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文人(2)-청계 위덕의
■‘문림의향’-文人(2)-청계 위덕의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8.2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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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성리학(性理學)의 비조(鼻祖) 천방 유호인(天放 劉好仁) 선생 제자 위덕의(魏德毅)"
향토학자 위 성

茶存 魏聖

1. 들어 가는 말

공公의 이름은 덕의德毅로 자字는 이원而遠이고 호號는 청계聽溪다. 공은 당곡진사唐谷進士 곤鯤과 광주이씨廣州李氏 사이에서 1540년 5남중 둘째로 관산冠山 당동唐洞(현 堂洞)에서 태어났다. 공의 행장行狀이나 기록에서 천방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의 길을 묻고 수학 하였다는 조문彫文은 찾아 볼 수 없다. 1573년(34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인의 학문을 마음속에 새겨 힘써 실천하였으며 효도를 다한 것은 천방선생의 길을 답습하였다고 사료된다. 공의 43세(1592년 임진년)때 왜란을 만나 선조가 서쪽으로 몸을 피하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니 근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만류하는 가족을 뿌리치며 떠나 낮에는 숨고 밤에는 달려 90여일 만에 선조가 있는 의주에 달려가니 선조가 호종한 신하에게 물어 난중에 충심을 다하여 남쪽 해안에서 달려온 사람 중에 으뜸인 공에게 위로와 치하를 다 하였다. 공은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하고 명나라 군대에 양곡을 모아 전하는 운향관運餉官의 소임을 다하여 그 공으로 진원珍原 현감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며 생生을 다 했음도 이와 같다.

 

2. 詩文學과 學文

1) 詩와 실전한 책

공의 학문을 전하는 유고遺稿는 난리 통에 유실되고 자손이 혼미하여 현존하지 않으나 그 수준을 엿 볼 수 있는 기문記文은 다행히 전하고 있다. 공은 영남지방 운향관으로 소임 할 때 동문수학 하였던 반곡磻谷 정경달丁景達( 1542~1602년, 천방 유호인의 수제자로 자는 而晦, 1570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 이순신 장군 종사관)도 선산목사로 왜란에 임하였고 선산에서 명나라 장군 여응종呂應鐘과 조우하였으며 이 자리에 행재소의 김복흥金復興(1546~1604년:본관 순천, 의금부도사.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킴)문관도 같이하였다. 여흥종이 시를 짖도록 명하고 먼저 청계聽溪가 첫 구절을 읊으니

漫道才惟子建長 재주가 자건子建보다 우월 하다고 멋대로 말하였는데

詩腸奈已作愁腸 시詩 생각은 어디가고 마음에 수심만이 일어나네

반곡磻谷이 이어서

風稜震蕩南天外 풍력은 세차게 남쪽하늘 밖에서 몹시 흔드는데

危悃崢嶸北斗傍 모진 정성은 북두성 곁에 높이 떠 있구나

김복흥이 잇기를

揮劍未能除猰貐 칼을 휘둘러 능히 개짐승(왜놈)을 제거하지 못 하였고

駐戈空見縱豺狼 창칼을 멈추니 승냥이를 놓아 주었구나

청계聽溪가 끝구절을 맺니라

尊難與消餘恨 한 동이 술로는 남은 원한을 녹이기 어려운데

更向東邊老欲狂 다시 동변東邊을 향하니 노여움에 미칠 것 같네.

여응종이 뒤에 시를 비평하기를 “반곡은 맑게 노래했으며, 김복흥은 너무 드러냈고, 청계공은 의미가 심히 깊다”고 하였다.

청계공이 배향된 죽천사
청계공이 배향된 죽천사

보서譜書에 전하기를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과 참판 임계영任啓英(1528~1597년 : 순창군수를 지내고 문관이자 의병장, 청계공의 아들 정헌의 장인)등 여러 어진이들과 시집 1권, 향리에서 뛰어난 자제子弟들과 경서經書의 뜻을 문답한 경의經義 1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이 유서遺書들이 전하면 공이 처한 그때의 상황이나 난중에 겪었던, 그리고 여러 사람과 교유한 정황이나 또 공의 사상과 행적을 연구하여 남은 자들의 자긍심으로 삼을 수 있을 텐데 아쉽다. 공은 사후死後에 병조 참의에 추증되고 호성원종훈에 1등으로 기록 되었으며 죽천사에 배향하였다.

2) 속상왕부續傷往賦 병서幷序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유몽득劉夢得의 상왕부傷往賦에서 차운한 속상왕부續傷往賦 병서幷序가 전하고 있어 공의 향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다. 중국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772~842년)의 자字가 몽득夢得이다. 상왕부傷往賦란 가슴 아픈 노래라는 말이다.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사람이 죽으면 그 슬픔을 축문祝文이나 만장輓章(挽詞)을 쓰는데 만장은 천이나 종이에 글로 써서 긴 장대에 달아 상여 앞에 들고 장례를 지낸다. 그것을 만장이라 하고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의 인품이나 지위를 나타낸다. 이글은 너무나 슬퍼 애도한 노래다.

속상왕부續傷往賦 병서幷序-

余於丁酉秋八月迨旣望 載病妻朴氏浮海 越十八喪于舟上 嶊傷奈何 勢難運喪 草瘞於靈光境上 傷懷之極 見劉夢得 傷往賦 信乎先獲我心聊 抒悲傷之意 續而次韻其詞曰.

내가 정유년(1597년) 8월 16일에 이르러 병든 아내 박씨를 싣고 바다에 떠 있다가 이틀 뒤인 18일에 배 위에서 아내를 잃으니 최고조에 달한 슬픔이 어찌 하였겠는가, 상喪을 행行하는 것이 어려워 영광군 경계 육지에 올라 풀 속에다 묻고 슬픈 마음이 극에 달해 유몽득劉夢得의 상왕부傷往賦를 보고 진실로 먼저 내 마음을 얻었다 하고 슬픈 생각을 쏟아 이어 차운次韻한 사詞(글)는

噫歟欷吾誰傷兮 아! 흐느껴 우는 것이 내가 누구를 슬퍼함인가!

傷斯人之我遺 이 사람이 나를 버림을 슬퍼 하네.

人情漸刷而少弛兮 인정은 점점 지워져 조금씩 느슨해져 가는데

夫何越歲而愈悲 대저 어찌하여 해를 넘겨도 더욱 슬퍼지는가!

招芳魂兮靡及 미녀의 넋을 불러본들 미치지 못하고

淚潛潛兮無時 때가 없이 아무 때나 눈물만 줄줄 나오네.

歇形骸兮在何處 헐벗은 형해(몸과뼈)여 어느 곳에 있는가

祚一日而九馳 이리저리 떠돌아 하루에도 아홉 번을 달려가네.

境絶兮人稀 지경이 끊어져 인적은 드물고

風悲兮草衰 바람은 슬픈 듯이 불며 풀마저 시들었네.

欲往從兮末由 따라 가고자 하나 따라갈 인연이 없어

龥蒼天而怨咨 푸른 하늘에 울부짖어 원망하고 탄식하네.

塊獨處兮山之中 흙덩이처럼 산 가운데 있어서

吊前迹於殘暉 지난 자취 저물어 가는 햇빛 속에서 서러워하네

尋手澤於遺器兮 손때를 남겨놓은 그릇에서 흔적을 찾으며

撫芳塵於餘衣 향내 젖은 티끌 남겨진 옷을 어루만지네.

立遺墟兮求寢處 옛터에 서서 자던 곳을 찾으니

黍離離兮露未晞 기장만 무성하여 이슬도 햇볕에 마르지 않구나.

昨宵夢裏之形影兮 어제 밤 꿈속의 그림자여

只以添限而增沸 단지 한限만 보테고 애닯픔은 더 하는구나.

恩已甚兮難絶 사랑함이 더욱 깊어 끊을 수가 없고

見無期兮永思 기약 없이 영원토록 그대를 사모하네.

人世常多喪匹兮 인간 세상에 늘 짝을 잃은 일이 많으련만

慘痛雖似我者 참으로 아픔이 누가 나와 같으리오.

追惟新聘之日兮 신빙(결혼)일을 추억 하니

往在癸酉臘月旬下 지난 계유년(1573년) 12월 하순이었네.

紛旣結縭以佩訓兮 이렇게 결리(결혼)로 훈계를 허리에 차는 것은

只知無違乎夫 단지 남편의 뜻 거슬리지 않는 것만 알았네.

帷下新粧兮 휘장 아래 새롭게 단장하고

錦衾華繡 화려한 꽃을 수놓은 비단 이불이었네.

天桃春曉兮 봄 복숭아 같은 밝은 얼굴은

標梅香微 높은 가지에 매화꽃 향기가 흐르네.

歡溢新閨兮 신방에는 기쁨이 넘치고

鼓琴瑟之 음악 소리 즐겁네.

陶陶酒滿淸樽兮 맑은 술은 그릇마다 가득하고

動浮光之漪漪 뜬 술 빛이 찰랑 거리네.

旁波則光生組綬兮 두루 물결의 빛은 인끈*에서 비롯되고

先系則籍連豸 선조의 계보를 잇는 명부에 올라 연결 되었네.

笏幸與子而偕藏兮 홀**을 다행히 그대에게 주어 함께 하였고

信天同而神比 믿음은 하늘과 같은데 어찌 신과 비교 하는가!

顧其行則靡虧兮 그 행실이 어그러짐이 없고

語其才則亦具 그 재주를 말 한다면 또한 갖추었네.

于歸當日兮 시집 온 당일은 더더욱

一室歡如 온 집안이 기뻐 허였네.

慈惠足以及人兮 자혜가 족히 다른 사람에게 미쳐서

不致感者伊誰 감동하지 않은 자 누구이던가!

色溫而能厲兮 얼굴빛 온화하게 힘쓰고

語恭而非飴 말은 공손하고 엿처럼 무르지 않았네.

嘉度幽閒兮 아름다운 태도 그윽하고 여유로웠고

柔儀葳蕤 유순한 거동은 무성한 풀처럼 아름답네.

恭事我兮 공손하게 나를 섬기는 일은

多慧羞對人而如疑 지혜롭고 부끄럼이 많아 사람을 대할 때는 못난 듯 했네.

宜家宜室兮 집안을 잘 다스렸고

門稱淑姿 가문에서 덕 스러운 자태임을 칭찬 했네.

奠蘋六載兮 6년 동안 제사를 받들었음은

幾盡誠敬之歸 모든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따랐네.

營家三歲兮 분가하여 살림한지 3년 동안

每見勤苦之容 매번 일로 고생한 용모를 보았네.

謾擬百歲同室兮 부질없이 백세토록 살자 했는데

豈料人事擲空 어찌 속절없이 사람 일을 헤아릴 것인가!

四十二春光易摧兮 42해의 봄볕이 쉽게 껶여서

弱質遽라於邪風 약질에다 갑자기 요사한 풍질에 걸렸네.

環慮己病之梁我兮 오히려 자기병이 내게 옮길까 염려하여

每勉我而通 매번 열심히 나를 통하게 하였네.

五月在外爲參商兮***

5개월여 밖에 있어서 동쪽과 서쪽에 있는 별처럼 떨어져

一體未足爲蚷蛩 한 몸인데도 노래기와 메뚜기처럼 같이 하지 못했네.

百端病裏之情兮 아픈 속에서도 여러 방법으로 다정 하였고

手裁一幅和淚封 손수 한 폭을 만들어 눈물로 봉해 두었네.

忽余自류而執手兮 갑자기 내가 나타나 손을 잡으니

問先及兮萊何從 어디서 오느냐고 먼저 물었네.

共含淚而相對兮 눈물을 머금고 서로 바라보며

兩心皆至於夢夢 두마음은 다 꿈을 꾸고 있는 듯 했네.

曾藥治未幾兮 낌새를 일찍이 약으로 다스리지 못해

又何賊鋒至追逢 어찌하여 적의 칼끝에 추격 당했는가!

載一舟以浮海兮 한배에 같이 바다에 떠서

水幾遡兮山幾窮 물이 거스르는 낌새고 산도 거의 다하였네.

庶將一分之向蘇兮 이제 일분의 마지막을 향하는데

冀同歡舊園中 옛 동산에서 기쁨을 함께 하기 바라네.

龍門風霜苦 용문의 풍상(찬바람)은 고달픈데

別鶴哀鳴夜銜羽 이별한 학은 밤에 구슬프게 울며 나네.

何天意之未惠兮 어찌 하늘의 뜻도 은혜롭지 못하고

奄遭之派上凶音 갑자기 파도 위에서 흉음(喪)을 만났네

五內摧裂而哽咽兮 오장이 꺾이고 찢어지며 목이 메이고

不堪悲涕之淫淫 슬픈 울음이 하염없어 견딜 수 없네.

情不能而自制兮 정을 능히 억제하지 못하고

豈知自傷之是箴 어찌 스스로 상처 받고 바늘로 찌르는 아픔을 알겠는가!

嗚呼與子成說兮 오! 그대와 내가 말씀하였는데

豈知有今 어찌 오늘이 있을 줄이야!

異地孤塋兮 다른 땅에 외로운 무덤은

斷崖千尋 천길 깎아지른 낭떠러지 같구나.

限未及期移封兮 묘지 옮김을 기약 할 수 없어 한스러워

地茫茫兮天沈沈 땅도 망망하고 하늘도 침침하네.

哀哀白首之單形兮 슬프고 슬프도다! 늙은이 홀몸되어

豈獨留隙上光陰 어찌 홀로 세상을 살꺼나.

異日泉裏之則同兮 다른 날 황천 가면 함께 해서

更結此世之餘忱 나머지 세상에서 남은 정성을 고쳐 맺고 싶네.

染莊生之吐血兮 풀이 무성한 곳에 피를 토해 물 들이고

和古篇而悲吟 고편(傷往賦)에 화답하여 애달피 읊노라.

*인끈: 무장들이 인부印符를 지닐 때 그 인부를 담는 주머니를 묶는 끈

*홀笏: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 조복을 갖추어 손에 쥐는 물건 길이는1자정도 넓이는 두치, 4품이상은 상아로 이하는 나무

***參星과商星: 동쪽과 서쪽에 있는 별자리

謹按先生之賦 在巾笥者久矣 而後孫不能獲 見今始盥讀 不覺字字零涕 欲圖壽傳 而敢錄于玆.

삼가 살피건데 선생의 이 부(賦)는 상자 속에 있어 오래 되었으나 후손들이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제 비로서 손을 씻고 읽으니 글자마다 눈물이 떨어지는 도리를 깨닫지 못할까 해서 오래도록 전하고자 감히 여기에 기록한다. -長興魏氏大同譜 誌狀錄

3. 그 이외의 기록

1) 충무공 이순신 난중일기

공의 기록이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중 정유일기 두편 모두 8월19일자에 회령진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하나는 피난민 위덕의와 또 하나는 그냥 위덕의라고 기록한다. 장흥 사람으로 유일하게 기록 되며 그냥 지나치기는 왠지 찜찜하다. 분명하게 이순신 장군은 공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서운함이 묻어난다.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바로 참전하였으며 당시 국가의 근간이었던 분들과 시집도 있고 장흥에서는 유력인사로 벼슬길도 마다하고 고고하게 후진양성에 힘쓰며 학문에 전념 하셨다. 이런 연유로 참전하여 힘을 보태기를 바랐을 것인데 아니었다. 이제 공의 글을 정리하여 보니 피치 못할 사정은 정유년 8월16일에 배를 준비하여 회령진에서 피난길에 올랐으며 이때 몸이 많이 불편하여 생사를 넘나든 부인이 계셔서 집에 홀로 남겨 두고 출전하지도 못하고 피난을 결정 하셨던 것임을 여기에 나타내어 바로 적는다.

2) 청금聽禽 정훈廷勳의 차운 詩

공의 시를 차운한 것으로 보이는 유천풍산경차숙부운遊天風山敬次叔父韻이 청금유고에 있고 또 경차숙부운敬次叔父韻에서 “십일엄유처十日淹留處 경거만지서瓊琚滿紙書”【10일 동안 애오라지 머물러 있는 곳에는 경거(瓊琚:보배로운 시문)가 종이에 가득 하였네】와 같이 공이 생존한 기간 동안 많은 시문을 지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4. 결론

공은 생원시 이후 칩거하며 자제들의 학문 가르치는 일에 힘 쓰셨는데 계제季弟 덕후德厚는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이 되었고 유고遺稿가 있다. 그의 장자 청금聽禽 정훈廷勳이 뛰어 났는데 호란胡亂에 보성의 은봉 안방준隱峰 安邦俊과 거의擧義 하였고 유고가 있으며 차자 정렬廷烈과 조카 정철廷喆은 글 읽다가 고금도에서 치른 대과 병과에 합격하여 정렬은 웅천현감熊川縣監에 정철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진무종공신 1등 훈에 기록되었고 후에 병조참판으로 제수되어 1631년 후금의 수도 심양에 다녀와 심양왕환일기瀋陽往還日記를 남겼다. 청금의 季弟 磻溪 廷鳴 선생은 병자 정묘 양 호란에 은봉 안방준과 거의하여 충의를 빛네 長興誌 丁卯誌에 충의로 이름을 남겼으며 유고가 남아 있다. 이외에도 아들과 집안 자제들을 가르쳐 학업 진취에 성과가 있었고 덕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2020.08 천관산에서 늦은 여름

*참고문헌:<장흥위씨 대동보 지장록>(1999년판 낭주인쇄사)/<천년가학 방촌학>(위의환저, 2009년 방촌유물전시관)/<난중일기>(이순신 저)/<장흥문집해제>(1997년 장흥문화원)/<정묘지>(1747년 장흥향교)/<장흥위씨세고>(오헌 위계룡 편찬)/<천방유고>(유호인 저)>/<반곡집>(정경달 저)/<청금유고>(위정훈 저, 이병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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