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한담 36 -불안 속에 피는 꽃, 독취정
■ 장흥한담 36 -불안 속에 피는 꽃, 독취정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11.19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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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 수필가

유용수/시인. 수필가

「 정자는 특별히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마음에 깨닫는 것들에서 아름다운 이름으로 삼는 것은 하나뿐이 아니고 아주 많다. 그런데 어찌 유독 독취獨醉로 이름을 지었을까. 동인同人이 있었으니 차마 혼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차라리 깨어 있는 나그네이었을지언정 취객도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 취함과 버림을 알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상하다. 주인장 같은 청고한 선비가 있다니! 아아! 나는 일찍이 그것을 알았다. 세상은 다 이익을 쫓는 장사치들이나 자신만 홀로 선비다운 선비라 한다. 모두가 다 높은 벼슬에 오르기 위해 급급해하지만, 자신만 유달리 자적한다. 진펄에 있는 장초萇楚(세상일을 모르면서 살아가는 선비를 비유)처럼 세상일을 모르는 것에 대해 부러워하고, 석서碩鼠(큰 쥐,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는 위정자를 비유)들이 돈꿰미 차는 것을 탄식한다. 거기에 취해 있으니 걱정하는 마음은 해소할 수가 없다. 그런즉 모든 명예와 이익, 번영과 쇠퇴, 비방과 칭찬, 얻음과 잃음에 대해서는 오직 그렇게 몽매하여 자세히 보아도 보지 못한 것이 많고, 고요히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 많다. 정말로 취한듯하여 어떠한 일도 모른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이러한 무리들이 원하지 않는 바는 헐뜯는 것이다. 그래도 이 정자 주인장은 전혀 개의치 않고, 득실에 태연히 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칠 계책으로 삼았다. 이는 곧 주인장만이 이 세상 통틀어 유일한 바라.」

《 독취정기 –염석진(장흥·강진지역 유학자) 남곡유고 중에서》 -문림향기Ⅰ

가을 물이 곱다. 소리를 낮추고 흐르는 모습에 나를 비추어 본다. 나무를 가까이서 봤다. 듬직한 모습이 한없이 여유롭다. 나무가 늙을수록 고귀해지는 것은 세찬 비바람을 피해 가지를 뻗어가고, 햇볕이 많은 쪽으로 몸을 비틀어 부족함을 채우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은 서로의 조화 속에 움직이고 분명한 존재 이유가 있다. 우리의 삶도 존재와 조화 속에서 인연 따라 흐른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존이 위태로워지면 사력을 다해 마지막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어 유전자를 이어가기 위한 종족 보존을 본능적으로 나타낸다. 우리는 이것을 생물학적 용어로 앙스트블뤼테(Angstbiute) 라고 한다. 불안 속에 꽃을 피운다는 의미다. 식물도 불가능의 상황이 오면 혼신의 힘을 다해 꽃을 피운다. 인간은 불가능의 상황이 오면 어떤 꽃을 피울까. 언어를 내려놓고 뒤돌아보는 시간이 오늘따라 길어진다.

물오리 떼가 침묵을 강요하는 가을날, 예양강 유역 8정자를 더듬는다. 선조들은 자연에서 지혜를 배우고자 풍광이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자연을 음미하며 몸을 삼가고 절제된 은거의 삶을 살면서 시를 읊고 흥취를 즐겼다. 이러한 신기독愼基獨의 선비정신과 문인들의 글 숲을 이루었던 예양강 유역 8정자 중 유독 애잔하게 기억되는 독취정獨醉亭을 풀어놓고 싶다.

사그락사그락 가을을 밟는다. 소리가 몸을 자극하고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물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하는 산이다. 산으로 오르는 옛길은 끊겼고 누런 나뭇잎만 뒹굴고 있다.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길일까. 오갔던 사람의 흔적이 사라졌다. 오래전에 왔었다는 선배가 길을 안내하지만 옛길이 아닌 새길에서 걸음을 멈췄다. 강바람이 키 작은 나무를 흔든다. 독실보로 흘러드는 물의 고요와 하얀 꽃을 피워낸 갈대의 가벼운 몸짓을 바라보며 쓸쓸한 안도감에 사로잡혀 흐트러진 마음을 다독이고 있다.

폐허가 된 독취정 전경
폐허가 된 독취정 전경

미끄러지면 강물로 빠져야 한다.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저기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리를 찾아들었다. 강이 물든 것을 바라보며 취정낙조醉亭落照 라 경탄하였다는 독실보 위 기슭에 자리 잡은 독취정. 1933년 삼우당 김병용이 지어 풍영지소風詠之所를 삼았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산속에 홀로 산을 지키며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허름한 정자가 찾아온 이의 가슴을 붙들고 있다. 장흥 8경 중 하나인 독곡청풍 독취정이 벽은 터지고 마룻장과 구들장이 꺼져 삐거덕거린다. 튼실한 기둥도 버티기 힘들었는지 한쪽으로 기울었고, 문짝 하나 남아있지 않아 물안개와 강바람도 머물지 못한다. 정자 한 채가 고려장 중이다. 현판은 고사하고 그곳에서 읊었을 시 한 구절 걸려있지 않다. 남겨진 것이라곤 남곡 염석진(1855∼1955,장흥 출신) 남곡유고와 낙헌 김인섭(1884∼1949, 장흥 출신) 낙헌유고, 성암 이수혁(1878∼1952, 장흥 출신) 성암유고, 송포 정노수(1877∼1964, 장흥 출신) 송포유고에 시 몇 편이 전하여 ‘문림향기1’

(2016.12 장흥군 발행) 의 책자에 수습된 시문을 보며 위안을 삼는다. 스러져가는 독취정 기둥에는 얼마나 많은 애환이 서려 있을까. 마룻장에는 얼마나 많은 웃음과 흥취가 묻혀있을까. 구들장은 얼마나 많은 한숨을 담았을까. 다시 한번 찾아올 기회가 있을까. 다시 찾아올 때는 어떤 모습으로 마주할까. 주머니에 넣고 간 ‘남곡 염석진’ 선생의 시 한 편을 붙들었다.

『나뭇잎 떨어지고 돌길엔 찬바람 부는데 / 落木寒豊吹石逕

백발노인 혼자서 지팡이에 의지하네 / 扶黎孤客髮星星

취옹은 가고 없어 강산도 적막한데 / 醉翁亡去江山寂

해 지도록 배회하다 정자에 홀로 오르네 / 盡日徘徊獨倚亭』

《 남곡 염석진- 남곡유고에서 》 - 문림향기Ⅰ

독취정에 묶인 무거운 가슴 풀고 석정 이심상의 석정石汀조대와 추강 남효온이 때를 기다리며 은거했던 추강秋江조대 흔적사이에 독곡 정명세 선생이 마음을 세웠던 독곡조대獨谷釣臺를 찾아간다. 1576년 문과급제자로 해미현감을 역임했고,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김천일 등과 함께 순국한 독곡 정명세

(1550~1592). 독곡 선생의 조대 유허비를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산죽밭에서 마주했다. 독곡 정 선생 조대유허비 글씨가 선명한 비석 앞에 멍하니 서 있다. 무엇을 보러 왔을까. 동행한 선배도 말을 잃고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다. 조어옹釣魚翁은 은거를 상징하는 말이다. 당나라 왕유의 납량納凉(더위를 피하여)이라는 시 한 구절에 ‘강물에 양치질하고 발을 씻나니, 앞에 마주한 이는 낚시하는 노인장’(潄流復濯足 前對釣魚翁)이라고 했듯이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지만 곧은 선비의 정신이 숨어있다. 유허비에 새겨진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었다. 그리고 한참을 머물다 돌아 나오는 걸음이 무겁다. 자꾸만 뒤돌아 안부를 다짐하고 또 확인한 다음에서야 독실보를 유영하는 물오리 떼를 바라보며 험한 산길을 빠져나왔다. 오늘 하루는 궁핍 속에서 충만함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스러져 가는 정자를 품고 흐르는 독실보 푸른 물에 낮달이 떴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독취정이 불안 속에 피는 마지막 꽃, 앙스트블뤼테(Angstbiute)일까. 정자 뒤란의 단풍나무가 붉다.

▲폐허가 된 독취정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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