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天放 유호인- 중앙무대에서 100여 학자들과 교유(交遊)했다
■역사인물/天放 유호인- 중앙무대에서 100여 학자들과 교유(交遊)했다
  • 김선욱
  • 승인 2019.06.0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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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퇴계 이황…율곡 문인된 이후 김장생등 90여인과 교우
천방-68세 연하동 입산?-50여세에 연하동으로 입산했다 기록도

 

▲천방 유호인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장흥읍 예양서원천방
▲천방 유호인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장흥읍 예양서원천방

중앙무대서 수많은 학자들과 교우

선생은 최변방인 장흥 땅을 벗어나 중앙무대에서 당대의 수많은 학자들과 교우(交友)하였다. 특히 남명 문하의 학자들과 교우지계(交友之係) 맺고 학문을 강론하곤 했다. 이때 교유했던 주요 학자들이 대독 성운, 삼족당 김대유, 황강 이희운 등이었다(自此與成大谷運 金三足大有 李黃江 諸賢爲莫逆之交 -위백규).

또 선생은 이들외에도 구봉 송익필, 운곡 송수필(송익필의 아우), 북창 정렴, 지산 조호익, 월정 윤근수 등과 나날이 한가로이 노닐며 교우했다(與宋翼弼 字雲長號龜峰 宋輸弼 字季膺翼弼第吔號雲谷 鄭磏 字士潔號北窓 曺好益號芝山 尹根壽號月汀-遺事 遺傳하여 오는 事蹟).

또 선생은 나이 들어 늦깎이로 이이(李珥)의 문인이 되면서 이이의 문하에서 당대의 대석학이요 예학(禮學)의 거두였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비롯하여] 당대 석학으로 유학자요 훗날 의병장이된 중봉(重峯) 조헌(趙憲), 대학자들인 묵재(默齋) 이귀(默齋), 잠암(潛庵) 김의정, 봉성민(奉聖民 字時仲, 官監察), 우사인(禹思仁, 字隱翁, 官參奉) 등 이이의 주요 문인(門人) 90여인과 예학(禮學)을 강론하고 성리학을 논하기도 하며 주자(朱子)의 예를 본받기도 하였다(혹(或與 門人 金長生 號沙溪, 趙憲號中峰, 劉好仁號山堂, 李貴, 金義貞, 奉聖民, 禹思仁 等 九十餘人 講論禮學 惑論性理學 惑敎朱子之禮--遺事 遺傳하여 오는 事蹟).

이처럼 천방이 중앙 무대에서 교유(交遊)하며 함께 강론하며 교우(交友)했던 학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대충 헤아려보아도, 당대의 학계를 풍미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100여 분은 족히 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이분들 중 10여분의 면면을 소개해 본다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은 조선조 중기의 학자·시인·문신이다.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형 성우(成遇)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며 화를 입자 관직을 버리고 보은 속리산에 은거, 평생을 재야 선비로 살았다. 당대 전형적인 ‘처사형 사림(士林)’의 입지를 지킨 대표적인 석학으로 남명 조식과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그의 학풍과 시문은 당대에도 높은 평가가 있었다. 그는 <대곡집 (大谷集)>을 남겼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1479∼1551)도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다. 무오사화(戊午史禍)로 숙부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처형되면서 유배되었다가 유배가 풀리고 장원급제하여 진사에 등용되지만 귀향하였고 이후 여러 직책에 오르지만 끝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력하며 지냈다. 남명 선생은 김대유가 백 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지만 세 가지 재주에 만족해 ‘삼족당(60 세가 넘었으니 수壽에 足하고, 과거 급제로 벼슬도 할 만큼 했으니 영화榮和에도 足족하고, 조석으로 식사도 남 못지않게 할 수 있으니 食식에도 足 족00하다 하여 삼족三足)이라 부른다’며, 무예가 출중하며, 말을 달리며 사냥도 즐기는 호인으로 평가했다.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1504~1559)도 천방 선생과 깊이 교유(交遊)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14 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거쳐 고령현감으로 부임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심했으며,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선비로서 남명 조식, 대곡 성운 등과 교의가 두터웠다.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기 보다 산림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내고자 했던 선비였다.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영성에만 전념하다 56세 때 요절했을때 남명 조식이 그의 사후 묘갈명을 지어 그의 요절을 안타까워했을 만큼 그의 당대 학자로서의 명성은 조정까지 떨쳤던 인물이었다.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1534~1599)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서출로 벼슬을 하지 못했으나,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우하면서 성리학과 예학(禮學)을 탐구하여 조예가 깊었던 재야의 석학이었다. 그는 특히 학문 정진과 후진양성에 전심을 쏟아 그의 문하에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김장생의 子)·정엽(鄭曄)·정홍명(鄭弘溟)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로 유명한 <구봉집(龜峰 集)>을 남겼다.

북창(北窓) 정렴(鄭磏,1506∼1549)은 1537년 사마시(진사시)에 합격한 후 하포천 현감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어려서부터 천문·지리·의서·복서(卜筮)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특히 정렴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단학(丹學) 인물이며 그가 남긴 <용호비결>은 한국고유의 단학수련법이다.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녹피(鹿皮)를 하사받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재차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뒤 선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지산집> 외에 저서로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 <가례고증(家禮考證)> <제서질의(諸書質疑)>등이 있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1537~1616)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후에 죄의정‧영의정을 역임한 윤두수(尹斗秀)의 동생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신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오고가면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장이 고아하고 필법이 굳세어 예원(藝苑)의 종장(宗 匠)이라고 일컬어졌다. 양명학을 배척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저작으로는 사서에 토를 붙인 <사서토석(四書吐釋)>등과 문집으로 <월정집(月汀集)>이 전한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요 문신이다. 그는 83년의 긴 생애 동안 꾸준히 예학을 연구했던 조선조 예학의 태두였으며 서인의 영수로서 당대 정계와 학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도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었다. 임진왜란 때 정산(定山)현감으로 있으면서 피란 온 사대부들을 구휼하였으며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明)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다. 인목대비 폐모논의(廢母論議) 때 북인의 득세 속에서 관직을 포기, 고향으로 낙향하여 10여 년간 은거하면서 예학 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그의 제자로 아들이며 그의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해서 송준길(宋 浚吉) 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은 거의 망라되어 있다.

중봉(重峰) 조헌(趙憲, 1544~1592)도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6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定州 敎授)가 되었다.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로 청주를 탈환하였으며.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754년(영조 30)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집으로 <중봉집>이 있고, 저서에 <동환봉사> 등이 있다.

묵재(默齋) 이귀(李貴, 1557~1633)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의 폭정을 개탄하여 1623년 김류(金 瑬)와 함께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한 후 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서(功西)의 영수가 되었다. 저서에 <묵재일기(默齋日記)>, 편저에 <한음공언행록(漢陰公言行錄)>이 있다.

잠암(潛庵) 김의정(金義貞, 1495년~1547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재기가 뛰어나 8세에 글을 지었으며, 약관에 이미 문장이 성취되었다. 1516년 사마시 합격 후, 별시 문과 병과도 급제하였다. 왕의 두터운 총애로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갔다가 김안로 처형된 후 다시 공조좌랑에 임명되고, 이어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잠암일고(潛庵逸稿)> 5권이 있다.

언제 연하동으로 들어갔을까

천방 선생이 언제 연하동(煙霞洞)으로 들어갔을까.

이에 대한 단초는 반곡의 행장(行狀)에서 나타나 있다.

“융경(隆慶) 경오년(庚午年, 1570년) 공의 나이 68세에 선영 곁에 초가집을 짓고 몸소 벌초하고 눈 쓸기를 게으르지 않았다(至隆慶庚午年 公年六十八 結廬先塋側 掃雪躬執不懈- ‘천방선생문집’-행장)

이를 근거로 ‘천방선생문집’의 천방선생 연보(年譜)에서도 선생이 68세 때 ‘선영 곁에 초막을 짓고 은거했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디서 거주했을까. 연하동으로 들어온 나이가 68세이면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닌가.

이에 대한 또 다른 견해가 있다.

우복룡(禹伏龍, 1547~1613))의 <동계잡록(東溪雜錄)>에는 1581년 (선조 14년 신사년) 10월 11일 일기 중에 천방 유호인 선생의 기록이 나타난다.

<전라감영지>에 따르면, 심의겸(沈義謙, 1535년~1587)이 1577년(선조 5년 정축년) 9월에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의 각 고을을 순방하였고, 이 기간에 장흥 연하동에 있는 천방 선생을 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천방 선생의 나이가 80세를 넘겼는데. 입산한 지가 30년 이상이 되었다고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천방 선생은 50세 때 선영이 있었던 장동면 하산리 연하동으로 입산하였고 할 수 있다. 당시 심의겸은 율곡 이이와 교류하였는데, 아마도 천방 선생이 율곡의 문인이어서 장흥 고을 순방때 천방 선생을 방문한 것으로 여겨진다(湖南有劉好仁者。年過八十。入山已三十年。案上無他物。只有書冊。常有詩云。木梳梳了竹梳梳。乱髮纔分虱未除。安得大梳千萬尺。盡梳黔首虱無餘。沈義謙為方伯。盡去騶率。只以匹馬跪進。筐篚亦不辞云。劉即丁景達之表叔云)

(<동계잡록(東溪雜錄)>은 동계(東溪) 우복룡(禹伏龍, 1547~1613)의 후손 우성건(禹成鍵)이 1987년에 영주 호암정(湖巖亭)에서 간행한 것으로, 우복룡의 <동계잡록>에다 우복룡의 무덤ㆍ묘비ㆍ신도비를 찍은 사진과 김철희의 서문을 붙여서 다시 간행한 책이다. 우복룡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학문과 행실이 모범이라는 이이(李珥)의 천거로 소문전참봉(昭文殿參奉)이 되었고, 이어 김포현령, 목천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에는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서 끝까지 고을을 지킨 공이 인정되어 안동부사, 홍주‧나주•충주 목사를 거쳐 1612년에 성천부사에 이르렀다. 문집으로 <구암집> <동계잡록> 등이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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