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 天放 劉好仁(4)
역사인물 / 天放 劉好仁(4)
  • 김선욱
  • 승인 2019.06.2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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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서 백광훈·문위세·위대용·임회·김귀명 등과 종유(從遊)
문인(門人)은 정경달·위덕의·문희개·백문림·위홍주·김지주 등

한양의 중앙무대에서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강론하고 학문을 익혔던 천방 유호인 선생. 그렇다면 장흥에서는 누구누구와 교유하였고, 선생의 문인(門人)으로는 누구누구였을까.

천방과 종유(從遊:학식‧덕행이 높은 사람을 좇아 함께 지냄) 했던 사람들은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풍암(楓菴) 문위세(文緯世), 괴봉(魁峰) 위대용(魏大用), 죽곡(竹谷) 임회(林薈), 운곡(雲谷) 김귀명(金龜命), 김삼택(金三宅), 김몽진(金夢辰), 김몽인(金夢寅) 등이었다.(‘천방선생문집’-從遊錄)

백광홍, 문위세, 위대용과 교우

이들 중 당대 가장 뛰어난 위인은 백광훈과 문위세였다.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조선조 기행가사의 효시 ’관서별곡‘을 남긴 천재 문인 기봉 백광홍(1522∼1556)의 동생으로, 8세에 글을 짓고 13세에는 이미 시를 잘 지어서 이름을 크게 떨쳤던 시문(詩文)의 대가였다. 1564년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오직 산수를 즐기며 학문과 시에 전념하였다. 1572년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盧守愼,1515~ 1590, 후에 영의정 역임) 영의정을 따라 백의로 제술관이 되어 시문과 글씨로 명인들을 감탄케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41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선릉참봉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정릉(靖陵)·예빈시·소격서 등의 참봉을 지냈다. 그는 특히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의 풍조를 쓰려고 노력하여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三唐)시인‘으로 불리었고, 또 이산해·송익필·최경창·최립·이순인·윤탁연·하응림 등과 함께 조선 최고의 문장인 팔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는 칭송도 들었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왕희지의 초서체에 뛰어났으며 현존하는 작품을 통해 활달하고 대담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1590년 강진에 있는 옥봉서원에 제향되었고 문집으로 <옥봉집(玉峰集)>이 있다.

문위세(文緯世, 1534∼1600)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위명을 떨쳤던 위인이었다. 유희춘(柳希春)·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고 유치 늑용리 백운암(白雲庵)에서 제자 수 십 명을 거느리고 학문과 활쏘기, 말타기를 가르치면서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들과 교유하고 학문연구에 전심을 다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던 광해군의 사부를 지낸 죽천 박광전(朴光前,1526-1597),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낸 삼도 임계영(任啓英 1528-1597)과 의논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200여 명의 의병과 집안 노복 100여 명을 이끌고 나아가 전라좌의병대의 군량미 확보, 조달 총책을 맡았으며 군무를 계획하고 처리하는 지략이 뛰어나 제갈량으로 비유됐고 흰옷 입은 의병장으로 불리어지며 ’백의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595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임명되고 정유재란 때 가족(동생, 사위 등)과 읍민을 동원,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1600년 파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병조참판이 추증되었고, 강성서원(江城書院)과 월천사(月川祠)에 제향되었다.

위대용(魏大用, 1530~1610)은 1555년 사마시 진사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호남모곡도유사(湖南募穀都有司)로 ‘나라를 위해 나서라’고 격문을 돌리고 군량을 모았으며 형제, 조카 등 10 여 명을 동복현감 황진 휘하의 의병으로 들어가 참전하게 했다. 후에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졸(卒) 후 석천사(石川祠)에 주벽(主壁)으로 제향(祭享)되었다.

임회(林薈,1508 ~?)는 자 헌가(獻可), 호 죽곡(竹谷)으로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1540년(중종 35) 별시(別試) 병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장을 지냈으며 7주 목사를 거처 고을마다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고 옥배(玉盃)와 화개(華蓋)를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강진군 강진군 작천면 박산리 박산서원에 제향돼 있다.

김삼택(金三宅)은 본관은 영암(靈巖), 자는 태재(太宰)이다. 1531년(중종 26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4년(중종 29)에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위로 합격했으며 현감(縣監)을 지냈다.

그밖에 운곡(雲谷) 김귀명(金龜命,1517년∼1555)은 식년시 진사 3등으로 합격했으며 진사를 지냈다. 김몽진(金夢辰)도 부사(府使)를 역임했고, 김몽진(金夢寅)도 교수(敎授)를 역임했던 선비였다.

국담 임희중도 교우

천방 선생의 종유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국담(菊潭) 임희중(任希重,1492~?)도 천방과 교유했던 인물로 보인다. 시문이 뛰어났던 임희중이, 절친하지 않으면 지을 수 없는 천방에 대한 시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에 집 나가 놀면 정 나라 기동의 풍류요(朝遊門外奇童鄭)/저물어 건산에 돌아와 자면 유처사라네(暮宿巾山處士劉)”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에서 ‘정鄭’은 ‘정鄭나라의 풍류, 즉 음탕한 음악을 가르킨다). 국담의 이 시는 천방과의 친교가 있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시였다. 국담은 천방 선생의 10세 연배로 그는 장천동(관산)에 살았고(후에 보성 조성으로 이거) 천방은 건산리에 살았다. 이 장흥인 두 분 다 진사시 등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만 살았다.

임희중의 자(字)는 대수(大受), 호(號)는 국담(菊潭)이다. 명종(明宗) 때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專心)하였고, 해남 출신으로 시문과 사장(詞章)에 탁월하였던 문신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과는 막역한 사이로서 누차 학행으로 천거(薦擧)되었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다가 잠시 좌통례(左通禮)를 지내다 뒤에 다시 은퇴, 후진 교육과 학문연구에 전심했다. 시문, 문장에 뛰어났으며 천문·지리·병법·수학 등에도 정통했다.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 아들 ‘임백영, 임계영’이 문과 급제자로, ‘임계영’은 임진란 때 보성과 장흥에 기반한 ‘전라좌도 의병장’이었다. 국담은 <인재책(人才策>과 <국담유고>를 남겼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제자로 정경달 위덕의 문희개가 유명

천방 선생의 문인으로는 반곡(盤谷) 정경달(丁京達)을 비롯하여 청계(聽溪) 위덕의(魏德毅), 용호(龍湖) 문희개(文希凱), 사주당(思周堂) 백문림(白文鱗), 수정당(水靜堂) 위홍주(魏弘宙), 앙지(昂之) 김지주(金砥柱), 증집의(贈執議) 이섬(李暹), 월암(月巖) 조장일(曺長日), 선생의 손(孫)인 회수(晦叟) 유덕명(劉德明) 등이었다. (‘천방선생문집’ -천방선생 門人錄).

천방의 문인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위인으로 정경달, 위덕의, 문희개를 들 수 있다.

정경달(丁景達,1542~1602)은 선생의 수제자로 장흥의 역사 인물 중 유일하게 영웅으로 불릴 수 있는 장흥의 위인이었다. 그는 천방 선생의 시문 100여 수를 필사해 남겨, 오늘날까지 천방 선생의 시문이 전해질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천방 선생의 행장(行狀)이며 정정정당기(定靜堂記) 등을 남겼다. 그는 또한 그 스스로 한 글자라도 알게 된 은혜는 모두가 천방 선생의 은덕이었다(一字之恩 無非公之德- ‘천방선생 시문집’-行狀)고 말할 정도였다.

반곡 선생은 또 선생의 학업이 전수되지 못함을 한탄하며, 연하동에 고을을 대표할 만한 큰 서당을 지어 모든 선비들이 선생을 경모하고 학문을 닦을 장소로 만들려고 했고(限其學業之無傳 慾於煙霞洞裏 作鄕書堂 以寓士子景慕之地-‘천방선생문집’-追錄), 이러한 선생이 염원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그의 아들 정명열(丁鳴說)이 앞장서서 천방 선생을 향사히고 선비들의 학업의 장소로 쓰일 사우당(詞宇堂-지금의 예양서원) 건립에 앞장섰으며 그 초대 사우원장(祠宇院長)이 되기도 하였다.

정경달은 자는 이회(而晦)이고, 호는 반곡(盤谷)이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선조 25)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재임하였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많은 왜군을 포로로 잡았으며 관찰사 김성일(金誠一), 병마절도사 조대곤(曺大坤)과 함께 경상도 금오산(金烏山)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1594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종사관이 되어 큰 공을 세움으로써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597년 이순신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계략으로 투옥되자, 조정에 나아가 왕에게 “전쟁에 나가 싸움을 미루는 것은 병가의 승책(勝策)인데, 어찌 적세를 살피고 싸움을 주저한다 하여 죄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하고 석방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정경달은 임진왜란 발발시부터 <난중일기>를 썼는데, 당시의 해전뿐 아니라 육전의 상황도 상세히 기술하였고, 대외교섭에 관한 기록도 남기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난중일기> 외에도 수백 편의 시문집을 남겨 <반곡집>으로 간행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난중일기1.2>와 <반곡정경달시문집 1.2>가 국역화되며 간행되었다.

위덕의(德毅, 1540~1613)의 호는 동호(桐湖) 또는 청계(聽溪)다. 1573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전심을 다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친의 병이 위급하자 고통을 함께 하고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리는 효성을 보였고 부친이 별세하자 묘소에서 3년 동안 기거하며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통곡했다. 그 자리에 풀뿌리가 돋아나지 못하니 향리 친척들이 다 ‘위 효자’라고 칭송하여 상을 내릴 정도였다.

임란 때 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에서 90일 간 걸어서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에서 임금을 알현하니 군신(君臣) 모두가 놀랐다고 한다. 선조는 위덕의를 향하여 “그대는 참다운 충신이다”라고 칭찬하였다고 하며, 그 자리에 있던 명 장수 려응종(呂應鍾)은 공을 보고 “동국(東國)의 산(山)은 천관산(天冠山)이 있고, 사람은 위덕의(魏德毅)가 있어 보배롭다”고 했다. 또 중국 명나라 당시 조선에 구원병으로 출전했던 전말을 기록한 <동정기(東征記)>에는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정몽주와 함께 이름난 현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이 귀경한 후 공에게 영남(嶺南) 운양관(運官)을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어 호종(扈從)의 공으로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해도 취임하지 않으니 호종원종(扈從原從勳) 일등(一等)에 록(錄)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贈職) 됐다. 광주 황산사와 관산 죽천사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문희개(文希凱1550 ~1610년)는 호는 용호(龍湖) 또는 청영(淸청영(淸暎- 옥봉의 시에서는 호가 청영으로 나온다)이다. 1576년에 사마시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임란 때 ‘백의 의병장’으로 위명을 떨쳤던 문위세의 조카이다. 문희개의 조부 문량(文亮)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문위천(文緯天, 1492-1573, 호 춘정春亭)이고, 둘째가 문위지(文緯地, 자 중장仲章), 셋째가 문위세(文緯世, 호 풍암楓巖)이었다. 문희개는 첫째인 문위천(文緯天)의 아들이었다. 임란 때 삼촌 문위세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풍암의 아들 문영개(文英凱)‧문원개(文元凱)‧문형개(文亨凱)‧문홍개(文弘凱) 등 네 아들과 사촌 문희개(文希凱)를 비롯해 인근의 남평문 씨 집안 사람들이 거의 모두 의병에 참여케 했다. 이때 삼촌을 따라 의병으로 참여한 문희개는 그 혁혁한 공적을 인정받아 고창현감으로 발탁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왜적이 성을 포위하자 아들 익명, 익졸과 함께 적을 격퇴시키고 고을을 사수하였다. 사직 후에는 부산면 부춘리 부춘정에서 만년을 보냈다.

문희개가 임란 때의 세운 공훈도 공훈이었지만, 부산면 부춘정과 연관되면서 더 유명해졌다현재의 부춘정은 1838년 경 웅치에 살았던 청풍(淸風)김씨 김기성(金基成 1801 ~1869)이 매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팔작집으로 개축하였고 이름도 부춘정이라 고쳐 불렀고, 현재 김씨 문중 소유로 되어 있다.

청풍김 씨와 남평문 씨 사료에 의하면, 본래 부춘정은 문희개 부친 문위천(文緯天)이 자기의 호인 춘정(春亭)을 붙여 지었고, 그의 아들 문희개가 정유재란 뒤 고향에 돌아온 뒤 1598년에 소실되었거나 하여 자신의 호 청영(淸暎)을 붙여 청영정(淸暎亭)으로 개축하였다.

당시 천방, 풍암 그리고 문희개와 교유(交遊)했던 시인 옥봉은 문희개의 거처(청영정-부춘정)를 방문한 시 2편을 남기기도 했다.

그 하나는 “문희개의 별장에 처음 가게 된 날(寄文舜擧 名希凱=無紙亦無筆-종이도 없고 붓도 없으니 寫懷山竹枝-신화대 꺾어 회포를 적소/君來不敢望-그대가 오라한 것을 어찌 잊었겠소/此日勝常時-오늘은 다른 날과는 달리 (그대가 와 달라고 한 그 말이) 나를 더욱 재촉하였소 –옥봉시집 ‘5언절구’/옥봉시집 ‘상권’ ”이고 또 다른 한편은 “청영淸暎 문희개文希凱의 정자, 그 사계절을 노래하다淸暎亭四時詞-옥봉시집 ‘7언절구’ / 옥봉시집 ‘상권’“이다(내용은 생략)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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