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35 -예양강 가을 소리
■장흥한담 35 -예양강 가을 소리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10.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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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

유용수/시인

“가을로 가기 위해 여름은 무게를 비우고 나무는 사색에 들었다 가을에는 그렇다, 질펀한 빗물을 걷고 있던 가을 새가 목적 없이 하늘을 날다가 뒤돌아 울고, 곰삭은 벚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노을 닮은 잎, 빗물에 흔들리는, 이런 날, 깊은 곳에 내려앉은 금이 간 가부좌를 풀고 속살 패인 늙은 강 따라 흐르며 외로움을 이겨내야겠다 갈대가 흔들렸다 계절이 바뀔 때는 갈대도 한쪽으로 기울고, 개개비를 보내고 몸을 푼, 갈대숲 빈 곳으로 갯바람이 들면, 늙은 강 붉은 노을 품고 강물 끌고 가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에는 그렇다, 가을볕이 고요를 휘젓고 수직으로 떨어지면 홀가분해진 가을꽃은 버리고 갈 것을 알기에 화려한 꽃잎을 먼저 떨군, 청승맞은 선홍빛 성자聖者”

-유용수 시, ‘가을에는 그렇다, 선홍빛 성자’ 전문

자귀나무가 가지를 들어 올리고 파르르 떨고 있다.

물기 마른 나뭇잎이 조금씩 말려드는 소리일까. 가만히 나무를 바라본다. 솜털 구름이 나뭇가지를 힘겹게 빠져나오자 나지막이 스치는 바람에도 잎을 포갠 나무가 심하게 떨고 있다. 몇 날 며칠 울어대던 매미는 다 어디로 갔을까. 예양강 제방 둑 비탈면에 산박하, 왕고들빼기가 호젓한 강가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맑은 꽃을 피워 놓았다.

강물이 낮게 흐른다. ‘졸∼졸∼졸’ 강자갈을 타고 흐르는 강울음 소리가 가을 소리다. 이런 날은 하늘 한번 쳐다보며 시나브로 모래톱을 걸으며 가끔은 강물에 돌을 던져 나를 대신하여 분노하는 소리를 들어 볼 일이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밑을 지나 앞산 푸른 소나무가 크게 보일 무렵이면 작아진 나를 한번 뒤 돌아 볼 일이다. 가슴속에 숨겨진 욕심과 차오르는 위선을 끄집어내어 익어가는 가을 색에 내 영혼 물들여 노랑, 파랑, 붉은 울음을 쏟아내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을을 맛보고 싶다.

뜨거운 여름날. 무덥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게으르게 보냈다. 가을은 마중하여 다가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무작정 게으르게 기다려도 가을은 산을 타고 내려온다. 게으른 여름을 보내고 맞는 가을에 가질 수 있는 건 고작 서늘한 바람이고, 푸른 하늘에 가끔 조각난 구름을 쫓아가지만 부드럽게 흐르는 강가에 나와 모난 돌멩이를 던지며 풀지 못한 분노를 쏟아낼 수 있어 가을이 좋다. 나는 거칠게 흘러가는 여름 강물을 바라보며 고즈넉한 가을을 기다려 왔다. 가을 강은 몽글몽글 흘러서 좋다. 푸른 이끼를 한들거리며 흘러가는 강물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서 좋다. 거칠지 않고, 뛰어넘지 않고, 밀어내지 않아서 좋다. 강물은 청승맞게 모래를 뒤집어 놓고 흘러가고 있다.

강둑에 앉아 눈감고 가만히 귀 기울이고 가을 소리를 듣는다. 들판에 벼 익어가는 소리, 산밭 허수아비 스치고 내려오는 산바람 소리 그리고 강물에 스며든 낮달을 씻어내는 소리, 낮게 날아가는 새소리, 늙은 어머니가 깻대를 머리에 이고 지팡이 끌고 가는 소리, 평화롭고 넉넉하고 쓸쓸한 가을소리가 들린다. 나는 단풍잎이 장엄하게 흘러 내려오는 가을이 되면, 고추잠자리가 맑은 바람 타고 날아와 코끝에서 아른거려서 좋고, 담장에 늦게 핀 호박꽃이 애호박 하나를 품고 있어서 좋다. 가을에는 사그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푸드덕푸드덕’ 메뚜기 뛰는 소리가 어떤 교향곡보다 더 귀를 쫑긋거리게 한다. 제방 둑 풀 속에 숨어있는 귀뚜라미는 어디서 어떻게 왔을까. 좀 더 익어지는 가을이 오면 강물은 어떤 소리를 내고 흐를까.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고 들을 수는 있을까. 납작 엎드린 풀들도 어젯밤에 심한 가슴앓이를 했는지 칼날처럼 꼿꼿하던 풀끝은 풀어져 있고, 덜 익은 깻대는 몽근 가을볕에 남루한 집 마당에 하얀 깨알을 토해놓았고, 푸른 토란대와 붉은 고추는 늙은 어머니와 함께 꾸덕꾸덕 야위어 가는 가을이다.

강물이 강자갈을 넘는다.

송사리 몇 마리가 심하게 꼬리를 흔들며 강물을 거슬러 오를 때, 물속에 손을 넣어 송사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내가 참 바보스럽다. 가을은 그렇게 한가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 같다. 더 기다리며 더 갈증을 느껴야 하고, 더 외로워야 하고, 더 심한 몸살을 앓아야 가을이 오려나 보다. 미끌미끌한 강 돌에 거친 발자국을 남기고 강을 가로지르자, 물은 심하게 거부한다. 부드럽던 강물이 영역의 침범을 경계할 때 조심스럽게 모래섬을 더듬는다. 키 크지 않는 갈대가 어슷거리며 ‘싸....... 악’ 거리며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갈대에 걸린 강바람이 땀방울을 씻어 낸다. 강물이 돌멩이에 기억해 놓은 기록들을 더듬더듬 바라보지만 지나온 역사를 다 읽지 못하고 있을 즈음 푸른 이끼는 촘촘히 강 따라가고 있다.

갈대숲 깊은 곳에서 부화를 마치고 떠난 개개비 둥지가 경이롭다. 갈대밭은 새들의 탯자리 이다. 비워진 둥지에 온기가 남았을까. 가만히 더듬어 보지만, 새끼 새가 떠난 보금자리에 남겨둔 보드라운 깃털 하나가 강물을 타고 흐른다. 올해도 가을은 쏟아지는 새벽 비에 묻혀 왔다. 여름의 무게를 비워야 가을이 온다. 강가를 지키던 대추나무집에 대추는 붉게 물들어 찾아올 주인을 기다리고, 담장 곁에 고개를 내민 석류 한 송이도 가을 해를 닮아간다. 등 굽은 담장 밑에는 꽃물을 다 풀지 못한 봉숭아 꽃대가 붉은 꽃과 풋풋한 꽃씨 열매를 달고 시리게 땅에 누었다. 강물은 아직 날아가지 못한 새끼 새가 둥지를 틀어쥐고 몸부림치는 소리와 물 위를 스치는 가을 소리를 품고 깊은 소沼로 숨어든다.

햇살을 가르는 가을바람이 나뭇잎을 흔든다. 강물은 살그머니 파문을 일으키며 햇살 가득 머문 바윗돌에 가을 물을 살짝 새기고 성글게 막아둔 돌 제방 틈을 타고 흐른다. 내 가을도 성글어진 세월처럼 휑하니 빠져나갈까 온몸을 긴장시킨다. 다급하게 흐르는 예양강에서 가을 소리가 바짝 달라붙어 나를 미행하기 시작한다. 가을에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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