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동학농민군 장흥으로 집결
호남의 동학농민군 장흥으로 집결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8.1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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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강현 박사가 들려주는 장흥동학이야기(1)
성강현 박사

▶…이 글은 동학혁명의 전문가인 성강현 박사(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가 <울산저널>에 ‘해월 최시형 평전’의 주제의 기획특집으로 연재하고 있는 동학의 이야기 중 장흥 동학 관련의 글로, 2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1894년 11월 25일 태인 전투 패배 후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해산됐으나 전국에서 벌어진 동학혁명은 이듬해 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그중 하나가 석대벌 전투로 유명한 전라남도 장흥의 동학혁명이다. 장흥은 고부 기포 당시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부사로 재임하던 곳이기도 했다. 장흥에 동학이 처음으로 전파된 시기는 1860년대 중반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동학이 들어온 시기는 1890년대 들어와서였다. 동학혁명 당시 장흥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이방언, 이인환 접주는 1891년 입도했고 주변의 강진에도 동학이 전파됐다. 동학혁명기 장흥에는 대덕 대접주 이인환, 남면 대접주 이방언, 부산 대접주 이사경, 웅치 대접주 구교철, 유치 대접주 문남택 등이 있었고, 강진에는 김병태가 대접주로 있을 정도로 동학이 왕성했다.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장성의 황룡촌 전투에서 장태를 만들어 이두황의 경군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는데, 장태를 만든 장흥의 대접주 이방언을 장태대접주라고 불렀다.

이후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용계리 자라번지 이사경 접주의 근거지에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의 개혁에 나섰다. 이후 이방언의 근거지인 묵촌과 강진에도 집강소가 설치될 정도로 장흥 일대의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컸다. 9월의 재기포 소식을 접한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이방언을 중심으로 5000명이 운집했다. 이방언은 군사를 이끌고 논산의 대본영으로 향했으나, 이인환, 구교철 등 나머지 접주들은 장흥의 외곽인 사창, 웅치, 회녕, 대흥 등지를 중심으로 집결해 군세를 강화시켰다.
7월 30일 이용태에 이어 장흥에 부임한 박헌양(朴憲陽)은 유림들과 동학농민군 토벌을 모의했다. 그는 수성군을 편성하고 10월에 들어와서는 수성소를 설치해 동학농민군 탄압을 위한 대비를 갖췄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커서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한 채 민보군을 훈련시켰다. 나주부사 민종렬이 동학농민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들은 박헌양이 동학농민군을 강경하게 탄압하기 시작해 장흥 읍내의 동학도 일부가 체포돼 곤욕을 당했다. 10월 19일 벽사역 찰방과 장흥부사, 강진현감, 전라병사에서는 일제히 동학농민군 소탕에 들어갔다. 이렇게 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는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였다.
재기포 이후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은 11월에 이르면 수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여전히 장흥부 외곽 지대에 웅거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11월 25일에 대흥에서 이인환(李仁煥) 대접주도 기포해 세력을 더 확장시켰다. 전봉준의 부대가 연패하고 나주의 손화중, 최경선의 부대가 패해도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굳건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자 태인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의 잔류병과 광주, 나주의 동학농민군도 장흥으로 집결했다. 이방언 대접주도 전봉준 부대와 합류했다가 연패하자 장흥으로 돌아왔다. 금구의 김방서, 화순의 김수근, 능주의 조종순 대접주 등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장흥으로 모여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남평, 보성, 능주, 화순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은 모두 장흥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장흥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최소 1만, 많게는 3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장흥 동학농민군 벽사, 장흥, 강진 점령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탑. 1991년 장흥의 동학농민군 후손들이 중심이 돼 건립했다. 이 기념탑은 장흥의 석대들 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세웠다.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탑. 1991년 장흥의 동학농민군 후손들이 중심이 돼 건립했다.
이 기념탑은 장흥의 석대들 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세웠다.

 

 

 

 

 

 

 

 

 

 

 

 

 

 

 

 

 

 

 

 

 

 

 

 

 

 

 

장흥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12월 초에 들어와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은 벽사역, 장흥부, 강진현, 강진병영을 차례로 점령했다. 동학농민군이 공세를 편 이유는 나주를 공략하기 위해 먼저 장흥 일대를 점령해 근거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였다.
12월 1일 사창에 집결한 농민군들은 12월 3일 벽사역과 장흥부 인근까지 진출했다. 동학농민군은 4일 새벽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벽사관역으로 진격했다. 이미 역졸들은 도망치고 없어 동학농민군은 단숨에 벽사역을 차지했다. 벽사역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던 박헌양은 장흥부를 사수하기 위해 수성군을 다독였으나 사기는 이미 떨어진 상태였다. 다음날인 5일 새벽 동학농민군은 어둠을 헤치고 장흥읍성인 장녕성을 사방에서 에워쌌다. 동학농민군은 장녕성으로 진격해 북문을 무너뜨리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당황한 수성군은 달아나기 바빴고 전투를 지휘하던 박헌양은 동헌으로 들어갔다. 동학농민군은 1시간도 안 돼 장녕성을 장악했다. 부사 박헌양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에 의해 희생된 수성군의 수는 96명이었다.
장흥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12월 7일 새벽 강진현을 공략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동학농민군이 아침 8시경 안개를 이용해 성 밑까지 다가가자 관군 측은 소리를 지르며 동학농민군에 대항했다. 그러나 잠시 후 동학농민군이 포를 쏘아 대면서 “죄 없는 백성과 병졸들은 모두 성 밖으로 나와라. 만일 이속과 별포에 뒤섞이면 죽을지 모른다.”고 소리치자 병졸과 백성들은 대부분 흩어졌다. 그러자 동학농민군은 강진읍의 동문과 남문을 무너뜨리고 강진읍성을 차지했다. 이렇게 강진읍성은 1시간 만에 동학농민군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동학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다음 목표인 전라 병마절도사가 있는 강진병영으로 이동했다. 병영 공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력도 많았고 병사의 수준도 높았다. 그러나 장흥과 강진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병영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병영을 이끌던 수성장 방관숙과 도통장 윤권중은 제 살길만 찾는 무능하고 교사한 인물들이었다. 군무에 무지한 병사 서병무(徐丙懋)도 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뒷전에 물러나 있을 정도로 병영은 무질서했다.
동학농민군은 12월 10일 새벽 2시에 사방에서 진격해 병영성 동쪽의 세 봉우리를 점령했다. 그리고 병영을 향해 포격을 했고 병영에서도 밖을 향해 포를 쏘아 사방은 화염과 포연으로 뒤덮였다. 그러자 병영에서 피난민들이 일제히 밀려 나와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병사 서병무는 피난민 틈에 섞어 병영을 빠져나와 영암으로 도망쳤다. <오하기문>에 병사 서병무의 도피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서병무가 크게 놀라 소매 좁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해 가리개를 쓰고 옥로(玉鷺, 갓 머리의 옥 장식)는 떼어 감추었으며, 인부(印符)를 가슴에 품고 짚신 신발로 피난민과 섞여 성을 빠져나와 영암으로 달아났다.”

비록 병사는 도망쳤지만 우후 정규찬 등 남은 장교들이 독려하고 앞장서 동학농민군에 대한 저항은 이어졌다. 오전 10시경에 동학농민군은 목책에 불을 질러 병영을 불바다로 만들고 세 방향에서 함성을 지르며 병영을 공격해 들어갔다. 병사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접한 병사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대부분 도망쳤다. 동학농민군은 강진병영을 장악하고 화약고를 차지하려 했지만 감관 김두흡이 화로를 안고 화약더미로 들어가 폭사했다. 이로 인해 화약고가 폭발해 관군과 동학농민군 모두 피해를 입었다.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정오경에 동학농민군은 완전히 강진병영까지 차지했다.

1894년 장흥의 동학 열기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 전라도 각지에서 동학의 교세가 확장됐다. 장흥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흥의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김재계(金在桂)는 1894년 당시 7세로 아버지를 따라 동학혁명에 참여했다. 김재계는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1934년 <천도교회월보>에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1894년 봄 장흥의 동학 열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갑오년은 이제로부터 사십 년 전이다. 내가 일곱 살 먹던 그해다. 그해 봄부터 우리 마을에는 더욱 동학 열이 심하여 집집마다 청수단을 만들고 낮이나 밤이나 주문 소리가 흡사 글방에서 글 읽는 소리 같았다. 우리 어린 사람들도 삼삼오오 작반(作伴)하여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노래 부르는 것 같이 외우고 다녔다. 하루는 들리는 말이 접주 이인환 씨가 거정리 벌판에서 동학대모임을 한다고 한다. 어른은 물론이거니와 부인 아동들까지도 구경을 간다고 한다. 아버지도 가시고 삼촌도 가시고 할머니도 가신다고 한다. 나도 가겠다고 선두에 나와 섰다. 아버지 삼촌 할머니는 어린애들이 가면 사람 많은 속에 큰일 난다고 절대로 만류하시다 그래도 가겠다고 몸부림을 치다가 삼촌에게 호령까지 듣고 어머님의 손에 붙들려서 도로 들어갔다. 이 모임이 있자 사방에서 들리는 말이 접주 이인환 씨는 조화가 비상하여 앉아서 십여 장 되는 나무를 이리로도 뛰어넘고 저리로도 뛰어넘고 용도 되고 범도 되고 또 고읍면 송현리 등지에서는 시녀(侍女)가 나고 대선생이 나고 해서 뭇사람으로 하여금 개수정 돌바위 밑에 용천검이 있고 갑옷이 있으니 파라고 해서 날마다 사람이 구름 모인 듯하였다. 이런 소리 저런 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 또 한편에서는 소를 잡고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고 참으로 동학의 기분이 굉장하였다.

이렇게 동학의 열기가 왕성한 장흥으로 각지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이 모여들어 재기를 도모했다. 이방언, 이인환, 이사경, 백인명, 구교철 등 장흥의 대접주들은 이들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강진현, 벽사역, 장흥부, 강진병영을 점령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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