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수상 - 어제를 위로하고 오늘을 토닥이며
장흥수상 - 어제를 위로하고 오늘을 토닥이며
  • 장흥투데이
  • 승인 2021.09.08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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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 수필가
유용수/시인, 수필가

햇살이 가득한 휘어진 산길을 걸으며 생각이 헤퍼집니다. 별것도 아닌 것이 불쑥 튀어나와 두근거리게 하더니 긴장을 시킵니다. 일어나지도 않는 것을 미리 걱정합니다. 오래전에 할퀴고 지나갔던 거친 삶의 한 부분이 불쑥 돋아납니다. 산길을 걸을 때는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잡념과 싸워야 합니다. 잡념에 휩쓸리면 나약해지고 초라해지며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뭉근한 산바람이 조롱이라도 하듯 허기진 가슴을 헤집습니다. 가끔은 사소한 것들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보면 아직도 청춘을 품고 살아가는 것 걸까. 얽히고설킨 많은 인연들이 노출되곤 합니다. 다 허망한 것들입니다. 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롭습니다. 욕심이 있어야 발전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넘치는 욕심은 반드시 화가 뒤따릅니다. 바보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집착이 강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은 자를 꾸짖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지불책우 智不責愚) 욕심은 고통을 부르고 집착이 있으면 두렵습니다. 부족한 곳에서 만족을 찾아야 합니다.

조선시대 화가 최북(1712∼1786)의 공산무인도라는 산수화가 있습니다. 그림의 화제가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입니다. 사람 없는 빈산에 물 흐르고 꽃이 피었습니다. 정자도 텅 비었습니다. 그림 속에서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없어 쓸쓸하게 보이는 산. 그러나 산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 곳은 아닙니다. 산의 주인은 말없이 피고 지는 야생화이고, 산 도랑을 흐르는 물이 주인이고, 산에 사는 동물이 주인입니다. 자연은 가르쳐 주거나 보채지 않아도 물 흐르듯 때를 알고 꽃이 핍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는 노자의 무위자연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한참을 걸어 올라갑니다. 산등성이를 뒤덮은 구름 떼가 심상치 않습니다.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침묵하던 나무들이 흔들립니다. 하늘에서 번개와 천둥소리가 산을 흔들자 숲으로 돌아온 새들의 울부짖음이 가득합니다. 한줄기 소나기를 퍼질러 놓았습니다. 소나기가 그치자 숲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묵합니다. 산은 오롯이 숲을 품었고 놀란 새들도 겨우 안정을 찾은 것 같습니다. 허름한 길을 걸으며 침잠 속으로 빠져듭니다.

자연은 주어진 여건 그대로 견디어 냅니다. 망가지면 망가진 채 급하지 않게 스스로 치유합니다. 누구의 손길도 원하지 않는 것이 자연입니다.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숲에게 맡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 앞에서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상처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서만 사람 냄새가 납니다. 상처를 통해 배운 지혜로움이 타인을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지리산 벽소령고개에 삼정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 거주하는 촌부는 벽소령을 넘어오는 새들과 짐승들을 위해 담장에 헌식대를 만들어 매일 잔반을 올려놓습니다. 새와 다람쥐들이 다녀간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양이 작아도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짐승은 없다고 합니다. ‘짐승들도 다 먹으면 안 된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돌아오라/ 날개를 잃고 저물도록 겨울 숲으로 날아간 새들아
돌아와 내 야윈 가슴을 맛있게 쪼아먹어라 / 내 오늘 한평생 걸쳤던 맛없는 옷을 벗고
통나무로 만든 헌식대에 알몸으로 누워 / 쓸쓸히 밤하늘 별들을 바라보느니
날개도 없이 지평선 너머로 피를 흘리며 사라져간 새들아 / 돌아와 내 눈을 신나게 쪼아먹어라 / 헌식대에 뿌려진 검은콩을 쪼아먹듯/ 돌아와 내 작은 간과 심장을 쪼아먹고
아직 따스한 키스가 남아 있는 내 입술도 쪼아먹어 / 돌아오지 않는 저 배고픈 새들을 우수수 돌아오게 하라 / 죄 많은 내 피는 이미 다 마르고 /껍질은 마른 빵처럼 부스러기가 되어 흩어지나니 /이젠 나는 너의 작은 날개가 되길 바랄 뿐 / 푸른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한점 새똥이 되길 바랄 뿐 / 내 비록 한사람도 사랑하지 못한 더러운 몸
내 비록 돈을 벌기 위해 평생 동안 잠 못 이루던 / 더러운 마음이지만
돌아오라 새들아 밤안개를 데리고 / 고요히 미소를 지으며 돌아와 나를 쪼아먹어라
/오늘밤에는 극락전 너머로 첫눈이 내린다

정호승의 〈헌식대〉라는 시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저 배고픈 새들을 우수수 돌아오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요히 미소를 지으며 돌아와 나를 쪼아 먹어라’고 간절하게 노래합니다.

풀냄새, 흙냄새가 온몸에 덕지덕지 묻혀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지만 결국은 심장에 묻은 탁한 것들을 토해 내야 합니다. 탁한 것들이 숨구멍을 가로막고 멈칫거리며 마지막 발악을 합니다. 나는 조용히 그들과 타협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숨구멍을 가로막던 것들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따뜻해집니다. 그리고 삽상해집니다. 산길을 걷다 보면 나태해진 것들도 메말라 떨어집니다. 일상을 깨어있지 못하기에 스스로 주시할 수 없습니다. 뒤돌아보아야 지나온 삶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옛 기억을 더듬으며 어제를 위로하고 오늘을 토닥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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