 대에 이르러 중국 선종(禪宗)으로 결실을 얻기에 이른다.

마조도일 문하의 139명의 입실 제자 중에 특출난 삼철(三哲)이 있었는데, 서당지장(西堂智藏, 738∼817),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남천보원(南泉普願, 748∼835)이었다. 그런데도 서당지장으로부터 강서선맥(江西禪脈, 마조의 선맥)이 중국에 머물지 않고, 신라승 도의(道義, ?∼821)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도의선사는 760년 경 당시 경주의 변방이 북한군(北漢郡)에서 태어나 출가하니 법명이 명적(明寂)이었고 선덕왕 5년 784년에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당에서 37년 동안 수행하면서 남종선의 조사선(祖師禪)을 공부했던 승려였다.

위 글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중국의 선승으로 마조 제자인 백장회해(百丈懷海)가 명적, 곧 도의선사를 보며 찬탄(또는 탄식)했다는 내용이다. 백장의 예언처럼, 중국에서 발원한 선법(禪法)은 당송을 거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도의로부터 시작한 동국(東國:신라국)의 선은 구산선문을 거쳐 오늘날 조계종으로 꽃을 피웠던 것이다.

도의에게 선맥을 전한 서당과 백장

도의(道義)에게 법을 전한 서당지장은, 강서성의 감현(감縣) 사람으로 속성은 료(廖) 씨이며 법명은 지장(智藏)이다. 그는 6세 때 스승을 따라가 25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마조의 제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범상치 않아 한 관상가가 "그대의 기골(氣骨)은 비범하여 틀림없이 법왕(法王)의 보좌가 될 것이다." 고 했다고 한다. 그는 강서성 건주(虔州) 서당(西堂)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특히 서당의 선풍은 신라에서 흥성하였는데, 그의 제자 중 도의(道義)가 신라에 귀국하였고 그로부터 법통을 이어 받는 3세 체징이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였으며, 또 다른 제자인 혜철(惠哲)은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하였던 것이댜.

도의를 보며 ‘강서의 선맥이 신라국으로 간다’고 찬탄(한탄)했다는 백장회해百丈懷海)는 이름은 회해(懷海)로 당나라 대표적인 선승으로 중국 선(禪)의 황금시대를 활짝 열었던 인물이었다. 마조 밑에서 수도하며 대오(大悟)하였던 백장은 백장산에서 율원(律院)으로부터 독립한 선원을 창설하고 다시 율전(律典)에 구애받지 않는 선종 독자의 규율을 만들어 대중을 이끌고 농사와 선 수행을 병행하여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생활화하였다. “하루 지음[作]이 없으면 하루 먹지 아니한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한 백장의 말은 그의 선풍(禪風)을 잘 나타내는 말로 오늘날까지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도의, 신라국 선종(禪宗)의 종조(宗祖)가 되다

중국에서 도의의 흔적을 더 추적해 보자. 선종의 역사를 기록한 고서 <조당집祖堂集>에 도의의 중국 행적도 기술되어 있다.

도의는 광동성 광주(廣州)의 <육조(혜능)단경>의 설법 장소인 보단사(寶壇寺, 현 大鑑禪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훗날 조계산(현 廣東省 韶關 南華寺)으로 옮겨갔다. 도의는 6조 혜능을 모신 조사당에 이르러 참배했다(이때 조사당 문이 저절로 열렸고, 3배를 올리고 나오니 또한 문이 닫혔다는 신기한 고사도 기록되어 있다).

이후 도의는 강서성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 현 佑民寺)에서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를 친견하고 의심하고 있던 바를 물어 그 의문점을 풀었다. 서당은, “마치 돌더미에서 아름다운 옥(玉)을 얻은 듯하고 조개 속에서 진주를 주워낸 듯하다”고 기뻐하면서 “내가 진실로 법(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라고 말하고는 도의의 깨달음을 인가하고, 법호를 ‘도의(道義)’라 했다. 도의선사가 개원사에서 서당을 만나 법맥을 받은 장소라고 해서, 지난 2008년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개원사 도량에 ‘조계종 종조(宗祖) 도의조사 입당(入唐) 구법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도의는 서당 문하에서 수행한 뒤, 백장 선사가 머물고 있는 백장산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도 도의는 서당선사를 모시던 것처럼 백장회해를 스승으로 섬겼다. 어느 날, 도의의 정진력에 감화받은 백장이 도의에게 “강서의 선맥禪脈(마조선사의 선맥)이 모두 동국東國-신라국-의 승려에게 넘어가는구나.(百丈曰江西禪脈 摠屬東國之僧歟-<조당집> 중)”라고 말하였다.

도의선사는, 이처럼 마조 문하의 제자인 서당으로부터 법맥(禪脈)을 이어받았고, 백장으로부터도 인정을 받기에 이르러, 그는 중국의 선맥 곧 남선종을 이은, 동국(신라국) 선종의 종조宗祖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의-염거-체징에 이르러 선종 산문인 가지신문 열다

도의선사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때가 821년(헌덕왕 13)이었다. 당시 신라 사회의 사상적 주도권은 교종이 쥐고 있어, 도의의 선풍을 수용하지 못했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에 의하면 “처음 도의선사가 서당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存神之法=교종敎宗을 의미)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의 종(無爲任運之宗=선종禪宗)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달마가 금릉金陵으로 가 무제武帝와 문답하다가 기연이 맞지 않음을 깨닫고 돌아선 고사)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에게 부촉했다. 初道儀大師者, 受心印於西堂, 後歸我國, 說其禪50)理. 時人雅尙經敎, 與習觀存神之法, 未臻其爲任運之宗, 以爲虛誕, 不之崇重, 有若達摩不遇梁武也. 由是知時未集, 隱於山林, 付法於廉居禪師.(보조선사창성탑비명)​”

결국 도의선사는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갔으며, 여기서 염거(廉居 ?-844)에게 법을 전했고,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며 다시 법을 보조체징(普照體澄, 803∼880)에게 전했다.

이후 체징은 장흥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산문을 열었다. 이후 이 산문에는 800여 명의 승려들이 운집해 수행했다고 한다 (“선사가…누운 채로 임종했다. 향년 77세로 승랍 52세였다. 이에 제자 영혜英惠·청환淸奐 등 800여인은 의리가 어버이를 잃은 듯 깊었고 정이 하늘과 땅에 사무쳐 추모하여 울부짖으니…右脇臥終. 享齡七十有七, 僧臘五十二. 於是, 弟子英惠, 淸奐等, 八百餘人, 義深考妣, 情感乾坤, 追慕攀號- 보조선사창성 탑비명).

이로써 당시 도의선사의 선법이 신라국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말기 여러 산문 가운데 가지산문만 흥성했다. 고려 때 <삼국유사>로 유명한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 승려였다.

결국 중국 강서의 선맥이 도의에게 이어지고, 다시 도의로부터 염거 선사 → 보조체징 선사로 이어진 강서의 선맥(남선종)이 장흥 보림사에서 만개되기에 이르면서 한국에 선종이 뿌리내리는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보조선사가 입적하자 헌강왕은 시호 ‘보조선사’와 탑호 ‘창성탑(彰聖塔)’를 내리며 원래 ‘가지산사(迦智山寺)’라는 절 이름도 ‘보림사’로 바꾸도록 하였다.

즉, 보조선사탑비에 의하면, “…임금이 진종眞宗의 이치를 흠모하고 스승을 높이는 마음을 갸륵히 여겼다. 이에 담당 관사에 명하여 시호를 정하여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보림寶林이라 하니, 이는 그 선종을 포상하는 예에서이다. 다음 날에 또 미천한 신에게 비문을 지어 뒷날의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명하니…聖上慕眞宗之理, 憫嚴師之心. 敎所司定, 諡曰 普照, 塔號彰聖, 寺額寶林, 褒其禪宗禮也. 翌日, 又詔微臣, 修撰碑讚, 垂裕後人)

본래 '보림사'는 중국 선종 제6조인 혜능(慧能, 638-713)이 머물면서 선(禪)을 꽃피우던 중국 남선종(南禪宗)의 총본산이었다. 또 도의선사가 혜능의 남선종 선맥을 이었고, 보림사도 혜능의 남종선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뜻에서 '보림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이는 결국 보림사가 ‘신라국 선종의 총본산’임을 인정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써 가지산문과 그 본사(本寺)인 보림사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또 체징이 보림사를 개창했지만, 신라국 선종으로서 선맥이 도의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명시하고, 달마가 당나라에서 제1조가 되었듯이 신라에서는 도의대사(道儀大師)가 제1조, 염거선사(廉居禪師)가 제2조, 보조체징선사가 제3조라면서 선종의 선맥이 도의로부터 염거, 체징으로 전승되었음을 보조선사창성탑비에서 명확히 해 놓았던 것이다.(是以, 達摩爲唐第一祖, 我國則以儀大師, 爲第一祖, 居禪師爲第二祖, 我師第三祖矣.- 是以, 達摩爲唐第一祖, 我國則以儀大師, 爲第一祖, 居禪師爲第二祖, 我師第三祖矣.-보조선사 창성탑비)

“도의=조계종 종조. 보림사=한국 선종의 총본산”

현재 한국의 선종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 제2장 6조에는 “본종(本宗)은 신라 헌덕왕 5년 813년에 조계 혜능의 증법손 서당지장에게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道義)국사를 종조(宗祖)로 하고, 고려의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하여 청허와 부휴 양 법맥을 계승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또 조계종 종헌 서문에도 “우리 종조(宗祖) 도의국사께서 조계의 정통법인을 사승(師承)하사 가지 영역(가지산)에서 종당을 게양함으로부터 구산문이 열개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도의국사가 엄연히 현 조계종의 조사(祖師), 종조(宗祖)로 공인받고 있음을 명확히 해놓고 있다.

중국의 선승 백장스님의 말처럼, 결국 중국의 선맥은 신라의 도의에 이어져 구산선문의 종찰인 보림사에서 꽃피우게 되었으니, 오늘날 보림사가 한국 선종의 시발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림사의 산문은 분명히 3조 보조체징이 열었지만, 가지산문은 도의선사의 선사상을 바탕으로 확립되었고 이로써 보림사가 조계종의 시발점, 즉 구산선문의 종찰인 보림사가 한국 선종의 시발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김선욱 기자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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