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차 문화와 다인(茶人)들 [ 7 ]
조선후기 차 문화와 다인(茶人)들 [ 7 ]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6.2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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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태전 국가중요농업유산등재 1주년 특집

이 정 호(야천서예연구원장)

■ 조선불교와 우리 차

우리나라의 차 역사는 2천년으로 보고 있다. 중국 육우(733~804)의 『다경』기록에 의하면 전설적인 황제 신농(神農)이 처음 차를 발견하고 마시기 시작한 것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우리 한국 차의 기원은 일연이 지은『삼국유사』에서 ‘수로왕이 인도에서 가야국으로 오며 피곤해 하는 허황후의 측근들에게 난액(蘭液, 향기로운 음료, 즉 차를 말함)을 주어 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허황후가 자신의 나라 인도에서 차 종자를 들여와 심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는 신라흥덕왕 3년(828년)에 김대렴이 중국에서 차 씨를 들여와 심었다는 설보다 400~600년이 앞선다.

고려시대의 차 종류는『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떡차(단차)종류의 뇌원차(腦原茶), 대차(大茶)가 있고,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유차(孺茶)와 단차(團茶)도 보인다.

우리 고대사회로 부터 신라의 차 생활이 고려에까지 이어지면서 왕실과 귀족, 문인, 승려뿐만 아니라 평민 사이에도 차가 널리 이용되었다. 다구의 쓰임새와 모양도 다양해져 고려청자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는 연등회와 팔관회 등 궁중의 중요 행사 때에도 진다의식이 까다롭고 엄격하였다.

차는 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하사하는 귀중한 예물이었고, 국제외교상 중요한 예물로도 사용하여 송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예물 중에 용봉차(龍鳳茶)가 들어 있었고, 고려가 원나라에 예물을 보낼 때에도 향차(香茶) 등을 넣어 보냈다.

이처럼 궁중에서 차의 쓰임새가 많아져 차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 즉 다방(茶房)이 생겨나 의약과 치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태의감(太醫監)이 소속되어 있었다.

승려가 수행하거나 일상생활에서도 차를 즐겨 마셨으며 사원에서는 차 우리기를 서로 겨루는‘명전(茗戰)’이라는 풍속이 행하여 졌고, 사원주변에는 ‘다촌(茶村)’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차 생활은 고급차를 즐기는 사치풍조와 과중하게 부과되는 차세(茶稅) 때문에 민폐가 막심해져 갔다. 때문에 차는 서민들의 원한의 대상이 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차나무를 없애버리는 곳도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이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차가 쇠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선조25) 이후 시작된 소빙기(小氷期)의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어려움도 차 문화를 쇠퇴시키고 떡차문화도 자연스럽게 소외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사천(私賤)으로 분류되는 “팔천(八賤)”이 있다. 첫째가 사노비, 둘째가 중(승려), 세 번째부터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마지막 여덟 번째가 공장(工匠)이었다. 이 사천의 대부분은 일종의 개인의 노예로서 주인들이 임의로 사고파는데, 황소 한 마리면 남자 다섯 명과 바꿀 수 있었고… 관가 노역에 승려들을 동원하고, 여승은 관청의 노비로 삼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죽하면 팔 천민 중에서도 두 번째로 승려를 꼽았을까. 이는 조선 중기에 억압을 견디다 못해 자구책으로 조직한 승려들의 비밀결사대인 당취(黨聚)의 실마리가 되었다(소설 다성초의. 김웅).

고려 말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辯)으로 배불론(排佛論)을 주장하여 왔음에도 무학대사가 조선 수도를 정하는데 공헌하는 등 조선 초에는 유불이 양립하여 왔으나, 조선 3대 태종(1400~1418)때 부터 대대적인 억불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는 고려 말 불교세력이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와 역성혁명에 방해가 되는 문벌 귀족과 스님들과 결탁하여 고려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언제라도 조선왕조를 위협할 수 있을 것이란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 이내 고려시대 때부터 이어 온 사찰과 승려에게 주어진 혜택이 철폐되고 사찰과 종파도 정리 축소되었다.

그렇지만 세조(1455~1468)는 억불을 완화하여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였고, 승려의 성내출입도 제한하지 않았다. 불사를 장려하고 부처의 공덕을 찬양한 <월인석보> 등을 발간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성종, 연산군, 중종의 문정왕후(1501~1565)가 섭정하면서 승과(僧科)를 다시 시행하여 조선 불교의 거승인 휴정(1520~1640)과 사명대사(1544~1610)를 등용시켜 법맥을 유지 시켜왔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흥불사업은 다시 억불로 되면서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기 시작하여 고종 32년이 되자 일본 승려의 도성출입 요구로 길이 열렸으나, 오래지 않아 나라가 일본에게 송두리째 넘어가고 말았다.

조선 사회전반에 걸쳐 불교가 억압 또는 탄압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여 왔던 것은 정치세력에 의한 적폐청산이었으나 불교계의 적잖은 폐단을 강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불교자체를 금지하고 신앙을 말살하려는 정치는 아니었다는 견해가 주도적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차 문화의 발전도 불교행사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어 불교와 운명을 같이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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