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사 창건설화’ 바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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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2.1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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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문화관광해설사

그동안 보림사 창건설화는 원표스님이 인도 보림사와 중국 보림사를 창건하고 한국 보림사를 창건했기에 우리 고장에 자리하고 있는 보림사를 동양 3보림사 중 하나라고 홍보하고 있다.

장흥군과 문화관광해설사는 관광객에게 정확한 내용을 알려줄 책무가 있다.

■원표스님과 보림사

원표스님은 중국 지제산에서 50여년간 수행하면서 천관보살에게 예배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화엄종 스님이었으며 755경 귀국하여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사’를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원표스님은 천관보살 상주처로 알려진 중국 푸젠성(당시 복건성) 지제산 아래 나라연 석실에 머물면서 개울물 마시고 나무열매를 먹으며 수행을 했다.

「보림사 사적기」에 원표스님은 귀국하여 인도와 중국에 있는 보림사 지세와 닮은 곳을 찾아 절을 창건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중국 지제산(곽동산)에는 보림사가 없었다.

「보림사 사적기」에 원표스님이 인도와 중국에 보림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이런 내용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이라기보다는 그냥 보림사라는 정체성을 계승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찰이라고 해서 반드시 일정규모의 건물로 이루어진 것만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보림사 사적기」에서 원표스님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보림사는 중국 보림사와 인도 보림사를 묘사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동국대학교 김상현교수는 천축과 중국에 보림사를 창건했다는 「보림사 사적기」내용에 대해 수긍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밝혔다.<자료출처: “신라 화엄사상사 연구”(서울 민족사,1991년 P.151)>

■ 「보림사 사적기」에 근거한 창건설화

신라의 유명한 원표스님이 인도에 있는 보림사를 거쳐 중국 보림사에서 참선하던 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스님은 신라로 돌아와 서기가 어린 곳을 찾아 전국의 산세를 살피다가 가지산에 머물러 암자를 지었다.

어느 날 암자에서 참선을 하는데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났다. 이에 누구냐고 물으니 “방장산 제일봉에 사는 천왕의 딸 성모천왕 선아(仙娥)입니다. 저도 이곳의 터가 좋아 온지 여러 해 되었으나 연못에 아홉 마리 용이 판을 치고 있으므로 스님도 살기가 힘드실 것입니다. 부처님의 원력을 가진 스님께서 용을 쫓고 그곳에 절을 짓되, 제가 살 수 있는 조그마한 거처를 마련해 주십시오,“하고 호소했다.

원표스님은 이 말을 듣고 연못에 부적을 던져 용을 내쫓았으나 다른 용은 다 나가는데 백룡이 홀로 끈질지게 버티었다. 원표스님이 열심히 주문을 외웠더니, 마침내 백룡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못에서 나와 산기슭을 갈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의 꼬리에 맞아 팬 자리가 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연못자리를 메워 너무 크지도 질박하지도 않게 절을 지어 가지산 보림사라는 편액을 달았다.

그리고 선아 원에 따라 따로 작은 집을 지어 가람 옹호신으로 삼고, 이 집을 괴화당(魁畵堂)이라 이름 짓고 당초 있었던 연못의 물줄기 하나를 남겨 작은 돌을 쌓아 구덩이를 만들었더니 그 깊이가 어찌나 깊던지 들여다 볼 수 없어 덮개돌을 만들어 비밀스럽게 했다.

이 내용은 1457년~1464년 기록한 「보림사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다.<자료출처: 보림사(P.20~21), 최인선외 2명, 2003년>

■중국 조계산 보림사 연혁을 기록한 조계통지(曹溪通誌)

중국 혜능 조사가 주석했던 중국 보림사(광동성 슈저우 마폐진 곡강현 조후촌) 연혁을 기록한 「조계통지(曹溪通志)」에 의하면 보림사 창건과정은 다음과 같다.

502년 인도스님 지약삼장(智藥三藏)은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에게 예배하기 위해 북상하던 중 조계(曹溪)를 지나게 되었다. 그는 목이 말라 두 손으로 조계(曹溪)의 물을 떠먹게 되었는데 그 물이 달고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사방을 둘러보니 산세가 기묘하여 예사로운 곳이 아니었다. 지약삼장(智藥三藏)은 그곳이 절터임을 느끼고 자신이 지나간 170년 후 이곳에 매우 훌륭한 승려가 불법을 전할 것을 예언하였다.

504년에 보림사가 창건되고 중국 양나라 황제 무제가 내린 절 이름으로 혜능(慧能: 638~713)은 677년부터 조계산 보림사에서 선종(禪宗)을 전수했다.

그후 당나라 중종 때 705년 중흥사(中興寺), 그 이후에는 법천사(法泉寺)로 개칭하였고 송나라 968년에는 남화선사(南華禪寺)라고 이름 한 이후 현재는 남화사(南華寺)라고 부른다.

절의 오른쪽 뒤에는 맑고 풍부한 수량의 탁석천(卓錫泉-속칭 구용천(九龍泉)이 있는데 혜능대사가 이곳에서 가삼(옷감)을 빨았다고 한다. 이것도 보림사 창건 설화의 아홉 마리 용을 떠올리게 한다. <자료출처: 계미향, 고구려 원표의 『화엄경』 나래 고찰(동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P.122) 2012년>

■ 중국 보림사 창건설화

중국 남선종 비조 혜능대사가 머물렀던 중국 쑤저우 조계산 보림사 창건설화를 근거한 「법보단경」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보림사는 예전에 인도의 지약삼장법사가 와서 조계曹溪)의 입구를 지날 때 물을 떠 마셔보고 그 향기롭고 아름다운 맛이 보통과 다름을 알고 따르는 무리에게 말하기를 “이 물은 인도의 물과 다르지 않다. 이 냇물의 상류에는 필시 좋은 땅이 있어 사찰로 지을 만한 곳이다”하고는 흐름을 따라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산과 물이 서로 감아 돌고 산봉우리가 빼어났으므로 감탄하여 “인도의 보림사와 같구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조후촌에는 살아가면서 도를 얻은 자가 숲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이름을 보림(寶林)이라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쑤저우 목사 후경중은 임금 양무제에게 청을 하여 보림(寶林)이라는 사액을 받고 절을 지어 낙성하였다. 이 내용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 광동성 슈저우 보림사 도량은 혜능(638~713)이 머물기 전에 이미 창건되었고 특히, 원표스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신라시대 중국에서 한반도에 일방적으로 전래된 산스크리어(범어)로 집필된 『화엄경』 80권은 화엄종 뿐 아니라 선종(禪宗)의 중요한 교리가 되었고 그 영향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표스님은 755년 경덕왕 요청으로 귀국하여 개혁정치에 도움을 주웠다. 그래서 보조선사 영탑비문(보물158호)에 “원표대덕은 법력으로써 정치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759년(경덕왕18) 왕이 특별히 명하여 장생표(長生標)기둥을 세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생표(長生標)기둥은 사찰의 영지(領地)를 표시하기 위하여 사찰주변에 세웠던 표시물이다. 1457년부터 1464년 사이에 기록된 현존하는 「보림사 사적기」는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학계에서 평가받았지만, 지은이를 밝히지 않았다. 「보림사 사적기」의 보림사 창건설화 일부 내용은 사실을 과장하거나 미화했음을 살펴보았다.

원표스님은 80권 『화엄경』을 구하기 위해 젊은 나이에 신라를 떠나 해로로 남중국, 동남아시아, 스리랑카, 인도, 서역의 여러 지역을 지나 『화엄경』 발상지 우전국(현 중국 신강성 화전현)에서 화엄경을 얻어 남중국 복건성 영덕현 지제산(곽동산)에서 50여년간 천관보살신앙의 화엄수행을 했을 뿐 선종의 근본 도량인 중국 보림사에서 머무르지 않았으며 중국 보림사를 창건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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