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물/조선조 의병장 김응원
■고대인물/조선조 의병장 김응원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7.2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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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의병장- 수많은 병사 위장으로 왜군 물리쳐

장흥읍 금안리 ‘김응원 각왜비’-전남 문화재자료 지정

글 김희태/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오우당(五友堂) 김응원(金應遠,1569∼1638)은 장흥읍 평장리 2구 금안 마을에서 선조 3년(1569, 기사)에 경주 후인 교리 김희련(金希鍊,호 石靑)과 청주 한씨와의 사이에서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 응전(應全)이라 하다가 응원(應遠)이라 하였다. 호는 오우당(五友堂), 자는 이구(而久), 본관은 경주이다.

5세에 부친상을 당하니 슬퍼하기를 어른과 같이 하고 모부인을 섬김에 20년을 하루 같이 하여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고 시탕(侍湯)을 지성을 다하였다.

인진왜란기에 김응원은 형 김응규(應虬)와 함께 1595년(선조 28) 의병을 모아 도고동(道高洞, 금안마을 뒷산)에서 훈련을 하였다. 마침내 왜구들이 쳐들어오자 중과부적인지라 직접 부딪치는 것을 피해 색다른 작전을 세웠다.

먼저 수천 개의 등을 도고동 뒷산에 매달고 마을 사람들을 매복하게 했다. 그리고 왜군이 쳐들어오자 일제히 큰 함성을 지르게 하여 많은 수의 의병이 매복해 있는 것처럼 꾸미자 왜군은 달아나버렸다고 전한다.

이에, 나라에서 벼슬이 내리니 침랑(寢郞)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갑자년 이괄의 난 때도 김응원은 장흥 창의도유사(長興 倡義都有司)가 되어 병사를 모집하고 식량을 모아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다가 적장(賊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공이 왜군을 물리쳤던 금안동 뒷 골짜기 도고동(道高洞) 바위에 왜군들이 놀라 물러갔다고 하여 ‘물리칠 각(卻) 자’를 써서 ‘각왜동(卻倭洞)’이라 새기게 하였는데 그 자획이 아직도 뚜렷하다.

여기서 새겨진 각자 즉 却은 卻의 속자이다. 바위에 새긴 글씨를 보면 ‘卻’으로 쓰여 있다. 한자 크기가 25㎝ 정도 된다. 그리고 이 마을의 이름을 ‘도의고사(道義高士)의 거처’라는 뜻에서 도고동(道高洞)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영이재 위문덕(魏文德, 1704~1784, 존재 위백규 부친)이 행장(五友堂金公(應全)行狀)을 지었다.(위문덕 문집에 나오는 김응원의 행장이 각왜비문의 내용이 비슷하다. 그리고 각왜비 제작 이전에 위덕문이 행장을 지어 문집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각왜비문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각왜비 전면
각왜비 전면

김응원은 인조16년(1638) 70세를 일기로 고장을 지키다 세상을 떠났다.

김응원은 예남사(汭南祠)에도 배향되어 있다.

평장리에 있는 예남사는 1935년 설단(設壇)하여 1947년 강당 건립, 1974년 사우를 건립하여 김세우(金世佑), 김희련(金希鍊), 김응규(金應虬), 김응원(金應遠), 김유길(金惟吉) 등 경주김씨 일문 5위의 학덕과출절을 기리고자 박산 밑에 후손 삼우당(三友堂(삼우당) 김병용(金炳庸)의 노력으로 설단하여 매년 9월 15일에 향사해 오고 있다. 예남사에는 사당 등 6동의 건물이 있다.

김응원 각왜비- 전남문화재 료 지정

올해 전남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장흥 김응원 각왜비’는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김응원(金應遠,1569~1638)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883년(고종 20) 김원주가 글을 지어 세운 의병장 행적비다.

김응원 각왜비는 국난을 극복한 원동력인 의병활동의 과정을 알 수 있고 향촌사회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기록유산이다. 특히 국난 극복의 원동력인 의병장의 행적비여서 의병의 모집과 훈련, 왜군과의 접전 전략, 호란의 거의과정, 향촌사회에서의 생활과 후손 등에 대한 기록유산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

김응원 각왜비는 그동안 장흥군 문화재 5호로 지정되어 있었다가 지난 4월 13일 전라남도문화재위원회 1차심의에서 지정 통과되고 이후 특별한 이의신청 없이 30일이 경과되면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전남 문화재자료로로 확정되었다.

각왜비 후면
각왜비 후면

►문화재명 : 장흥 김응원 각왜비(長興 金應遠 卻倭碑)

►소재지 : 전남 장흥군 장흥읍 평장리(금안마을) 602-1

(N34°38′13.9″ E126°52′22.8″)

►수량 : 1기

►크기 : 높이 196cm 너비 59cm

►시대 : 조선시대(1883년, 고종 20)

►소유자 : 경주김씨 두계공파 장흥종중

►관리자 : 경주김씨 두계공파 장흥종중

▲각왜비 후면 탁영문(한국금석문대계[조동원편] 인용)
▲각왜비 후면 탁영문(한국금석문대계[조동원편] 인용)

■각왜비(국역문)

<조선국 성균관 생원 행 참봉 경주 김공 각왜비>

공의 휘(諱)는 응원(應遠)이고, 자(字)는 이구(而久)이며, 호는 오우당(五友堂)이다. 아버지의 휘는 희련(希鍊)이며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여섯 읍을 다스렸으며 마지막에 교리(校理)와 관서평사(關西評事)에 이르렀다. 조부의 휘는 익환(益煥)으로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선비(先妣)는 괴산최 씨(槐山崔氏)인데 융경(隆慶) 3년 기사년(선조 2, 1569년) 3월 1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자품이 뛰어나고 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조금 장성하여 기국(器局)이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판관공(判官公) 응규(應虬)와 함께 수천 명을 거느리고 토구동(菟裘洞)에 들어가 밤에는 치를 설치하고 나무를 엮어 불을 지르고, 낮에는 나뭇가지 끝에다 병사처럼 보이게 위장해 놓고 동네 바깥을 둘러치니 왜구(倭寇)가 대군(大軍)이 주둔한 것으로 의심하고서 결국 감히 가까이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이에 의지하여 살 수 있었다. 부백(府伯, 장흥부사)이 병영(兵營, 전라병마절도사영)에 이 사실을 알려 조정에까지 전해져 침랑(寢郞)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부백이 그 동네에 나아가서 계곡의 바위에 ‘각왜동(卻倭洞)’ 세 글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뚜렷하다.

갑자년 이괄의 난 때 공은 장흥 창의도유사(長興 倡義都有司)가 되어 병사를 모집하고 식량을 모아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다가 적장(賊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공의 나이가 68세였는데 연로하고 병이 들어 떨치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킨 제공(諸公)에게 시(詩)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에, “오랑캐의 먼지로 눈을 가리니 여러 고을이 바람에 쓰러지듯 하는구나. 칠십 된 늙은이가 어찌 공을 세울 수 있으랴. 위대하도다 군웅(群雄)이여 바로 이곳 호남에서 나왔도다”라 하였다. 공은 판관공과 함께 거처하며 한솥밥을 먹고 자리에 누워서도 칼을 두들겨 기운을 북돋았으니 그 기세를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 동네에 정사(精舍)를 짓고 오우당(五友堂)이란 편액(扁額)을 걸었으니, 오우(五友)란 소나무와 매화, 대나무, 국화와 자기 자신을 말한다. 옛날엔 토구동(菟裘洞)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도고(道高)라고 하니 아마도 공의 도(道)가 높아서(高)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

배(配) 안동권씨(安東權氏)는 후사가 없어서 형의 아들을 데려와 후사로 삼아 계양을 했으니 휘가 천길(天吉)이다. 무인년(인조 16, 1638년) 2월 28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했다. 이제야 다듬어 하나의 비를 겨우 세우고 명을 약술한다. 사실에 따라 오직 우리들 후예들은 이를 보고 흥감하여 길이 빛나고 광대하게 아름답고 참으로 기뻐할 일이도다.

-1644년 갑신(인조 22) 뒤 네 번째 계미년(고종 20, 1883년) 3월 15일 7대손 원주 삼가 짓다.

■각왜비(원문)

有明朝鮮國成均生員行參奉慶州金公卻倭碑」

公諱應遠 字而乆 號五友堂 考諱希鍊 中大小科 歷宰六邑 終至校理 及關西評」事 祖諱益煥 行直長 妣槐山崔氏 隆慶三年己巳三月十八日生公 公生而聰穎性」 又至孝 稍長器局超邁 壬辰倭變 與兄判官公諱應虬 率數千人 入菟裘洞 夜設雉」尾炬散綴樹梢 晝置疑兵以環洞外 倭寇疑有大兵屯結 不敢逼人 皆附之賴以全」活 府伯報營 轉達于朝 特除寢郞 府伯就其洞 刻郤倭洞三字于磎石 至今完然 丁甲」子适變 公爲長興倡義都有司 募兵聚糧 赴 行在 聞賊授首而止 當丙子亂 公年六」十八 老病不能振作 詩送于倡義諸公 有曰 胡塵蔽目列郡風靡七十老翁更何所」望偉哉羣雄出此湖南云云 與判官公共居同㸑 每於枕上擊釼作氣 其氣槩可想矣 結」精舎于其洞 扁號五友堂 五友者 松梅竹菊我 古昔莬裘洞今稱道高者 盖以公之道高而」然也 配安東金氏 抱恙無嗣 取兄子爲繼養諱天吉 戊寅二月二十八日卒于正寢 今整一碑」纔銘略于事實惟我 後裔觀此 興感永孚 于休幸甚」

崇禎甲申後四癸未三月十五日七代孫 元柱謹識 」

(기호 ‘」’는 비문에서 행이 바뀐 곳)

○현황

김응원 각왜비는 정면·측면 각 1칸의 비각 안에 있으며 토담으로 둘러쌓여 있다. 비신 높이는 125cm, 너비는 44cm이며 비갓을 갖추고 있다.

전면에는 <유명조선국 성균생원 행참봉 경주 김공각왜비(有明朝鮮國成均生員行參奉慶州金公卻倭碑)>라 음각으로 새겨 있고 후면과 옆면에 비문이 있다.

비문은 김응원의 7대손 김원주가 지었다. 내용은 김응원의 행적과 임진왜란기의 활동에 대해서 쓴 것이다. 마을 안쪽에 ‘郤倭洞’ 암각문이 있다.

▶참고문헌 : <五友堂金公(應遠)行狀>(『영이재집(詠而齋集)』, 위문덕), 『장흥읍지 정묘지』(1747년, 장흥향교), 『경주김씨족보』(1758년),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1800년 편찬), 『한국금석문대계』1(조동원, 원광대학교출판국, 1979), 『장흥군의 문화유적』 (1989, 목포대박물관·전라남도·장흥군), 『장흥지방의 유교유적』(이해준, 장흥군의 문화유적, 목포대박물관, 1989), 『광주·전남 오란 충의사록』(광주전남 충의사현창회, 1992), 『장흥군지』(1993, 장흥군), 『향토인물열전』 (장흥군·장흥문화원, 1995), 『문화유적분포지도』,후면

▲각왜비 후면 탁영문(한국금석문대계[조동원편] 인용)
도고동골짜기에 새겨진 각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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