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의 문학은 위대했다
■사설-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의 문학은 위대했다
  • 김선욱
  • 승인 2020.09.1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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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의 시문詩文이 8세기를 뛰어넘어 오늘도 회자되는데…

13세기 초(1226∼1293)에 살았던 장흥 출신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冲止의 시문詩文이 8세기를 건너 뛴 21세기 초엽에도 조명되며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인터넷이 대세인 오늘날, 인터넷상에서 원감국사의 시문이 틈틈이 소개되며 널리 유포되고 있다. 국내 한시漢詩, 한문학 권위자 정민 교수도 ‘정민의 우리 선시 산책’이라는 코너로 원감국사의 한시 수십 편을 국역하고 풀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시들을 애호, 인용하고 있다

원감국사는 차시茶詩도 20여 편 남겼다. 이 차시들 즉 “아침에는 죽 한 그릇, 점심에는 밥 한 그릇에도 배부르다. 목마르면 차 세 그릇 우려 마시니, 깨달음이 있고 없곤 상관 안 한다 飯一盂蔬一盤 飢則食兮因則眠 水一缾茶一銚 渴則提來手自煎” “밥 한 바리와 나물 한 접시, 고프면 먹고 곤하면 자노라, 물 한 병과 차 한 냄비, 목마르면 들고 나와 손수 차를 달인다. [山中樂]飯一盂蔬一盤 飢則食兮因則眠 水一缾茶一銚 渴則提來手自煎” 등 심도 있는 여러 차시들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소설 ‘원감국사’>(우리출판사간/윤청광지음)도 출간되었을 정도다. 또 국사의 유고 시문이 지난 1988년 <원감국사집>(진성규 국역) 이름으로 아세아문화사에서 출판된 후 거의 침묵 속에 갇혀 있었는데, 지난 2010년에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이상현 역 <원감국사집>이 한글본으로, 2012년에는 ‘지식을 만드는 지식’에서 진성규 역 <원감국사집>이 재출간되면서 지속적으로 ‘국사 시문의 회자’에 기여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학계에서도 국사 시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발표되고 있다. 또 2002년 9월 29일에는 송광사에서는 ‘원감국사 충지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개최된 바도 있었다.

왜 원감국사의 시문이 8세기를 건너 뛴 지금에도 여전히 그 후인들인 위문魏門, 불도佛徒들까지 뛰어넘어 널리 회자되는가? 한 마디로 문학적 역사적 가치 때문이고, 그 작품들이 기록(遺稿)으로 남아졌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 국사는 수많은 시문을 남겼고 국사 사후 4년 후인 1297년에 <원감국사어록>이 간행되었고, 그 어록을 바탕으로 조선조 초 1478년(성종 9년)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국사 시문 76편이 수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문선>이 어떤 책인가? 주지하디시피, <동문선>은 성종 때 당대 거장이요 대문인이었던 서거정徐居正(1420∼1488)과 노사신盧思愼(1427~1498) 등이 편찬한 방대한 분량(133권 45책)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이 책에는 550여 명의 작품 4,500여 편이 수록돼 있다. 이 중 220명은 고작 한 편의 시문이, 3백여 명은 2편 이상의 시문이 수록됐으며, 29명의 승려도 포함되었다. 그런데 550여 명의 인물 중 50여 편 이상의 시문이 수록된 사람은 고작 50여 명에 불과하고, 승려로서는 원감국사가 유일했던 것이다.

장흥이 도호부로 승격한 것은 인종(재위 1122~1146) 때였으므로, 국사 생존 기간에 장흥이 도호부이긴 했지만, 도호부로서 역사가 일천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반도의 최남단이요 최 변방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魏氏도 장흥지역에서는 토반 성씨로 대표적으로 위세 있는 가문이긴 하였지만, 전국적으로는 ‘희성希姓의 한문寒門’이어서, 훗날 존재 위백규마저 魏氏를 삼벽三僻 중의 하나인 성벽姓僻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비록 국사(8세)의 3세 위인 5세의 위계정魏繼廷(1038년~1107)이 고려 조정에서 최고위직을 역임했고 국사가 후인이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벽촌의 장흥 위씨 가문에서 중앙무대까지 진출, ‘대선사大禪師’ ‘국사國師’ 칭호까지 받으며 사림詞林에서도 공인받는 문인으로, 불교계에서 가장 큰 직분이던 ‘대선사’로 현달顯達하기란 마치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을 터였다.

위계정은 당대 최상위급 관료‧문신이었다(숙종肅宗의 유교遺敎에서도 ‘재신宰臣 위계정魏繼廷 이하 문무 백관과 승僧과 속俗의 기로耆老에게 교한다…肅王遺敎=敎宰臣魏繼廷已下文武百寮僧俗耆老…’)(<동문선> 제23권,敎書)고 유교遺敎 첫머리에 내세울 정도로, 위계정은 당대 조정에서 최고위직 관리였다. 더구나 송나라 학자 심괄(沈括,1031년~1095)의 대표적 저작물 <몽계필담> ‘속필담續笔谈’에 관등시觀燈詩가 소개될 정도로 위계정은 현달한 문신이었다. 그렇지만 유고遺稿를 남기지 못해 관료 출신 인물 중심이었던 <동문선>에서조차 ‘천안절하례표賀天安節表’ 만 수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동문선>이 편찬되던 조선조은 불교를 철저히 배척했으며 승려도 기피 존재였다. 하여 유학자들이 편찬한 방대한 <동문선>에 무려 76명의 무명 씨들의 작품이 수록될 수 있었음에도 <동문선>에 등재된 승려는 고작 29명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동문선> 편집자들에게 원감국사라고 해서 그 편견이 달라질 것이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국사 시문은 76편이나 등재되었다. 이것은 오로지 국사 시문詩文의 문학성이나 그 가치가 <동문선>의 편찬자들, 그 ‘유학자’들의 편견(?)조차도 뛰어넘을 수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랬다. 원감국사의 문학은 참으로 위대했다. 하여 오로지 ‘유학자들만의 천하’였던 조선조에서도 국사의 시는 승려로서 <동문선> 최다 수록은 물론, <성호사설>이며 <지봉유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자주 소개되며 널리 회자되고 유행될 수 있었다, 일본에서마저 1680년 국사의 문학성이 가치를 인정받아 <원감국사어록>이 중간(重刊)되기도 했다. 그러한 국사의 詩文이었기에 여전히 오늘날에도 국사의 시문이 담론이 되고 회자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국사의 그러한 문학성에 대한 조명이며 국사에 대한 선양사업 등이 국사의 출신지 장흥에서는 여태 잠들어 있는 실정이다. 장흥군에서야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천재적인, 희대稀代의 문인을 배출한 魏氏 가문에서도 여태껏 무관심이다. 아예 침묵이다. 매우 아쉽기 그지없다. 왜, 침묵하는지, 언제까지 침묵만 하고 있을 것인지 묻고 싶다.

명백히 국사의 시문은 세기를 뛰어 넘고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도 여전히 ‘저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창창히 빛나고 있다. 그런데도 국사 후인들인 魏氏 가문에서나 국사를 배출한 자칭 ‘문림文林 고을 장흥’이라고 자부한다고 하는 장흥군에서 여전히 침묵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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