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장흥인의 사표 되는 장흥 위인의 선비정신
■사설-장흥인의 사표 되는 장흥 위인의 선비정신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8.14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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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霧溪) 선생의 그 공익정신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한다. 덕지(德地)‧복지(福地)로 불리울 정도로 산고수려한 장흥의 땅, 전남의 최남단부에서 유일하게 근 7세기 동안 부사고을로 입지했던 장흥 역사에서 그 찬란한 역사적 전통에 걸맞게 수많은 위인이요 명인명사들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우리가 흔히 위인이라고 하면, 평화시대에는 덕인(德人)이요, 학문적 업적이나 걸출한 관료로서 위명을 떨친 인물과 국란 때 의병으로 순직하거나 국란극복에 위명을 떨친 분들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장흥 역사에서 위인은 평화시대의 위인들이 더 많았다.

통일신라 때 오늘날 한국 대표 불교종단인 조계종의 시원이던 구산선문 종찰인 보림사를 개창한 보조선사 체칭(體澄.804-880)을 첫번째 장흥의 대표 위인으로 꼽을 수 있다.

고려조와 조선조 초에는 장흥임 씨와 장흥위 씨, 장흥마 씨 가문에서 수많은 위인들이 배출되었다. 장흥임 씨로 고려조 인종 왕비 공예태후(1109-1194)를 비롯 재상반열에 오른 임의, 임원숙, 임원후 등 10여 명의 임 씨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장흥위 씨로 대문신이요 대문장가인 위계정(魏繼廷, ?~1107), 240여 편의 시를 남긴 원감국사 위원개(魏元凱,1226~1293) 등이, 장흥마 씨로 조선조 초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낸 마천묵(馬天牧,1358~1431) 등이 있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장흥 고문학(古文學)의 선구자요 성리학자였던 천방 유호인(劉好仁,1502~1584), 한국 기행가사문학의 효시 기봉 백광홍(白光弘,1522~1556), 대문장가였던 옥봉 백광훈(白光勳,1537년~1582), 호남의 4대 실학자로 위명을 떨친 존재 위백규(魏伯珪,1727년~1798), 장흥동학혁명 때 남도장군으로 유명했던 이방언(李芳彦,1838~1895) 등이 위명을 떨친 장흥의 위인들이었다.

국가위란인 임진란(정유재란)과 병자호란 때는 의병장으로 창의하거나 순직했던 위인들이 많았다. 대표적 인물로 반곡 정경달을 비롯해 풍암 문위세와 문기방, 마하수, 정명세, 위대기, 김응원 등이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는 정노수, 위석규, 김재계, 무계 고영완 등이 독립운동가로 활동, 장흥의 위인 반열에 올랐다.

근대사가 시작된 해방 전후에 최옥삼 가야금유파를 탄생시킨 음악가 최옥삼을 비롯, 초대 전남대학교 총장 최상채 박사, 한국 문학박사 1호 김두헌 박사 등이 위명을 떨친 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굳이 거명하지 않았지만, 더 많은 명인 명사들이 당대에 위명을 떨치고, 찬란한 위업을 일구었다. 이 선인들은 끊임없는 탐구정신과 부단한 노력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문장(문학)을 익히고, 탁월한 지혜와 경륜으로 범상치 않은 특별한 행적을 일구며 자기 일생을 빛내고 향토와 후인들에게 모범을 남기고 삶의 위대한 지표를 남긴 분들이었다.

고대 때 인간의 지고한 가치는 선비(군자)정신이고 선비정신을 투철히 실행한 선비였다. 선비(군자)는 한 마디로 불의‧부정과 타협하지 않고 인(仁, 덕행)을 추종하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위인들 중에 선비로서 모범적인 지표를 남기기도 하거나, 당대의 학문(유학, 성리학 등)의 궁구에 매달리며 뛰어난 업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덕행이며 당대의 최고의 가치인 인(仁)을 실천한 위인, 즉 군자의 도리로서 후학이나 독지행(篤志行)이나 구휼행(救恤行), 지금 같으면 ‘더불어 살기 위한 베품행’에도 큰 관심을 갖는 위인이 더러 있었다.

주지하디시피, 공자의 지고한 가치는 인(仁)이었다. 하여 공자는 “인(仁)이란 내가 이룬 것은 남도 함께 이루도록 해주고, 내가 아는 것은 남에게도 알려줘 함께 하는 것이다. 내 주변에서 ‘함께 하기’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게 ‘인’을 이루는 방법인 것이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고 강조했다.

전국시대,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도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에서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君子有三樂),천하의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넣지 않는다(而王天下不與存焉),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번째 즐거움이며(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고(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며, 이른바 후학과 교육을 세지 즐거움의 하나로 정의하기도 했다. 즉 맹자는 세번째 즐거움으로 자기가 갖고 다른 것(학식)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 즉 자기의 학식을 혼자만 영위하는 게 아니라 남과 공유하는 일을 군자의 도리로 설파한 것이다.

지난 호 본란에서, 논자는 역사상 위인 중 더욱 평가받을 수 있는 위인으로, 선비로서 자기 학문의 궁구는 물론 후학의 양성과 당대의 사회발전을 위한 공익정신을 실행한 분들이고, 이러한 위인이야말로 진정으로 후인들에게 본보기요, 사표(師表)가 되는 분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인으로 후학 양성에 주력한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과 무계 고영완 선생을 지적한 바 있다. 천방공 외에도 유학자 이민기(李敏琦, 1646∼1704)도 생원 시절에 지금의 사학기관이던 서원 설립(고암서원) 등 후학 양성에 주력한 위인이었다. 한말 때 장평 두봉리 출생의 의금부사 전상률(全相律,1887∼?)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정노수(丁魯壽, 1877∼1965)도 흉년 때 가난한 집에 구휼미를 나누어주고(전상률), 식량이 없어 굶고 있는 이웃들에겐 자기 집 식량을 나누어 주고, 부자들에게 굶주린 이웃들을 돕자는 격문을 돌려 모은 쌀을 이웃들에게 분배해주는(정노수) 등 독지가로서 구휼운동을 실행한 위인이었다. 의사 최기현(崔琦炫,1913∼1995)도 해방 이후 평생을 지역의 환자 치료와 지역교육, 이웃 구휼에 헌신한 의인이었다.

그리고 지난 호 본란에서, 논자는 장흥의 근현대사에서 일신의 명예의 성취뿐만 아니라 지역민을 위한 후학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공헌한 대표적인 위인으로 무계(霧溪) 고영완(高永完)을 언급한 있다.

선생은 정치가였을 때는 결코 불의‧부정과 타협치 않는 기개 있는 신념의 정치가였으며, 향리에서는 지역의 후학 사업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헌신한 교육자요, 독지가였다.

무계 선생이 농촌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1,600평의 전답(현 시가 8억원 상당)을 희사하였을 때, 당시 집안의 경제사정이 막내아들을 대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큰 아들이 언젠가 무계에게, 당시 집안 형편이 아들의 학업을 중단할만큼 어려웠는데, 왜 마을에 전답을 희사하였느냐고 묻자, “더불어 잘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공유와 나눔이 절실히 요구되는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서, 우리 모두에게, 한 시대를 빛낸 선인들의 학문 궁구의 정신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인(仁)을 베풀던 선비정신, 특별히 지역민을 위해, 지역사회를 위해 나눔과 베품으로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무계의 그 인(仁)의 선비정신’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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