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회령진성의 복원과 의의
■특별기고-회령진성의 복원과 의의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9.1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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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진성 사적지 지정, 복원 추진해야 한다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회령진성(會寜鎭城)을 복원해야 하는 중요함과 그 당위성을 피력하여 논(論) 하고자 한다.

茶 存 魏 聖
茶 存 魏 聖

구 한말의 동학과 문화유산을 말살하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의도로 그 흔적이 사라진 회령진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고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장소였으며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원균의 주도로 치러진 칠천량 전쟁에서 조선수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폐전을 한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자 선조는 급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 장군에게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차 임명하는 유지를 내리지만, 살아남은 수군과 전선은 뿔뿔이 흩어져 거느릴 군사도 없었다. 폐전에서 살아남은 수군은 서남해안으로 피하게 되고 칠천량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호남을 도륙하기 위해 남원성과 전주성을 침략하게 된다. 이때 이순신장군은 잠행을 시작하여 하동에서 곡성으로 구례로 다시 순천을 거쳐 승주로 그리고 보성 조양창에 도착하여 배설과 칠천량 전쟁에서 살아남은 군사가 장흥부(長興府) 회령진성에 피해 있다는 소식을 비로소 접하고, 보성을 거쳐 급하게 회령진성으로 향한다.

보성에서 회령진성으로 가는 길의 <난중일기> 내용을 보면, 직도(直到), 직왕(直往) 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회령진에 도착한 날(8월18일)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만조(滿朝:늦은 아침)에 도착 하였다고 적고 있다. 정말로 마음이 급했다는 표현으로 봐야한다.

<이충무공전서>에 회령진에 도착한 장군은 군사를 살피고 전선을 점검하며 여러 소속인 군대를 하나로 통일하여 다음날(8월 19일) 교서와 유서에 숙배하게 하고 삼도수군통제사에 취임을 하게 된다. 이곳에 모인 전선과 수군, 그리고 의병을 거느리고 다음 달(9월 16일) 세계 최고의 해전으로 기록되는 명량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회령진성은 그러한 역사의 현장이고 그 전초기지며 호남약무 시무국가(湖南若無 施無國家)의 단초였던 것이다.

2.회령진성

장흥부의 회령진성은 지금 보성군의 회천면 회령 폐현과 혼동하고 그 기록도 혼재되어 있다. 보성군의 회령폐현을 회령으로 부르고 있는 관계일 따름이다. 또 여러 지지(地誌)류에 장흥부 동쪽 60리, 남쪽 50~70리 등 거리 표시의 방향 착오로 회령폐현과 장흥의 회령진성이 뒤죽박죽 거론되고, 더불어 특히 부실한 사료 선택에 있다.

명종9년(1554년)에 보성군 회령면에서 장흥군 대흥면으로 옮겨 와서 회령진으로 개칭 했다는 <장흥지(1938년 戊寅誌)> 기록을 기초로 해서, 1989년 <장흥군 문화유적> 중 회령포의 관련 기록이 그렇다. 성종21년(1490년) 회령포진성이 축조되었다는 조선왕조 기록을 수렴해서 회령진성의 축조와 이설을 시간대별로 정리 하면서 명종 9년 이전에는 회령진성이 보성군 회천면에 소재하였고 성종21년에 장흥군 회령진에 축조 하였다고 하였다. 더더욱이나 지역 지리나 향토사를 잘 아는 그 지역의 학자가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외지 학자가 부정확한 사료나 잘못된 기록을 인용한 자료를 보고 모호하게 기술하므로써 생긴 오류가 그 지역의 향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례를 지금 장흥군과 보성군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사료는 잘못된 선택이며 그 이전의 기록인 <신찬팔도지리지 전라도조>, 1530년 <신동국여지승람> 등의 관찬 지리지와 가장 오래된 장흥부 향교 사찬 지리지 <정묘지(丁卯誌:1747년)> 등 모든 지지와 지도에 회령포의 위치를 장흥부 남거(南居) 50~77리로 기록 하였고,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移設) 사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한 호남읍지 중 <장흥도호부지>와 1872년 그린 <장흥부회령진지도>의 표제에 옛적 진(鎭)은 장흥부 동쪽 60리 떨어진 회령면 휘포리에 있었는데 장흥부 남쪽 60리 떨어진 대흥면 선자도로 옮겨서 옛 이름 그대로 회령포라 했다고 적고 있다.

회령진성의 내력을 자세히 적은 조선왕조실록에 태종6년(1406년) 1월에 장흥부 주포(장흥군 회진면)에 왜선 6척이 침범하여 병선 1척을 약탈하였고, 태종 8년(1408년) 11월에 왜적이 회령포(보성군 회천면) 입구에서 남녀 두 사람을 죽이는 등 약탈이 그치지 않아 왜구에 대응한 비변책으로, 세종4년(1422년) 회령포를 관할하는 지역의 수군 통수권자인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의 청을 받아들여 왜적이 침입했던 회령포에 본영의 군선 2척과 좌,우도의 군선 각 1척씩 차출하여 정박(碇泊-배가 닻을 내리고 고정시키는 것)하고 사변에 대비토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시행 된지 3년 후인 세종7년(1425년) 2월에 전라도 감찰사(全羅道 監察司)가 병조의 건의로 전라도 각 포(浦) 병선(兵船)의 이박(移泊-배를 옮기는 것) 편의에 대한 여부를 현지 시찰하고 보고서에 “회령포 만호의 병선이 머무르고 있는 소마포(召麻浦:보성군 회천면)는 조수가 물러가면 물이 얕아져서 병선의 출입이 용의치 못하다” 하며 비옥한 토지가 많고 왜적이 들어오는 첫 관문의 주포(周浦:장흥군 회진면)로 병선을 옮길 것을 청하므로, 지형의 이점과 방비의 편의를 위하여 주포로 이박하게 되었다.

이때 옮기면서 기존의 회령포 만호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고 장흥부에 두 개의 회령포가 출현하게 된다. 위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회령포 만호 병선을 처음에는 회령포진에 정박 시켰던 세종4년(1422년)에서부터 세종7년(1425년)까지 3년 동안은 장흥부 동쪽인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관내의 소마포(召麻浦) 포구에 정박(碇泊)하였고 이후 바로 장소를 옮겨서 장흥부 남쪽 지금의 장흥군 회진면 주포(周浦)에 정박하였으며 회령포 만호진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회령포진이라 하였다.

이후 성종16년(1485년)에서 성종21년(1490년) 사이에 국가가 안정되고 왜구가 잠잠해지자 회령포진성을 육지에 축성(築城)하여 현재까지 이르렀고 보성군 회령에는 축성된 만호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회령포진성(장흥군 회진면)은 정유년(1697년)에 이순신장군이 도착하여 삼도수군통제사에 취임한 장소며 남아 있는 전선과 수군을 모아 그 유명한 명랑해전의 전초지가 되었다.

3, 정묘지에 기록된 회령포진

關防: 會寜浦鎭; 在坊南海濱, 船(滄)〔倉〕甚(其)占便宜諸島, 在前環挹, 東控鹿島蛇島, 西連馬浦, 古今島, 新知島, 諸鎭屬右水營, 水軍萬戶一人, 武從四品, 軍官二十人, 장교六人, 鎭撫三十人, 通引十人, 使令十六名, 風高六朔, 每朔防軍四十名, 風和六朔, 每朔防軍八十名, 射夫十五名, 砲軍十五名, 能櫓軍五十餘名, 戰船一, 兵船一, 伺候船一, 城堞周一千九百九十尺, 高八尺, 內有三泉, ◇衛舍: 客舍, 軍營廳, 作廳, 使令廳, 將官廳, 通引廳, 軍餉元會.

관방(關防: 국경을 지키는 곳): 회령포진; 대흥방(장흥군 대덕읍) 남쪽 바닷가에 있다. 선박과 창고가 여러 섬에 편의를 제공하고 있고 앞바다를 갈고리처럼 당기고 있다. 동쪽으로 녹도와 사도를 당기고 있고 서쪽으로는 마포 고금도 신지도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회령진과 함께 우수영(1816년 장흥도호부지에는 좌수영에 속한다. 이렇듯 중간지점이라 좌수영에 속하기도 하고 우수영에 속하기도 하였다.)에 속한다. 수군만호 1인으로 무관 종사품이다. 군관20인, 장교6인, 진무(진鎭에서 일 보는 사람) 30인, 통인(통역) 10인, 사령16명, 바람이 높으면(가을 겨울) 육삭군사(1년 상번上番하고 2년 쉬는 군사제도를 육삭六朔이라 하고 1년 상번하고 1년 쉬는 군사제도를 이삭二朔이라 한다)는 매달 방군 40명이고, 바람이 온화하면(봄 여름) 육삭군사는 매달 방군 80명이다. 사부(활을 쏴는 병사) 15명, 포군 15명, 능노군(노를 젓는 병사) 50여명,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먼저 바다 바닥을 살피거나 지형을 조사하고 적의 동태를 살펴 신기전등으로 본선에 알리는 배) 1척이다. 성가 둘레는 1990척이고 높이8척으로 성에는 샘이 3개 있다. 위사(성을 지키는 집)는 객사, 군영청, 작청, 사령청, 장관청, 통인청이 있다. 군향미는 원회계부에 올라 있는 쌀로 한다(1816년 읍지에는 진의 터 좌향은 유묘(酉卯)이고 진내에 민호(民戶)가 220호가 기록되어 있다.)

4. 결론

역사를 잊고 사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역사가 주는 교훈은 미래를 정하는 방향타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적 현장의 배경이나 인물의 중요성을 따져 그 의미를 정한다. 국가적 운명을 바꾼 장소나 그런 인물이 관계 된 곳은 복원하여 그 의미를 되새기고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은 물론 영구보전 하여 민족의 유산으로 삼아야 한다.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사라질 운명에 놓인 역사적 현장의 복원은 우리의 숙명 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 의미의 현장에 있으며 그 의미를 모르면 자손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직무유기(職務遺棄)가 된다. 이와 같이 회령진성은 매우 중요하고 국가 존망에 해당 되는 발단지(發端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회령진성을 국가 사적지로 지정하고 복원할 것을 제안(提案) 한다. 역사현장은 그 당위성에 의해 성격과 품격이 결정된다. 현장복원은 또 다른 토목공사의 탄생이 아닌 철저한 검증과 그때에 쓰였던 재로로 거의 완벽에 가까 워야 한다. 그래야 의미가 있다. 조금 더디고 돌아가더라도 꼭 그렇게 해야 할 일이다.

덧붙일 말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에 남해에서 왜적을 맞아 수 없이 죽어간 이름 없는 백성의 혼을 달래기 위해(小庭 梁基洙 先生은 백의종군 비를 세울 것을 제안) 아주 큰 무명 비를 세웠으면 한다. 그래도 의병장이나 양반은 이름이 전하고 추모도 하고 있지만 그 시대 군역을 담당해 국가를 지킨 백성과 노비에 해당 된 사람은 선무공신록에 그 이름이 올랐을 지라도 후손이 끊어지거나 상민(常民)이어서, 또 주인 따라 참전해 스러져간 이름 모를 영혼은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지명 받음 없이 제사 밥 한번 받아먹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데 지금의 우리가 달래야 할 빚이 있음을 이 비를 세워 기리는 것이 타당 할 것 같아 제언(提言) 한다.

〈참고문헌〉

정묘지( 대흥방 번역 溫山 魏義煥)

(1938년 무인지)

문화유적(1989년)

(이순신)

전서 행록

장흥도호부 수군 만호진 회령포 연구(호남문화연구:이병혁 박사)

(재인용)

회령진 지도(1872년)

지리지(재 인용)

(재 인용)

팔도 지리지 전라도 조(재 인용)

동국여지승람(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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