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 ‘文林(11)’/고려- 장흥산문(1)-정세운 노포露布, 이색의 정세운 찬(贊)
■문림의향 ‘文林(11)’/고려- 장흥산문(1)-정세운 노포露布, 이색의 정세운 찬(贊)
  • 장흥투데이
  • 승인 2021.02.2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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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운- 홍건적 대파 후 승전문 선포- 『동문선』 수록

이색 –정세운 贊 ‘증시중정공화상찬’-『동문선』 수록
김선욱/본지 편집인

고려조 장흥문학에서 산문은 장흥인으로는 고려말 정세운의 산문(노포문), 외지인이 쓴 산문으로 정명국사 천인(靜明國師 天因,1205∼1248)이 쓴 ‘천관산기’와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 ~1396)이 쓴 정세운(鄭世雲, ?~1362)을 찬(贊)한 '증시중정공화상찬贈侍中鄭公畵像贊'과 ‘중령산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基’ 3편이다.

먼저 장흥인 정세운의 산문에 이어 외지인의 산문 으로 이색의 산문 2편과 천인의 1편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정세운은 무장이었음에도 문(文)에 뛰어난 장수였다.

정세운이 홍건적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사서에는 2건의 기사가 기록돼 있다. 첫 번째 기사에서 ‘승전보’가 전해진 후 왕이 취한 초치에 대한 것이다. 즉 “경오 정세운鄭世雲의 승전보가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왕이 내첨사內詹事 이대두리李大豆里를 파견하여 정세운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였다. 참정叅政 이인복李仁復을 파견하여 나라의 역사 기록[國史]과 비밀리에 보관해 둔 도서[秘書]들을 회수하게 하였다. 庚午 鄭世雲露布至行在, 王遣內詹事李大豆里, 賜世雲衣酒. 遣叅政李仁復, 收國史秘書”《고려사>卷四十>世家 卷第四十>恭愍王 11年>1월 23일》의 기록이 그것이다.

두 번째 기사는 정세운의 승전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기사이다.

즉 공민왕 11년(1362)에 정세운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경성京城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물러나 도솔원兜率院에 주둔하였다. 적을 평정하자 대장군 김귀한金貴漢과 중랑장中郞將 김경金京을 보내어 승리를 알리는 글[露布]을 받들고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가게 하여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일찍이 세상을 구제할 마음을 품으시고 널리 인재[俊彦]를 구하셨는데, 〈신은〉 군무를 맡으라는 명령을 삼가 받들고서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 十一年世雲督諸將圍京城, 自退屯兜率院. 賊平, 遣大將軍金漢貴·中郞將金景, 奉露布詣行在曰, “嘗軫濟世之心, 旁求俊彦, 敬承分閫之命, 恐累聖明. …” 《고려사>卷一百十三>列傳 卷第二十六>諸臣>정세운》 이다.

두 번째 기사에서 ‘승리를 알리는 글’은 노포(露布)였다고 표기돼 있다. 노포는 (대장이) 일반 백성과 부하 병사들에게 선포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당시 정세운이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임금에게 올린 승전문과 백성과 부하들에게 선포한 노포문이 별개의 문건이 아니고, 임금에게 올린 승전보가 곧 노포문였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임금에게 승리를 알리는 글이 별도의 《동문선》의 노포문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정세운은 ‘노포문’은 별도의 문건으로 《동문선》에 수록돼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홍건적 평정 후 정세훈의 노포(露布)

(노포는 전쟁에 적병을 쳐서 승리하면 비단에다 글을 써서 간(竿)에다 달아 일반에 선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노포는 무명씨 이름으로 《동문선 제49권 노포露布》에 등재되었지만, 내용이 《고려사>卷一百十三>列傳 卷第二十六>諸臣>정세운》 편의 정세운의 노포문과 동일, 정세운의 사후, 무명씨의 이름으로 선포된 노포로 보인다)

총병관 중서평장사 정세운이 홍건적을 평정한 노포露布

임금께서 일찍이 세상을 건질 마음을 품으시와 널리 인재를 구하셔 삼가 장수의 임명을 받게 되매, 임금의 알아주심에 누가 될까 걱정하였다. 나는 듣건대, 흥하고 쇠하는 것은 기수(氣數)에 매였으므로 다스리고 어지러움이 그지없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요점으로 도적을 막아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버린 것은 능히 적(狄)의 괴롭힘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요, 명황(明皇)이 촉(蜀)땅에 거동한 것은 안록산(安祿山)의 침범을 막지 못한 것이다. 적미(赤眉)를 쓸어 없애고서야 유(劉)씨의 한(漢) 나라는 중흥이 되었고, 황건(黃巾)을 파하고 나서야 조(曹)씨의 위(魏) 나라는 이어 받게 되었다. 모두 생각하면 시운(時運)인 것이요, 한갓 사람의 탓만은 아니다. 지난해 동지달에 죄악이 많은 억센 도적을 만났는데, 그의 독함을 말하면 승양이나 범으로도 같을 수가 없고, 그의 군대 진행하는 것을 보면 또한 손빈(孫臏)이나 오기(吳起)로도 막아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방자하여 지니 세상에서는 누구냐 하는 이도 없었다. 승전한 기세를 타서 몰아 들어와 이미 천하에 횡행하였고 멀리 제휴하여 바로 들어오기는 이내 우리 나라에 까지 기세를 떨쳤다. 성낸 기세를 당적할 수가 없어 소문만 들으면 모두 저절로 무너졌다. 백 만이나 되는 억센 군대는 어느덧 서울 안에 들어왔고 억조(億兆)의 이 나라 백성은 행길에서 떠돌았다.

가엾다. 백성들은 도탄(塗炭)에 빠졌고 하물며 임금이 멀리 파천하셨음이야 실로 장상들의 깊은 근심이었다. 그리하여 구름같이 모여드는 군대를 가지고 드디어 개미떼 같은 오랑캐를 쳐부수었다. 우리 군대는 병에 물 쏟아지듯 하는 세력이니, 적에게 달려들기 무엇이 어려우며 저 놈들은 쪼개지는 대쪽처럼 칼날 닿는 대로 문득 찢어졌다. 천하에서 억제하지 못하는 놈을 베어죽였다. 물고기가 솥 가운데에서 숨을 쉴 것이냐 토끼는 그물 밖으로 벗어나기 어려웠다. 전단(田單)의 일시적인 기묘한 방법은 본 따를 것이 없고 제갈량(諸葛亮)의 팔진(八陣)이 스승될 만하였다. 눈 속에 성을 쳐들어가니 이소(李愬)는 채주(蔡州)땅을 빼앗았고, 도망가지 못할 강물을 배후에다 두고 진을 쳤으니 한신(韓信)은 조(趙) 나라 성에 꽂힌 기(旗)를 뽑고야 말았다. 일은 비록 같지 않으나 이치는 진실로 합한 것이다. 지난번 기해년에 군사를 모집하여 일찍이 도둑놈을 조선에서 쓸어 없애고 두 번이나 도적이 억세게 달려든 것을 이기고야 말았으니, 모두 신 등의 공적이 아니오, 이는 대개 전하(殿下)의 용맹과 지혜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며, 성스럽고 공명함이 날로 높아서 멀리 아름다운 바람을 퍼뜨리매 예(禮)와 풍악[樂]을 삼대(三代)에 따른 것이요, 크게 문덕(文德)을 펴 간우(干羽)의 춤을 뜰에서 추었다.

올빼미 같은 놈들은 순종하게 되고 견양(犬羊) 같은 놈들도 항복하였으니, 성인의 덕화에 관계되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또한 지극한 인애(仁愛)의 품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치의 자연함이요, 비운(否運)이 가면 태운(泰運)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는 중흥의 시기이며 실로 다시 시작되는 처음이다. 신들은 감히 매[鷹]처럼 날치는 용맹을 뽐내어 아침나절에 청명하게 되도록 하지 아니하리까. 기뻐 뛰는 정성을 펴서 행재(行在)를 우러러 바라지 아니하랴.

*태왕이 …… 버린 것 : 주(周) 나라 태왕이 강성한 적(狄)의 침략을 당하여 힘으로 당할 수 없으므로 도성인 빈(邠)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겨 갔다.

*적미(赤眉) : 서한(西漢) 말기의 도적인데 군사들이 눈썹에 붉은 칠을 하였었다. 한(漢)을 중흥시킨 유수(劉秀)가 적미를 쳐부수었다.

*황건(黃巾) : 동한(東漢)의 말기에 장각(張角)이 반란을 일으키며 군사들이 모두 누런 수건을 썼다. 조조(曹操)가 황건을 부수었는데 뒤에 위(魏) 나라 임금이 되어 한(漢)을 대신하였다

*손빈(孫臏)과 오기(吳起) : 전국시대에 군사를 잘 쓰던 명장(名將)

*전단(田單) …… 방법은 : 제(齊) 나라 장수 전단(田單)이 연(燕) 나라와 싸우면서 소[牛] 천 마리를 모아 몸에 붉은 비단을 입히고 뿔에는 칼을 매고 꼬리에는 갈대를 달고 기름을 치고는 불을 질러서 연나라 군중으로 달려가게 하여 칼 달린 뿔로 연나라 군사들을 찔렀다.

*제갈량(諸葛亮) … 스승될 : 어복포(魚復浦)에다 돌을 모아 팔진(八陣)을 만들어서 적병을 막은 일이 있다.

*한신(韓信) … 말았다 : 한(漢) 나라 장수 한신(韓信)이 조(趙) 나라와 싸울 때에 군사 2천 명을 조의 성 근처에 매복하여 두고 싸움에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조의 군사들이 성을 비워두고 추격하였다. 그 틈에 매복했던 군사가 조의 성에 들어가서 조의 기(旗)를 뽑아버리고 나라의 기를 세워 두었더니 추격하러 나갔던 군사가 점령당한 줄 알고 놀래 요란하였다.

*삼대(三代) :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가 고대에 가장 태평하고 문화가 빛났다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揔兵官中書平章事鄭世雲平紅賊露布[無名氏] ; 甞軫濟世之心。旁求俊彦。敬承分閫之命。恐累聖明。竊聞興衰有數。理亂無窮。安民之要。禦寇爲難。大王去邠。未能防狄人之逼。明皇幸蜀。不得制羯狗之侵。掃赤眉而劉漢重興。破黃巾而曹魏繼統。悉惟時運。匪獨人爲。當去歲之仲冬。値滔天之勍敵。論其肆毒。雖豺虎之莫如。觀其行兵。亦孫吳之難抗。日將自恣。世無誰何。乘勝長驅。旣橫行於天下。遠引直入。遂大振於海東。怒鋒不可當。望風皆自潰。百萬精甲。奄屯住於都城。億兆斯民。蕩流離於道路。嗟哉黎烝。甚於塗炭。况乘輿之遠狩。實將相之深憂。肆擧雲合之兵。遂攻蟻聚之虜。士卒得建瓴之勢。赴敵何難。頑嚚爲破竹之魂。迎刃輒解。制天下所不能制。誅一世所不能誅。魚可息於鼎中。兔難脫於網外。田單一奇何足法。葛亮八陳可爲師。凌雪入城。李愬取蔡州之地。背水爲陣。韓信拔趙壁之旗。事雖不同。理則允合。昔蒐兵於己亥。曾掃賊於朝鮮。再克寇侵之強。皆非臣等之績。玆盖伏遇殿下。勇智天錫。聖敬日躋。遠播休風。遵禮樂於三代。誕敷文德。舞干羽于兩階。梟獍之所以馴。犬羊之所以伏。無不關於聖化。亦皆囿於至仁。理之自然。否則復泰。斯乃中興之際。實是更始之初。臣等敢不競奮鷹揚之勇。致淸明於會朝。載伸鼇抃之誠。佇瞻望於行在。- 《동문선 제49권〉노포》

장흥인 정세운을 찬(贊)한, 목은 이색의 글이다.

이 글은 《동문선 제51권〉贊》에 전하고 있다.

증 시중 정공화상 찬 병서 (贈侍中鄭公畵像贊 幷序)-이색(李穡)

수문하시중 광평부원군(守門下侍中廣平府院君) 이공(李公)이 임인(壬寅)년에 여러 장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했는데, 그 총병관(總兵官)은 곧 찬성사상의 응양군상호군(贊成事商議鷹揚軍上護軍) 정세운(鄭世雲)이었다. 원수(元帥) 세 사람은 총병의 공적이 자기네보다 위에 올라감을 시기하여 부하를 시켜서 끄집어내어 그를 해쳤다. 세 원수는 비록 죄를 받고 죽었으나 세상에서 정공을 슬퍼하는 마음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광평공은 생각하기를 “정공의 이름은 영원히 전하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후세에서 알지 못할 터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하였다. 또 이르기를, “능연각(凌烟閣)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옛날 제도이긴 하지만 지금에는 실시되고 있지 않으니 그의 화상을 그려서 철을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하는 편이 낫겠다.” 하였다. 이미 완성되매, 한산 이색(韓山李穡)에게 청하여 찬을 지으라 하였다. 색이 광평군과는 함께 승선(承宣)으로 있으면서 공민왕을 섬겼다. 그러므로 정공이 비상한 인물임을 알았다.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어 비위를 맞추려한 적이 없었고 뜻을 확고히 가져서 조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신축(辛丑)년에 남쪽 복주(福州)로 옮겨갈 때에 임금이나 신하가 북쪽을 염려하는 마음이야 다시 말한들 무엇하리오, 정공은 비장히 가기를 자청하였다. 열흘남짓 한달이내에 나라가 다시 안정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 옛적 현종(顯宗)때에 강시중 한찬(姜侍中邯贊)이 경술(庚戌)년에 남쪽으로 행차 하실 것을 청하고 무오(戊午)년에는 북방에서 적을 막아냈으니, 그 공적이 탁월하였다. 근세에 금산 김씨(金山金氏)가 영토를 침범할 적에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의 공적이 컸고, 기해(己亥)년에 모적(毛賊)이 서경(西京)을 침범할 적에 총병(總兵) 이승경(李承慶)의 힘이 컸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영토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강시중(姜侍中)처럼 두가지의 계책이 한 몸에서 일어난 것과 비교될 것이 아니었다. 현종(顯宗)은 금성(錦城)까지 가셨고 공민왕은 복주(福州)까지 가셨으니, 아아 참아 말할 수 있는가. 정공은 남쪽으로 행차하기를 결정할 때에 참여하였고 또 능히 모든 군대를 통솔하고 여러 적들을 쫓아내어 홀로 큰 공을 세웠으니 그 위대함은 강공과 맞세울만 하였다. 그러나 강공은 개선(凱旋)할 때에 현종이 친이 교외에까지 나아가서 맞이하였고 시를 지어주어 그를 표창했으니, 그런즉 곧 정공이 불행을 당한 것은 공민왕으로서의 슬픔이었다.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까닭이었는가. 아아, 슬프다. 아아, 슬프다. 뒷날 정공의 화상 앞에 경례를 올리는 사람은 이 화상이 광평공(廣平公)에 의하여 만들어진 줄 알터이니 반드시 천년 뒤에라도 경의를 표하면서 이르기를, “정공이 진실로 공이 있었다. 그러나 광평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정공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랴.”할 터인즉 광평공이 선을 좋아한 실효가 더욱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길게 읊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정씨는 광주 장택현(光州長澤縣) 출신이며 공민왕 11년의 공신이다. 아우는 세문(世文)이며 아들은 없다. 찬에 이르기를, “아아, 정공이여, 겉으로는 소박하며 안은 확고하였다. 공민왕의 공신으로 병신(丙申)년에 출발하였다. 적(賊)이 중국에서 두루 돌아다니다가 우리 영토에까지 침입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무력을 피하였는데 공은 마침내 적을 내쫓았다. 이미 그들을 무찔렀는데 부하가 공을 해쳐버렸네. 해친 자들도 다 없어졌으니 아아,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없었던가, 강공(姜公)은 옛날 일이지만 공의 위대함, 그와 맞서리로다. 우리 광평군 아니었으면 누가 그리며 누가 기록했으랴. 송악산(松嶽山) 푸르른데 우리 명당(明堂) 웅장할사, 정공의 영향은 영원하게 전하리라.”

ⓒ한국고전번역원|임창순(역)|1968

贈侍中鄭公畫像贊 幷序

守門下侍中廣平府院君李公。在壬寅歲。甞與諸將。克復京城。其捴兵官則贊成事商議鷹揚軍上護軍鄭世雲也。三元帥忌捴兵功在己上。嗾麾下士突出害之。三元帥雖伏辜。然世之悲鄭公。至于今不置。廣平公以爲鄭公之名。可傳而不朽矣。然其容儀也。後世無得而知之。豈不悲哉。又曰圖形凌烟。雖古制也。今又不行。莫如寫其眞。時節致祭之爲便也。旣成。請韓山李穡爲之贊。穡與廣平公。俱以承宣事玄陵。故知鄭公非常人也。事上忠。未甞小有所承迎。持志確。未甞小有所變易。辛丑之南徙于福也。君臣北顧之思。復何言哉。鄭公慨然請行。旬月間。宗社復安。豈偶然哉。在昔顯廟時。姜侍中邯贊。庚戌請南幸。戊午禦敵北鄙。其功烈卓然矣。近世金山金氏之侵疆也。趙冲,金就礪之功大矣。己亥毛賊之犯西京也。揔兵李承慶之功大矣。然皆封疆之事而已。非姜侍中二策出于一身之比矣。顯廟至錦城。玄陵至福州。嗚呼可忍言哉。鄭公與於决策南幸。又能揔諸軍掃群醜。獨立大功。足以儷美於姜公矣。然姜公凱旋。顯廟親迓于郊。賜詩以褒之。則鄭公之不幸也。玄陵之痛傷也。天曷故焉。嗚呼悲夫。嗚呼悲夫。後之禮鄭公之眞者。知眞之作於廣平也。必起敬於千載之下曰。鄭公信有功矣。然非李廣平。何由而覩鄭公之容儀乎。則廣平好善之實益著矣。可不長言之乎。鄭氏出光州長澤縣。玄陵十一年功臣也。弟曰世文。無子。贊曰。於維鄭公。樸外確中。玄陵功臣。發于丙申。賊徧中國。侵我邦域。我避其鋒。公乃出敵。亦旣殲之。而下害而。害而俱亡。嗚呼不思。姜公遠矣。公則儷美。匪我廣平。孰圖孰志。松山蒼蒼。壯我明堂。鄭公之風。播于無窮。-《동문선 제51권〉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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