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城안'시대- “장흥성의 동문 안은 근읍의 중심지였다”
장흥의 '城안'시대- “장흥성의 동문 안은 근읍의 중심지였다”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9.13 13: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見聞譚5

김재열/전 장흥향교 전교

지금의 중앙교회 앞의 서편 약간 경사진 곳은 옛 장흥성의 동문이 있었던 자리다. 옛 장흥성의 동문 안은 조선조 태종시대이래 한말 일정 36 년 후 광복 남북전란 수복 후까지 장흥의 행정, 금융을 비롯하여 치안, 교육, 의료,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었다.

지금은 경찰서 일부 건물로 막혀있으나 장원아파트 자리엔 장흥 동헌 터로 군청이 있었다.

군청 정문에서 직통 길은 4거리 광장으로, 그 서쪽은 경찰서, 광장 서쪽 길은 법원, 검찰청 광장에서 남문 고갯길 첫 번째가 군수 관사(갑오전란에 오직 남은 주택), 남문로 첫째에 장흥우편소(우체국), 건너편에 무덕관, 그 앞길에 일인 마쓰다(松田)가 경영한 택시부가 자리하였었고 그 아래로는 대서소(사법서소), 변호사 사무소가 즐비하였다.

그 아래쪽 남산공원 입구 아래쪽에 일인 다카기(高木)가 지은 일본 고성을 모방한 2층 주택이 있었다. 그 아래쪽엔 일본 다가미(田上)의 보험관리소가 있었다.

동동리는 한국인의 절대적 거주지였으나 남동리는 동문에서 본정 통 경찰서 앞 4거리에서 남문로 까지 의 대로변은 거의가 일본인들 영업소와 사무실이 있었다.

동문안 동동리길에는 대흥여객 차부(大興旅客 車部)란 버스회사가 있고, 바로 옆에 일본인 시모가와(下川)상점, 그 옆에는 중국인 왕화산(王和山)이 경영한 흥화관 식당은 대중 음식의 요람이었다. 그 서쪽엔 일본인 가도다(戶田)의원이, 그 옆에는 일본인 니시기마쓰(錦松)대중목욕탕이, 그 옆엔 일본인 도오오이찌(東一)은행이, 그 옆엔 만물상격이던 일본인 기다우찌(北內)상점이 있었다.

동동리 진골로 들어가는 골목에는 일본인 미야다(宮田)의원이, 그 옆쪽에는 처음 활자 인쇄업소인 정왕섭 인쇄소가 있었다.4거리 광장 동동리 쪽에 일본인 오오가미(大神)의 이로화 여관이 있었다.

남동리 쪽 대로의 첫째에 일본인 아마노(天野)약방이 있었다. 그 옆에 1930년 사진관이 개업하고 있어 신비로워 했다.

1935년경까지 얼음과자가 없던 시대라 박림쏘에 두껍게 언 얼음을 사각형으로 자르고 인력으로 날라 남문 고갯길의 누에고치 판매소의 지하창고에 보관했다가 여름이면 얼음을 꺼내 갈아서 판매한 것은 유일의 청량음료 식품이었다. 남산공원의 벚꽃은 좋은 관광 상품 이였으나 그 곳에 신사를 짓고 매월 1일과 15일에는 학생들과 각 기관원은 억지로 예배를 해야 하였다. 저녁 무렵이면 나무장사(땔감)의 행렬이 사는 사람 집까지 지고 가는 행렬은 일종의 직종이었다고나 할까. 그 시절 운전기사는 대단히 선호한 직종 이였다. 이정목, 김화섭, 조동근, 일본인 사사오까는 대접 받았었다.

남외리에 있던 보통학교는 부동면이 장흥면과 합병되어 장흥면과 부동면이던 입학생이 장흥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필생이 1937년 9살에 입학하려하니 남자 2학급 120명 여자 30명을 모집하는데 간단한 일본어의 검사하는데 2:1의 비율이었다. 필자는 연산리에서 북문고개를 넘어 군청 앞 4거리에서 남문고개를 넘어 통학하기는 어려웠다. 그 해 중일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장흥읍의 인구는 그래도 늘어나 1940년 장흥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1월 1일은 장흥읍의 생일이라고 성대한 축제를 개최하고 오늘까지 성세를 이어오고 있다. 당시 전남에 시(당시는 부府)는 광주와 목포부이고 읍은 순천, 여수, 나주, 영산포, 송정리, 제주(당시는 전남), 그리고 장흥읍이었다.

지금은 발전의 뒤안길에 있는 것 같으나 당시는 흥성한 고을이었다. 일본인들이 대거 입주하여 주요도로의 양편은 상점을 비롯한 갖가지 업소와 100년이나 살 것으로 여겨 이층집을 이어짓고 사가이(酒井)농장, 요시미(대규모 누에농장), 그리고 차 농장 죽림조성까지 마련하였었다. 그 당시 군청은 내무과와 산업과만 있었으며 군수는 한국인이며 내무과장은 일본인이었다. 읍사무소는 면 시절엔 장흥서초등학교의 후 측의 옛 구 한국시 장대의 건물을 이용하다 부동면과 합병하여 현 위치로 건축 이전하였다.

면장 시절에는 고창석(高昌錫)씨였더니 읍으로 승격하면서 일본인 나까가와게이지로오(中川 啓次郞)로 바뀌었다. 폐전 시까지 1945년 만해도 우체국에 전화 교환수가 2~3명, 장흥읍에 전화 가입자가 60여 가정과 기관이 있으니 전화 하는 것이 신비롭게 여겨 전화하는 광경을 구경마냥 보기도 했었다.

시대는 빨리 변천하여 7거리 시대로, 다시 동교통 시대에서 중앙로 시대로 군민회관 중심시대로 변천하여 교통, 상공, 의료의 중심지 시대는 다시 철도가 개설되면 어떻게 변천 할련지?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동교3길 11-8. 1층
  • 대표전화 : 061-864-4200
  • 팩스 : 061-863-49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욱
  • 법인명 : 주식회사 장흥투데이 혹은 (주)장흥투데이
  • 제호 : 장흥투데이
  • 등록번호 : 전남 다 00388
  • 등록일 : 2018-03-06
  • 발행일 : 2018-03-06
  • 발행인 : 임형기
  • 편집인 : 김선욱
  • 계좌번호 (농협) 301-0229-5455—61(주식회사 장흥투데이)
  • 장흥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흥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htoday7@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