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인물(7)/천방 유호인(千放 劉好仁)-최종회
■ 역사인물(7)/천방 유호인(千放 劉好仁)-최종회
  • 김선욱
  • 승인 2019.08.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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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은 진정한 처사(處士)였다

학자로서 평생을 벼슬길에 나가기보다 초야에 묻혀 은둔한 선비를 처사(處士)라고 부른다.

천방이 특히 중앙무대에서 교유(交遊)했던 대부분의 학자‧선비들 중에는 처사가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선비가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었다.

반곡의 연기(年紀)에, “유 선생은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깨우치고(劉先生學於南冥曺先生)”, 반곡의 행상(行狀)에 “동향 사람 유호인 선생이 조남명 문하에서 득도하여(時同鄕, 有劉先生好仁 得道於曺南冥之門), 또 반곡집의 실기(實記)에도 ”어려서 마음 선생인 천방 유호인에게 배웠는데, 유호인은 남명 조식의 집우(執友)였다(少從鄕先生劉千放好仁學, 劉公卽曺南冥執友)(執友=듯을 같이하는 벗)“ 라고 기록돼 있듯, 천방은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조식의 벗이었다. 하여 남명 조식도 황강 유희안에게 ”천방 유호인은 나의 유익한 벗 (劉千放 吾益友)”이라고 했을 정도였다(‘천방선생문집’ 序).

이로 미루어 천방은 남명 조식으로부터 성리학은 배웠고, 특히 그의 선비정신을 배웠을 것이다. 하여 천방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처사로서 살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남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또 천방이 교유했던 선비들 중에 남명뿐만 아니라 구봉 송익필, 황강 이희안, 대곡 성운 등도 처사이기도 했다.

조선조 학자들의 본분이 무엇이었을까. 유학자로서 학문을 수학하면서 동시에 과거시험을 통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를 대표한 성리학자 남명은 벼슬길을 과감히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던 재야 학자로서 처사의 길을 걸었던, 조정에서 10여 차례나 벼슬자리를 주며 출사를 원했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지조와 의리를 지켰던, 조선조 대표적인 처사였다.

남명은 평생 두 개의 작은 방울을 그에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그 방울의 이름이 깨달을 惺자의 성성자(惺惺子)였다. 몸이 움직일 때 마다 울리는 성성자의 방울 소리로 혹시라도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스스로 경계와 반성을 그치지 않았던 남명은 일생토록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이른바 ‘선비 정신’을 실천했던 진정한 처사였던 것이다.

남명은 이황과 동갑으로 당대 성리학의 쌍벽이었다. 누구의 학문이 더 깊고, 누구의 인품이 더 고고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후대에 와 남명을 더 기리는 것은 남명은 이황이 생전에 그토록 원했지만 이루지 못한, 진정한 처사였기 때문이다

1572년 2월 남명 선생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에 제자인 김우옹이 스승의 사후 칭호를 무엇이라 할이지 묻자, 남명은 ‘처사(處士)’라 하라고 답했다. 그가 지향했던 삶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남명이 세상을 떠나기 전 1571년,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퇴계가 “내 비석에는 처사라고만 쓰라”고 유언했다는 말을 들은 남명이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라니, 평생 동안 출사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이라 했다고 한다.

미술평론가 유홍준도 “퇴계는 평생에 처사가 되기를 원하여 죽을 때 영정에 벼슬 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써주기를 희망했다지만 그는 처사 지망생이었지 처사는 아니었다(‘나의문화유산답사기 2’,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2007, 56면).고 적기도 했다.

또 유홍준은 ”옛 말에 이르기를 왕비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보다도 문묘 배향자를 낳은 집안이 낫고, 문묘 배향자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처사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고도 했다.

남명의 영향 탓이었을까. 천방도 천서로서 평생을 고고하게 보냈던 장흥의 대표적인 처사요 선비였다.

천방은 도백(道伯)의 천거로 두 번이나 침랑(寢郎-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토록 처사로서 삶을 고집하였다.

천방은 만년에 선영 아래 집을 짓고 뜰 가에 고목나무를 취하여 두었는데, 이름하여 신선옹(神仙翁)이라 하고, 그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詩)를 읊고 혹은 조롱하면서 호탕하게 웃으니, 가히 그의 풍취를 알 수 있다. 평일에는 시와 글을 지음에 비록 한가하고 느긋하게 읊지만 다 세도(世道)를 경계하고 풍자하며 심학(心學)을 경절(警節)하였다. 더욱이 후학을 가르침에 있어 게으르지 않았고 간절하며 소수(疏水)로 끼니를 잊지 못해도 평온하였다.

천방은 연하동 임천(林泉)의 요조헌(窈窕軒)에 기거하며 집안 좌우에 그윽이 쌓인 서책의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고 살았다.

도백이나 목사가 장흥 고을을 지날 때는 반드시 천방공을 먼저 방문하였으나 감히 병졸은 야박하지만 마을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以道臣薦 再除寢郞不就 …晩年築室楸下 取老槎置庭際 號曰 神仙翁 惑爲之酬 酌吟暎 惑爲之嘲謔笑傲 其寓意可知也 平日詩文 雖閒吟謾詠 皆諷箴世道 警節心學 尤惓惓於誨人不倦 蔬水不繼恬如也 所居煙霞洞 林泉窈窕軒 當幽夐左右圖書 樂以忘憂 方伯及牧牧守之過本邑者必先訪劉處士 而不敢以齒薄入洞門也-‘천방선생문집’, 추록2)

조선 시대 선비들이 가장 불리고 싶었던 호칭이었던, 제아무리 훌륭한 학자요 선비도 벼슬길에 오르면 불리울 수 없었던, 하여 조선조 최고의 학자로 불리던 이황마저 불리고 싶었던 호칭이던 처사. …그 ‘처사의 선비’로서 입지했던 이가 바로 천방 유호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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