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文人(1) : 옥봉 백광훈의 생애와 문학(上)
■‘문림의향’-文人(1) : 옥봉 백광훈의 생애와 문학(上)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8.27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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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인 교수)

백수인(白洙寅, 조선대 교수)

▶…장흥 안양면 기산리 출신으로 기봉 백광홍의 아우이지만 어렸을 때 해남으로 이거했던 대문인. 최경창·이달과 함께 삼당파(三唐派) 시인으로 불렸고 이산해·송익필·최경창·최립·이순인·윤탁연·하응림 등과 함께 조선 최고의 문장인 팔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는 칭송을 들었던 대시인이었다. 시인 백수인(조선대학교 명예교수)씨의 선생에 대한 생애와 문학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1. 서론

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 1537-1582)은 16세기 조선조의 뛰어난 시인이다.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시대에서의 시는 사대부들의 성리학적 이념이나 철학을 표현하는 재도(載道)나 풍교(風敎)의 도구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조선조 초․중기 시인들은 소동파(蘇東坡)와 황정견(黃庭堅)의 시를 숭상하는 오로지 ‘송풍’(宋風)에 젖어 있었다.(許均, 「鶴山樵談」: “本朝詩學, 以蘇黃爲主,...”/李晬光, 「芝峰類說」: “我東詩人, 多尙蘇黃, 二百年間皆襲一套”). 당시 문학계의 주류를 이룬 송풍의 시란 논리적, 이성적, 주지적 시관에 입각한 문학이었다.

그러나 선조 무렵에 와서는 조선의 문학 풍조가 일대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계속되는 사화와 당쟁으로 인해 정치는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임진왜란의 병화까지 겹친 어두운 시대가 계속되자 사대부 일각에서의 반성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 것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이 때 옥봉은 200여 년 동안 이어 온 시적 전통인 ‘송풍’(宋風)의 시를 배격하고 ‘당풍’(唐風)의 시를 개척하여 조선사회에 새로운 문학적 지평을 열기 시작했다. ‘송풍’의 시가 교훈성을 중시한 경직성이 우세한 고전적 사조였다면, ‘당풍’의 시는 서정성을 중시한 유연성이 우세한 낭만적 사조라고 할 수 있다. 당풍의 시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로서 감성을 위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당풍시를 선도적으로 이끌어 온 옥봉을 후에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 손곡 이달(蓀谷 李達 1539-?)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하여 그의 문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任相元,「蓀谷集序」:“當穆陵朝, 有稱三唐集者, 謂崔孤竹慶昌, 白玉峰光勳, 李蓀谷達也)

이 글은 조선시대 시인 옥봉 백광훈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옥봉의 시문학에 대한 새로운 평가나 해석을 제시하기보다는 기존에 이루어진 여러 연구와 평가를 바탕으로 그의 생애와 교유 관계를 살펴보고, 그의 시문학적 특질을 개괄적으로 살피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2. 생평과 교유 관계

(1) 생애

옥봉선생 영정

옥봉은 1537년(중종 32년) 10월 22일 전라남도 장흥의 사자산 기슭 기산 마을(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460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원 백씨의 중시조 창직(昌稷)으로부터 20세(世)이며, 아버지 백세인(白世仁)과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3남 2녀 중 3남이다.

그의 조상 중 12세인 백장(白莊)은 고려 말에 보문각 대제학으로 있었는데, 고려의 사직이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서게 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표명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태조는 백장을 충청도 해미(海美)로 귀양 보냈다. 나중에 태종이 귀양살이하고 있는 그를 다시 불렀으나 그 때도 역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또다시 전라도 장수(長水)로 유배시켰다. 그러던 중 옥봉의 고조부 대에 이르러 전라도의 남녘 장흥(長興)으로 이주하여 사자산 밑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옥봉이 태어나서 자란 이 마을에서 조선 중기에 명성 높은 문인이 한꺼번에 여덟 명이나 배출되었는데 이들을 ‘기산 8문장’이라 불렀다. 이른바 ‘기산 8문장’ 중 옥봉의 형제가 네 명이어서 한 가문의 4문장(一門四文章)으로 칭송을 받았다.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이란 옥봉을 비롯하여 그의 친형 기봉 백광홍(岐峰 白光弘-)((1555년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 趙潤濟, 韓國文學史(탐구당, 1971, p.175. pp.199-200)를 비롯하여 金思燁의 李朝時代의 歌謠硏究, 김동욱의 國文學槪說 등의 서적과 각종 백과사전 등의 사전류, 해남문화원 홈페이지(http://culture.haenam.info/) 등에서 관서별곡의 작자를 옥봉 백광훈으로 서술한 것은 오류이다. 또한 옥봉에 관한 각종 연구 논문에서 옥봉 백광훈을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최립(崔笠), 이순인(李純仁),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혹은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조선 ‘팔문장’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두 번 모두 백광홍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풍잠 백광안(風岑 白光顔)과 사촌형 동계 백광성(東溪 白光城)을 두고 이른 말이다.

옥봉은 7세 때부터 시를 지었는데, 11세 때(1547년, 명종 2년)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엔 학동들의 시 공부를 위해 시의 초장을 부르면 종장을 답하는 ‘초․종장 놀이’라는 게 있었다. 어느 선배(金永國, “玉峰 白光勳의 詩 硏究”, 원광대 대학원 박사논문, 1994. 13쪽에서는 이 사람을 후에 손위 처남이 된 정원鄭遠으로 짐작하고 있다.)가 ‘春’를 불러 고시(古詩)로 종장을 답하라고 하자, 옥봉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江花樹樹春”이라고 대답했다. 그 선배가 그런 시구는 없다고 하자 즉석에서 전편을 외웠다.

“저녁놀 비낀 강에 피리소리/가랑비 속 강 건너는 사람 있네./남은 울림 아득히 간 곳 없고/강가 꽃나무마다 봄이 왔구나 夕陽江上笛 細雨渡江人 餘響杳無處 江花樹樹春”(白光勳, ‘陵宵臺下聞笛’, 玉峰詩集)

당시의 체격이 완연해서 사람들이 모두 그런 시가 있겠거니 했다. 잠시 후 이것이 자신의 즉흥시임을 실토하자 좌중의 사람들이 그의 시재에 놀라 감탄하였다. 이 이야기가 향리에 퍼져 미담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무렵 옥봉은 해남(당시에는 영암) 옥천면 대산리에 있는 옥당서당 정응서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옥봉선생이 배향된 해남 옥봉 서실
옥봉선생이 배향된 해남 옥봉 서실

13세(1549년) 때에 풍악산으로 돌아가는 정안(靜安) 스님에게 고시(古詩)를 한 편 지어 주었는데,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이 이를 두고 칭찬하기를 “적선(謫仙:李白)이 다시 태어났구나.”하였다. 이 해에 그는 진사 초시에 응시했다.

14세(1550년) 때에 청련 이후백(靑蓮 李後白(1520-1578)이 포의(布衣)로 금릉(金陵) 박산(博山)에 기거하면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가서 배웠다. 이 때 함께 공부한 사람으로는 고죽 최경창, 죽곡 임회(竹谷 林薈), 남계 김윤(南溪 金胤) 등이 있다.

17세(1553년) 때 장형인 기봉 백광홍을 따라 서울에 가서 예문관 검열로 있던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1519-1582)의 문하에서 수학한다. 이후 20세 무렵에 현감 정강옥의 딸과 혼인하지만 22세 되던 해(1558년) 2월 상처의 슬픔을 맞는다. 이 무렵 진도로 귀양 와 살고 있던 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 1515∼1590)에게 가서 글을 배웠다. 24세가 되어 다시 장가들었다. 아내는 어릴 적 스승이었던 정응서의 딸이었다. 이 해에 처가 마을 근처인 해남 옥천면 원경산 옥봉 아래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시냇물과 골짜기의 풍광이 아름다워 서재를 두 곳에 지었는데, 만취당(晩翠堂)과 옥산서실(玉山書室)이 그것이다. 28세(1564년) 때에 진사에 합격하고 나서 과거 공부를 그만 두기로 했다. 30세 때에는 김인후의 문집인 「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을 엮었다.

36세 되던 해 그의 스승 노수신이 옥봉을 불렀다. 옥봉이 중국 사신을 맞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임명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사신 한세능(韓世能)과 진삼모(陳三謨)가 왔는데, 노수신이 접빈사가 되었으므로 함께 일할 사람을 천거하게 되었다. 비록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제자로 그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으므로 옥봉을 제술관으로 임명해 달라고 조정에 간청하여 윤허를 얻은 것이다. 스승을 따라 의주에 가서 사신을 맞았는데, 옥봉의 글재주를 보고 사신 이하 모든 중국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그의 뛰어난 문재를 인정한 조정에서 그에게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있다가, 41세(1577년 선조 10년) 되던 2월에 선릉 참봉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벼슬에 올랐다. 4월에 완산 영전 참봉으로, 이듬해 4월 다시 정릉 참봉으로 자리를 옮겼다.

44세(1580년) 때 예빈시(禮賓寺) 참봉 겸 주자도감(鑄字都監) 감조관(監造官)이 되었다. 옥봉이 시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남을 알고 있는 사암 박순(思菴 朴淳 1523-1548)의 천거가 있어서이다.(옥봉은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난 명필로 알려져 있다. 許穆, “題趙進善涑金石帖”, 「眉叟記言」 10卷에는 “신라로부터 지금까지 1100년 역사에서 글씨로 후세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최치원, 김생, 탄연, 이군해, 안평대군과 근세에는 양사언, 황기로, 한석봉, 백광훈 등이 있다. 自新羅歷千百年,以書名後代者,如崔學士金生坦公李君侅侍中安平公子,近世梁黃韓白之徒”고 기술하고 있다.)

이 무렵 아들 진남(振南)이 일찍부터 이름을 떨치는 것을 보고 당시 내로라하는 집안이었던 허균(許均)의 누이가 사위 삼기를 원하였다. 여러 형제들을 시켜 옥봉이 머무는 집에 찾아가 혼인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옥봉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절친한 사이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그 까닭을 묻자, “혼인하는 집에서 어찌 그 집안이 번성한 것만을 탐내어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율곡이 크게 감탄하면서 그 정신을 찬양하였다.

46세 되던 해(1582년) 5월 14일 서울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떴다. 옥봉이 돌아간 지 16년만인 1608년(선조 41년)에 「옥봉시집」이 간행되었다. 아들 진남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유고들을 정리 수습하여 절도사 윤안성(尹安性 1542-1615)이 「玉峰詩集」을 간행했다. 1723년에 그의 스승 청련 이후백의 ‘康津瑞鳳書院’에 옥봉을 배향하였다.

(2) 사승과 교유

옥봉집
옥봉집

옥봉의 사승과 교유관계를 살피는 일은 그의 삶과 정신적 궤적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영향을 받은 스승으로는 청련 이후백, 송천 양응정, 소재 노수신, 사암 박순, 석천 임억령 등을 들 수 있고, 교유했던 선배 인물로는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昇),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소쇄옹 양산보(瀟灑翁 梁山甫), 옥계 노진(玉溪 盧稹), 신암 송인(頣庵 宋寅),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등을 들 수 있다(金鍾西, “玉峰 白光勳과 湖南詩壇의 交遊”, 「한국한시연구」 제10권(한국한시학회, 2002), 99쪽)

동류인물로서 옥봉과 절친했던 사람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牛溪 成渾) 송강 정철(松江 鄭徹), 동은 이의건(峒隱 李義健), 만죽 서익(萬竹 徐益) 고죽 최경창, 손곡 이달 등이다. 이밖에 이산해(李山海),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이순인(李純仁) 양사언(楊士彦) 등과도 시를 주고받았다. 담양 성산에서는 서하당 김성원(栖霞堂 金成遠), 고암 양자미(鼓巖 梁子微) 등과 만나 수창하였다.

42세 되던 해 봄에 서울로 가다가 남원 광한루에서 이달, 양대박(梁大樸), 임제(林悌)와 만나 시를 지었고, 서울에 기거할 때에는 서익, 민충지(閔忠之), 김천일(金千鎰), 양응우(楊應遇) 심충겸(沈忠謙), 양사기(楊士奇), 나사침(羅士忱) 등과 교유하였다.

다음에 몇 편의 시를 골라 살펴서 그의 인간관계의 일단을 짐작해 보고자 한다.

“눈 내린 뒤 길손으로 당신님 찾으니/매화 향기는 밝은 달과 어울리네./술 마시며 나누는 얘기로 추위 다시 가시고/훗날 새길 서로의 마음 이 시에 남기네. 客路尋君雪後時 梅花香影月明宜 淸樽話到寒更盡 他日相思有此詩”(白光勳, ‘敬次靑蓮先生題愼上舍軒’, 앞의 책).

이 시는 14세 때에 모셨던 스승 청련 이후백의 시에 차운한 시이다. 스승을 매화 향기와 밝은 달의 표상으로 표현하였다. 눈, 매화향, 달빛의 서정적 배경 위에 주고 받는 따뜻한 마음을 그린 아름다운 시이다. 청련은 옥봉을 두고 늘 “절세기보(絶世奇寶)”라고 칭찬하였다.

석천 임억령과의 관계도 깊다. 석천이 옥봉을 위해 쓴 시가 몇 편 있다. 그 중 한 편을 보자.

“강호에 구슬픈 노래 부르는 선비/눈 쌓인 골짜기에서 만났네./속마음 말로 다 못했는데/오히려 술동이 빌까 두렵네 湖海悲歌士 相逢雪壑中 寸心言未盡 猶畏綠樽空”(林億齡,“聞白光勳酣歌(癸丑冬)”, 「石川集」)

계축년(1553년) 겨울, 옥봉이 17세 때이다. 장형 기봉을 따라 서울에 가서 양응정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이 무렵 석천은 옥봉을 만나 이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옥봉을 ‘구슬픈 노래 부르는 선비’라고 했고(석천은 옥봉 시의 특징을 ‘淸歌’라고도 했다. “옥봉의 맑은 노래 하서의 거문고 소리/이 몸 비록 늙었으나 길이 읊으리./대나무 숲 깊은 곳 서재는 고요한데/청산을 마주하고 생각해 보니 세세히 짐작이 가네.”(白也淸歌金也琴 荷衣雖老亦長吟 竹林深處書齋靜 思對靑山細細斟) 옥봉 시의 청아한 울림과 하서의 거문고 솜씨를 떠올리고, 이를 그리워한 임석천의 시이다. 석천은 두 사람을 ‘二妙’라고 하여 두 사람의 솜씨와 재주를 칭찬하였다 (林億齡,“臥吟呈二妙(金河西白玉峰)”, 위의 책, 279쪽). 서로 속마음을 털어 놓는 각별한 사이임이 드러나 있다.

옥봉도 임억령을 항상 존경하고 따랐다. 그가 얼마나 석천의 시를 높이 평가하는지는 시승 사준(思峻)에게 지어 준 다음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석천 선생은 오늘날의 사백이시니/시 배우려면 반드시 이 분께 구해야 하리./매화 피고 달 밝은 이 밤에/스님 가면 귀찮게 맞지는 않으시리. 石老今詞伯 求詩必此門 梅花明月夜 師去未應煩”(白光勳,“寄謝思峻”, 앞의 책)

옥봉은 석천을 ‘오늘날의 사백’이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시 배우려면 반드시 이 분께’ 가야 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시업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두 사람이 사승 관계로서 얼마나 돈독한 사이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옥봉이 삼당의 한 사람으로서 우뚝하게 서서 당풍을 선도하도록 하는 데 석천이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金鍾西, 앞의 논문, 118쪽)고 평가할 만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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