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성씨(1)/인천이씨- 인천이씨의 성세와 장흥파 인물들(상)
■장흥의 성씨(1)/인천이씨- 인천이씨의 성세와 장흥파 인물들(상)
  • 김선욱
  • 승인 2020.12.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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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조 이문화가 중시조, 15세 이효지가 장흥파 파조 돼
저명 선비‧문인 4인–이승·이민기‧이상계·이중전 등 배출
‘의향 장흥’ 빛낸 장흥동학 지도자 이방언·이사경 등 배출
현대-이영권 국회의원, 이종옥‧이명흠‧이승옥 군수 배출
인천이씨 장흥파 성지인 금계사. 1788년 인찬인씨 중시조인 공도공(恭度公)
이문화(李文和)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됐다. 恭度公 이문화(14세
1358~1414)선생을 주벽으로 모시 淸江 이승, 江東 이신립, 晩守齋 이민기
선생을 배향했다
금계사
금계사 내부
금계사 정면
금계사 전면

1. 시작하며

인천이씨 장흥파는 고대엔 문(文)과 의(義)에 빛나는 가문이었다. 장흥 가사 작가인 이상계 이중전 외에도 이승 이민기 등 유명 문인들 외에도 문집(遺集)을 남긴 이가 19명이었다.(유실된 문집 17권 포함하면 36권). 또 ‘의향 장흥’을 주도했던 장흥동학 혁명에서도 이방언 이사경은 장흥동학을 대표한 지도자였으니 인천이씨는 참으로 의(義)에서도 찬연한 빛을 주도했던 성씨였다.

현대에 와선 예술과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니, 예술에선 이창주(그림), 이승우(소설), 이성관 이한성 이대흠 이호연(시), 이봉준 이문갑(서예), 이병혁 이세규(한문학)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또 정치에선 이영권(국회의원), 이명흠 이승옥 이종옥(군수)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결국, 인천이씨 장흥파는 장흥의 전통인 문림(文林)과 의향(義鄕)을 대표하는 가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 인천이씨의 연원·역사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선계(先系)는 가야계의 허씨(許氏)다.

허 황후의 23세손 아찬(阿飡) 허기(許奇)가 755년에 사신으로 당(唐) 나라에 가, 당 현종(玄宗)으로부터 시서(詩書)의 선물과 황제 성(姓)인 이씨(李氏)를 사성(賜姓)하였고 신라로 귀국 후 경덕왕으로부터 소성백(邵城伯)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 호를 하사받았다. 이로써 허씨에서 이씨가 된 이허기(李許奇)는 인천이씨 득성조(得姓祖)가 된다. (김해김씨 시조는 가락국 수로왕 후예이고 수로왕의 장자 계통은 김해김씨로 차자는 어머니 허 태후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다. 인천이씨는 허씨에서 갈라지게 돼 후에 인천이씨, 허씨, 김해김씨는 선대가 같은 혈족이 된다).

인천이씨 득성조 허기(李許奇)는 소성부(지금의 인천) 동쪽 소래산 아래에 거주했으며 그 후손들은 대대로 신라의 대관이 되면서 인천 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세거, 토호 문신 세력으로써 복록 가문의 영달을 누리는 성씨가 되었다.

이후 인천이씨는 득성조로부터 10세 때인 이허겸(李許謙)이 1세조로, 인천이씨 세보(世譜)의 본관조(本貫祖)가 된다. 허겸은 고려 1024년, 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식읍일천오백호(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에 증직되었다.

이후 인천이씨는 시중공파(8세, 작신作臣), 공도공파(14세, 문화文和), 쌍명재공파(7세, 인로仁老), 충강공파(징옥澄玉)로 상계 분파되면서 번손할 수 있었다. 그 중 공도공파가 가장 번성하면서 공도공파 후손들이 인천 이씨의 80%를 이루고 있다.

고려조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 만큼 크게 번창하고 영화를 누렸던 성씨도 드물다. 많은 명공거경의 배출은 물론 국구(國舅)가 되어 자제(子弟)들도 두루 요직에 출사(出仕)하여 국권을 장악하고, 여러 명의 후비(后妃), 귀빈(貴賓)이 배출되며 권문세가와 혼인을 통해 인척을 맺음으로써 정종(靖宗)에서 인종(仁宗) 말에 이르기 까지는 벌족으로서 대단한 지위를 굳혔다.

공도공파의 파조는 이문화(14세, 李文和, 1358~1414)다. 그는 고려 말, 이조 초의 명신으로 평장사 문정공 이지저(李之氐, 1092~1145 : 문과 장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증직, 시호 문정공文正公)의 9세손이다.

문화의 자는 백중(伯中), 호는 오천(烏川), 시호는 공도(恭度)다. 문화는 1380년(고려 우왕 8년) 23세 때 문과 장원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지냈다. 고려 말 정난을 보고 벼슬을 버렸지만, 조선이 건국되자 좌간의대부로서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안렴사(安廉使)를 지냈으며, 조선 초기 유학진흥에 공(功)이 컸다. 도승지를 역임하고 첨서의흥삼군부사(簽書義興三軍府事)에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사후 시호 공도(恭度)가 내려지고 대광보국승록대부( 大匡輔國崇錄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장흥군 금계사(金溪祠), 대구광역시 숭덕사(崇德祠), 함안군 도천사(道川祠)에 배향되었다.

문화는 슬하에 6남을 두었는데, 이들 6남으로 인하여 공도공파는 6개 파로 재분파된다. 첫째는 호조판서를 역임한 효인(孝仁)-대구·용인파, 둘째는 공조판서를 지낸 효의(孝義)-함안·창원파, 셋째는 홍문과 대제학을 지낸 효례(孝禮)-청양·안의파, 넷째는 형조판서를 지낸 효지(孝智)-장흥·김천파, 다섯째는 예조판서를 지낸 효신(孝信)-부여·금산파, 여섯째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효상(孝常)-경주파로 각각 분파되었다.

인천이씨 장흥파의 시작

이중, 장흥파는 파조 15세 효지(孝智)로부터 16세 성해(成諧), 17세 연(椽), 18세 청길(淸吉), 19세 귀수(貴秀)로 이어지니 귀수(貴秀)는 장흥의 입향조가 된다.

장흥 종중의 파조 효지는 세종조(世宗朝)에서 세조조까지 4분의 임금을 모셨던 관리였다. 세종 때 김포현감, 문종 때 영천군수, 단종 때 상호군(上護軍)·의정부가정랑관(議政府 加定郞官), 세조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일등·강원도 관찰사(觀察使)·중추원부사(中樞院府使)·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의 요직을 거친다.

15세 효지와 16세 성해는 서울에서 살았지만, 17세 연은 전라도 광산(光山) 근처로 옮겨와 살았고, 19세인 귀수에 이르러 장흥으로 이주한다. (이귀수의 생몰년은 미상이다,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다고 인천이씨 세보에 전할 뿐이다).

인천 이씨 장흥 입향조가 된 귀수(貴秀)는 세 아들을 두었다. 첫째는 적(迪), 둘째는 달(達), 섯째 우(遇)이다. 첫째 적은 명교파(明敎派)로 보성 회천면 명교리, 둘째 달은 용계파(龍溪派)로 보성 회천면 신리를 비롯 장흥 부산면 용반·금장리, 완도 금일읍 사동리, 장동면 만년·용곡리, 장평면 축내·청룡·우산·봉림·용강리, 관산읍 지정리 등, 셋째 우는 남면파(南面派)로 장흥 용산 어서리, 회진 덕산리, 장동 만수리, 용산 금곡·어서·묵촌·접정리, 관산 신동리 등에서 각각 세거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이씨 장흥파는 비록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지만, 대대로 지역의 큰 선비로서 곧은 행실과 덕망을 쌓으며 장흥을 중심으로 전라도 남부에서 명망이 높은 집안이 되었다.

3. 인천이씨 장흥파 역대 인물

인천이씨 장흥파는 장흥 역사에서 걸출한 선비요, 문인(시인)이었던 4인의 인물을 배출하니, 청강 이승(淸江 李昇,1556∼1628), 만수재 이민기(晩守齋 李敏琦,1646∼1704), 지지재 이상계(止止齋 李商啓,1758~1822), 우곡 이중전(愚谷 李中銓,1825~1893)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승, ‘이괄의 난’ 때 창의…충효·지절 돋보인 문인

청강 이승(淸江 李昇,1556∼1628)은 자는 경첨(景瞻)이고, 호는 청강(淸江), 본관은 인천이다. 1606년(선조39)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괄(李适)의 난(1624, 인조2)에 창의하는 등 충의와 지절(志節)로 이름이 높았던 선비요, 지역의 큰 문인이었다.

그는 당대 충의와 효제(孝悌), 지조와 절개가 뚜렷한 올곧은 선비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33세 때 1588년에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하였으며, 51세 때인 1606년에 집안 어른들의 강권에 못 이겨 진사시에 응시, 진사가 되었지만, 당시 인목대비의 폐출을 계기로 다시는 과거장에 출입하지 않고 은둔하기로 하고 정자를 지어 독역재(讀易齋)라 명명하고 후학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성리학을 전심 탐구하여 대성하니 사림이 받들어 그를 큰 스승으로 모셨다.

또 보성 출신인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 : 조선 중기 유학자, 임란 때 의병 막하에서 참모로 활동했고, 정묘호란·병자호란 때 호남 의병장이 되어 출병했던 인물)과 벗하고 이괄의 난 때 창의모병을 하기도 했다. (이괄의 난이 조기에 진압되어 중도에 그쳤지만, 그의 충의와 기개를 알 수 있는 일이다).

또 70세 때 1625년 유일(遺逸)로 조정에 천거되어 상서원(尙書院) 직장(直長)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 (당시 이승의 천거는 장흥의 인천이씨 집안을 지역의 유력한 향반鄕班으로 좌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장흥의 유림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장흥지역 인사 대부분은 중앙에서 소외된 채 낙향한 가문의 후손들이었는데, 이승의 천거는 이들에게 가문 재건의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었고, 이후 지역의 문풍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지역의 대표적인 선비였던 이승은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건립을 주도하기도 했다(만수재유고).

청강은 유작으로 상하권 2권 1책으로 된 <청강유집(淸江遺集)>을 남겼다. <청강유집(淸江遺集)>에는 특히 부(賦) 27편이 실려, 그의 문장가가로서 재능과 역량을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시(詩) 14수(오언절구 2수, 칠언절구 8수, 오언율시 3수)가 실려 그의 시인으로서 역량을 한껏 드러내 주고 있다. 사후에 그는 장흥의 금계사(金溪祠)와 당곡사(唐谷祠)에 향사되었다.

이민기, 벼슬 마다하고 처사로 산 대문인

만수재 이민기(晩守齋 李敏琦,1646∼1704)의 자는 경징(景徵), 호는 만수재(晩守齋),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장흥읍 건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원욱(李元郁)이 일찍 죽은 관계로, 이민기는 어머니 순창조씨(淳昌趙氏)의 가르침 속에 자랐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덕성이 순수하고 고상했다고 한다.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글 읽기를 좋아해서 15세 이전에 경서(經書)와 예설(禮說)을 거의 다 섭렵하여 그 대략적인 뜻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그는 또 장흥으로 유배온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에게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배웠으며, 당대 성리학의 대가였던 우계 성혼(牛溪 成渾,1535~1598)의 학문 등을 수학하였다. 또 한 마을에서 살았던 선대의 인물 천방 유호인(天放 劉好仁,1502∼1584)의 학통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민기는 1681년(숙종 7)에 식년시(式年試)로 생원(生員)이 되었다. 뒤에 유배가 풀려 서울로 올라간 이후 민중전이 그를 여러 벼슬에 추천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다. 1699년(숙종 25) 책문일교문관학(策問一敎問官學)으로 동당시(東堂試)에 장원, 책문이(策問二) 관학으로 입격하였지만 역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평생을 만수동에서 처사로서 성리학에 궁구하고 후학을 강학하다 생을 마쳤다.

사후, 1823년에 인천이씨 족보를 시간(始刊)하고 향림에 끼친 공으로 제유림의 공의로 선사(先祠)인 금계사(부산면 섭곡리)에 배향되었고, 1988년 노붕 선생의 수제자로 통칭이 되고, 장흥의 대표적 서원인 연곡서원 창시의 공(연곡서원淵谷書院 설립 주도- '청강유집' '정명열 운암집')을 기려 제유림의 발의로 연곡서원에 추배되었다.

만수재는 유고로 『만수재유고』(天地人)로 6권으로 된 3책을 남겼는데, 특기할 것은, 제1책 제1권에서 오언율시 23수, 칠언율시 47수, 칠언절구 35수, 만시(挽詩) 12수 등 모두 117수의 시를 남긴, 당대의 대시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694년(숙종 20)에 정읍(井邑)에 원재서원(元齋書院)을 세울 것을 상소하였고, 1696년(숙종)에는 연곡(淵谷)에 노봉서원(老峰書院)을 세우는 일을 하였으며,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를 연안(延安) 비봉서원(飛鳳書院)에 배향하는 것을 주도하였던, 장흥의 큰 선비였다.

이상계-대시인으로 장흥가단의 주역

이상계의 자는 군옥(君沃獄), 호는 지지재(止止齋), 또는 관송(觀松)이고,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1758년(영조 34년)에 용산면 접정리 묵촌마을에서 아버지 은정(隱亭 李宗震, 1729∼1806)과 남평문씨의 3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지재는 어려서부터 성도(性度)와 의범(儀範)이 남다르게 뛰어나고 군자적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자라면서는 성현의 본을 받는 유학적 학문에 전심하여 바른 예절과 효행을 실천하는 군자로서 모범을 보였다고도 한다.

1774년 17세 되던 해, 모친이 43세의 젊은 나이로 졸하고, 이듬해 1775년에 영광정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면서 부득이 과거응시의 뜻을 접었지만 주경야독하며 성리학을 궁구하였고, 가세의 빈곤 속에서도 효행과 범절을 잊지 않아, 지방 유림계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또 초당에서 어린 학동들에게 유학의 경전이나 관혼상제 절차까지 가르치며 학문하는 선비로서 향민 교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불용산(부용산) 가단(歌壇)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지지재가 지은 가사 ‘초당곡’과 ‘인일’는 원근에 널리 유포되어 그의 유학적 소양과 명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51세인 1808년에는 불용산 아양동(峨洋洞)에 ‘지지재(止止齋)’라는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수많은 시문을 작시하였는데, 그의 유고집(2권 1책) 『지지재 유고(止止齋遺稿)』에 수록된 작품들은 거의 이 초당에서 창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61세 때에 지역의 9명의 문인이 모인 ‘관산구로회(冠山九老會)’를 결성하고 시사(詩社) 모임을 활발히 주도하기도 했으며 장흥의 기양사 (岐陽祠)건립을 주도하기도 하였다('지지재유고').

평생을 처사로서 특히 시문에 뛰어난 대시인이었던 그는 『지지재 유고(止止齋遺稿)』에 한시 79수, 문장 2편 외에도 가사작품으로 ‘초당곡’ ‘인일가’ 2편 남겼다. 사후 96년 이후인 1917년에 그의 7대조 청강 이승(淸江 李昇,1556~1628)을 모신 당곡사(唐谷祠-용산면 어산리)에 합치되었다.

그 밖의 주요 문인들-우곡, 이신립, 이인수 등

인천이씨 출신 중 대표적인 문인인 이승‧이민기‧이상계 외에도 장흥 가사 작가 중 한 사람이 되는 우곡 이중전(愚谷 李中銓, 1825~1893)도 인천이씨 장흥파 출신이었다.

이중전의 자는 화집이고 호는 우곡(愚谷)이고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 관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곡의 집안은 5대를 이은 효자 가문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이성한(李成漢, 1609∼), 이성한의 장남 이광인(李光寅, 1719∼), 이성한의 손자 이창곤(李昌坤, 1750∼), 이광인의 손자 이재영(李在英, 1808∼1877)에 이어 이창곤 손자 우곡 이중전(愚谷 李中銓)도 효행으로 이름이 높으니, 이른바 5대 내림에서 효행의 표본이 되었다.

특히 우곡의 경우, 효행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문장을 잘 하기로 유명했다. 성품이 강직하여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평생을 독서와 훈도로 지낸 우곡은 가세가 어려운 가운데서 서당까지 세워 후세 교육에 열정을 쏟기도 했다.

우곡은 문집 『우곡집(愚谷集』을 남겼다. 특히 문집에 실린 가사 ‘장한가’는 국한문 혼용으로 돼 있어 국문학적 가치도 크다. 이 ‘장한가’는 경세적이고 교훈적인 주제의 가사로 664구의 긴 가사다. ‘장한가’ 전반부는 선생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도덕사상에 근거하여 노래하였고, 후반부는 금강유람을 소망하는 심경을 읊었는데, 한 작품 안에 두개의 주제를 담아 노래한 점이 특이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밖에, 이신립은 자는 계연(季然), 호는 강동(江東)이다. 공도공(文和)의 11대손, 윤정(允禎)의 현손이며, 호(昊)의 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624년 이괄의 난 때 형 충립과 진무공신에 훈록되고 통정대부로 성천첨절제사와 강동현감을 지냈다.

이인수(李仁壽)는 자는 덕로(德老), 호는 오재(梧齋)이다. 공도공(文和)의 12대손으로 2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병마우후(종3품), 통훈대부 행 군위 현감(제63대), 남해 현령을 지냈으며 선정을 베풀어 청백비가 세워졌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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