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전식-제6∼제10대 국회의원 5선, 국회의원 성공승률 100%
길전식-제6∼제10대 국회의원 5선, 국회의원 성공승률 100%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9.0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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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물(5)/정치인 길전식
고향 장흥 발전에 무관심-고향에서 부정적 평가 낳기도
공화당 사무총장 역임- 여권 실세로 급부상하다

길전식(吉典植, 1924년 10월 27일~2011년 12월 21일)은 장흥 출신의 대한민국 군인 겸 정치인이다.
제6대국회의원을 역임한 이후 내리 5선(6~10대)을 기록했으며,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해평인(海平人)이며 호는 남강(南崗)이다. 3·4공화국 여권 실세이던 남강은 87세 나이로 2012년 12월 21일 영면하였다.

남강은 연희대학(현 연세대)을 졸업하고 육사(8기)에 들어가 방첩부대 정보처장 시절 5·16혁명에 참여, 중앙정보부 3국장, 공화당 원내부총무, 국회 상공위원장을 역임했던, 장흥이 낳은 유명 정치인이었다.
남강은 1924년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 연희전문학교 문과,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사실 원래부터 군에 들어가려던 건 아니고, 연세대에서 말을 타는 승마부 학생이었는데. 1949년 육군 기병대대가 창설되면서 군 관계자가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군대에 입대하라”고 권유하면서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했던 것이다.
육사 정규 8기생들은 6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지만, 길전식 등 대학교 출신의 승마부원들은 2개월만 교육을 받고 사관후보생으로 활동했다.(김종필, 길재호 등과 육사 동기)이후 남강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였다.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63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장흥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6대 이후 제10대까지 5선에 당선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제7대국회의원선거’ 때 길전식의원의 벽보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제7대국회의원선거’ 때 길전식의원의 벽보

제6대 국회의원 선거는 제5대 자유당 소속의 국회의원으로 1960년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와 관련, 그 책임에 자유롭지 못하던 손석두가 공민권이 풀리면서 민주공화당으로 출마하였지만, 공천에서 신진의 길전식에게 밀려 본선에 출마하지 못했고, 무계 고연완도 출마하지 않았다.
이때의 후보는 길전식 외에 김영태, 박석교, 김형배가 출마했지만, 당시 민주공화당의 성세를 등에 업은 길전식을 이겨내지 못했다. (▶길전식/민주공화당/15,643표/ 득표율 31.3% ▶김영태/신민당/12,274표/24.6%▶박석교/국민의당/9,867표/19.8%▶김형배/민주당/3.650표/7.3%)
당시 길전식은 39세였고 본적은 서울, 주소는 장흥읍 신흥리 15번지였다.
제6대 국회의원이 된 길전식은 이후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에 이르기까지 5선에 성공하는 등, 선거에 나섰다하면 이기는 100% 승률을 자랑하게 되었다.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당선되었다.(▶길전식/민주공화당/25,932표/52.0% ▶김영태/신민당/15,813표/31.7% ▶손석두/자유당/5,035표/10,0% ▶이양래/한국 독립당/3,119표/6.3%)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상공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길전식/민주공화당/29,947표/60% ▶고영완/신민당/17,560표/35% ▶문숙렬/대중당/202표/1.0% ▶기타…)
1971년 같은 해부터 1978년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維新)’의 비상 사태 특별 선언으로, 제8대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중지되었으며 1972년 12월 27일 ‘유신 헌법’이 공포되면서 정치 활동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1973년 2월 27일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선거는 1 선거구에서 2인씩 선출하는 중선거구제가 실시되어 장흥군은 강진영암완도군이 포함된 전남의 제8선거구가 되었고 국회의원도 2명을 선출하게 되었다.
이때 장흥의 길전식과 강진 출신의 황호동 후보가 당선되었다.(▶길전식/민주공화당/89,035표/44% ▶황호동/신민당 58,218표/28% …)
1978년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선거도 중선거구제로 실시되었고, 이 선거에서도 길전식과 강진 출신의 윤재명 후보가 당선되었다.

■‘10.2 항명 파동’ 후 길전식 정치 전면에

8년 공화당 사무총장 …‘정치 실세’ 유지

남강이 정치 전면에 나선 것은 1971년 구(舊) 주류가 대거 퇴진한 ‘10·2 항명 파동’이 기점이되었다.
당시 공화당은 백남억·길재호·김성곤·김진만의 ‘4인 체제’가 권력을 독점했고 박정희대통령은 이들을 견제하려 했다. 당시 4인방은 김종필 총리와도 경쟁 관계였다.
1971년 10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들과 동조의원 주도로, 4인방 견제에 앞장섰던 오치성 내무무장관 해임안이 전격 통과되면서 정국에 파장이 일었다.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으로 김종필과 함께 ‘5·16’을 주도한 핵심 8인 중 한 명이 오치성이었다. 오치성은 공화당 소속으로 6대 전국구 의원, 7·8·10대 지역구(경기 포천-가평-연천) 의원 등 4선 의원을 지냈으며 1969년 공화당 사무총장, 70년 정무담당 무임소 장관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1971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을 총리로, 오치성을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오치성 등의 발탁은 69년 3선 개헌을 성공시킨 뒤 권력화된 공화당 4인방(김성곤·백남억·길재호·김진만)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알려졌다. 내무부장관이 된 오치성은 대폭적인 경찰 물갈이에 나섰다.
당시 “각 도의 경찰국장들이 상당액의 활동비를 김성곤(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부터 매달 받고 있었다. 경찰국장들이 내무장관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무슨 일이 생기면 김성곤에게 먼저 보고했다. 오치성은 4인방의 손발 노릇을 했던 경찰을 대거 교체했다.” (『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

그러던 차에 1971년 9월 30일 야당인 신민당은 오치성 내무장관,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신직수 법무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국회의원 204명 중 공화당
이 113명이었다. 집권당이 마음만 먹으면 부결시킬 수 있었지만 10월 2일 표결에서 유독 고인의 해임안만 가결됐다(찬성 107, 반대 90, 무효 6표). 이른바 ‘10·2 항명 파동’이었다.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주동자를 색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여기서 주도자로 지목된 길재호·김성곤 의원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정계를 떠났다.남강은 이 사태 4개월 전에 공화당 사무총장에 임명됐었다. 사태 후엔 청와대를 오가며 수습 역할을 맡게 됐다. 길재호·김성곤 의원과도 끈끈했던 길전식은 “함께 고
생하던 동지들인데…”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남강은 이후 8년간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당무·자금·공천을 주무르는 핵심실세로 부상했다. 치밀하면서도 구김없는 성품으로 야당과 두루 교류했으며, 군(軍) 색채가 적은 인사로 평가됐다.

■80년 이후 은퇴…박대통령 선양사업 주력

▲2009년 5월 28일, 민족중흥회 정기총회에서 길전식 전의원(중앙)
▲2009년 5월 28일, 민족중흥회 정기총회에서 길전식 전의원(중앙)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길의원의 ‘승률 100% 성공신화’도 막을 내렸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지만 이후 남강이 전념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 선양사업이었다.
그는 민족중흥회 회장을 맡아 ‘박정희 정신’을 전파하는 데 주력해 왔다. 남강은 2011년 사망하기 전까지도 왕성하게 대외활동을 했다. 또 매년 10월 26일이면 박정희 대통령 추도식 행사를 개최해왔다. 사망 한 달 전인 2011년 11월, ‘고 박정희대통령 정신문화 선양회’를 발족하기도 했다.

이단체는 그 이후로도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확대하였는데 이는 2011년 12월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길전식 의원과 관련, 고향 장흥군 일각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이른바, 8년 동안 여당인 공화당 사무총으로 재임하면서 고향 장흥군 발전에는 전혀 무관심했다는 점에서였다.
남강의 유족으로 부인 유명숙씨와 두 딸이 있다. 고인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남강의 아우-아이스하키 산 역사 길회식

한편, 남강의 친 동생으로 대한민국 아이스하키의 산 역사이자 ‘큰 별’이었던 길회식 선생이 있었다. 공화당 ‘실세’이던 길전식 공화당 사무총장이, 정치계에 입문을 간절히 바랬고, 또는 동생에게 공무원 쪽으로 일을 해 보라고 권유했고, 또는 정치적 혜택을 주려고 했지만 이를 일체 거부하며, 평생을 아이스하키인으로 살았던 길회식 선생의 동
생과 얽힌 일화는 유명하다.
고(故) 길회식 선생은 일제 치하의 휘문고보(현 휘문고) 시절부터 아이스하키 선수였으며, 연세대에 진학한 이후로는 평생 연세대 아이스하키를 떠나지 않았다.
1960년대 초부터 20여년 동안 연세대 아이스하키 코치 감독을 지냈다. 이후 각종 국내외대회 단장, 협회 임원 등 역시 얼음판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길회식 선생은 2016년 2월13일 향년 90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길전식 프로필>
△1924년 10월 27일~2011년 12월 21일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졸업(1943년)
△경복고등학교 졸업
△1947년 연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졸업
△1948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7기 졸업
△1952년 미국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졸업
△1953년 대한민국 육군보병 학교 고등군사반 졸업
△1955년 대한민국 육군기갑학교 고등지휘반 졸업
△1957년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졸업
△육군 대령 예편, 중앙정보부3국장
△1963.12~1980.10 제6대제7대제8대제9대제10대 민
주공화당 국회의원
△1971.06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1970.03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1965.02~1980.09 대한승마협회 회장
△1976.02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대한승마협회회장
△KOC부위원장 겸 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연세체육회장
△민족중흥회 회장
▲충무무공훈장 2개, 근무공로훈장
▲저서-<선거와 국회, 우리 대통령>
▲종교/취미 : 카톨릭, 승마, 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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