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마을-“제암산 정기받아 큰 인물 나온다”
신기마을-“제암산 정기받아 큰 인물 나온다”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9.1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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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우리마을/ 장흥읍 금산3구 신기마을
제암산 기슭-원효암자·의상암자 터, 예전엔 불교문화도 성시
표고버섯-대규모 한우사육농 많아- 장흥군 공원묘지도 들어서
하늘에서 본 신기마을
하늘에서 본 신기마을

■마을의 위치와 환경

금산3구는 신기마을과 대치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대치마을보다 큰 신기마을은 2017년 말 마을인구가 69명(남42, 여27명)에 35호이다.

산가지역에 위치하여 이 마을의 특산물은 표고버섯과 감이고 한우를 많이 사육하고 있다.

신기마을은 장흥 군청으로부터 북동쪽으로 5㎞ 덜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마을 뒤로는 제암산이, 마을 앞 들녘 너머 좌측으로 사자산이 있으며, 마을 바로 앞에는 금정저수지가 있어 배산임수 형국의 중산간 마을이다.

신기마을은 대치마을과 함께 장흥에서 장동, 보성 웅치로 넘어가는 큰재(대치大峙)가 있어 산간 교통 취락으로 형성되었다는 연유도 있으며, 큰재(大峙)의 고개를 넘기 전에 잠시 머물러 가는 주막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전하고 있다.

신기마을 위에는 ‘이성암’이라고 불리는 계곡형 산이 있는데, 옛날에는 바위 위에 절을 지었지만, 빈대가 많아 결국 그 절을 망하게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성암 골짜기 입구에 도끼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의 형상이 도끼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다. 또 소둠벙과 각시둠벙이 있는데, 소둠벙은 소가 떨어져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각시둠벙은 새각시가 목욕을 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암산 기슭의 마을로, 옛부터 제암산의 정기를 받은 큰 인물이 나온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마을의 연혁

제암산(帝巖山)의 남쪽 기슭을 감싸 돌며 형성된 중산간 마을인 신기(新基)마을은 금산리(錦山里)에서 가장 먼저 취락을 형성한 한치(大峙)마을과 신기(新基)마을이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산모퉁이 흘러내린 곳이라는 뜻의 각산태 또는 새로 잡은 터라는 뜻의 샛터라고 불리는 신기(新基)마을은 1800년 후반부터 제암산의 남쪽 기슭에 새롭게 김해 김(金)씨 터를 잡아 성촌되었다 전하고, 부동면(府東面)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대치와 신기마을은 주변 금성(錦城)과 운치(雲峙)마을을 합병하여 마을 이름을 금산리(錦山里)가 되었다.

이후 1949년 7월 지방자치법(地方自治法)이 제정되어 장흥읍조례(長興邑條例)에 의하여 금성(金城)과 운치(雲峙)마을을 각각 분구하면서 대치(大峙)와 신기(新基)마을만을 합하여 금산 3구(錦山 3區)로 하였다.

그러나 일반 주민들은 대치와 신기 마을의 거리가 먼 관계로 금산3구라는 명칭보다는 자연마을 이름인 대치(大峙)와 신기(新基)마을로 각각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금산3구(錦山3區)는 현재 3개 반(본동, 201~208번지, 대치)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금성저수지
마을 앞으로 펼쳐진 금성저수지
신기마을 동북쪽에 조성된 공원묘지
신기마을 동북쪽에 조성된 공원묘지

■마을 개발사

지붕개량의 경우, 1995년 지붕 개량사업으로 초가지붕은 기와, 스레트, 양철 지붕으로 개량되고 주택은 1970년도에 초가집의 지붕을 함석, 스레트 등으로 대부분 개량하였고, 1980년도에 들어서며 시멘트 기와지붕으로 개량되었고 1990년도에 들어서며 슬라브조 집이나 콘크리트 집이 개축 되거나 신축되어 오고 있다.

마을 주민의 숙원사업이었던 마을회관은 2012년에 준공되었다. 장흥군 지원금 8천만 원에 주민 부담금 2천만 원, 합 1억 원으로 2012년 9월 28일 기공식을 갖고 이해 12월 20일 준공되었다.

또 난방의 경우, 1970년 까지는 전 주민이 땔감으로 난방해결을 하였다. 땔감은 주로 마을 뒷산이나 제암산 영골재, 탁골재 등에서 확보하였다. 이후 1980년대부터는 연탄으로 난방을 대용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부터는 연탄, 화목, 석유 보일러 등으로 교체하였다.

식수는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 공동식수개발이 이루어져 마을의 식수 등 생활용수로 활용되어 오다 2013년부터 광역상수도가 보급되었다.

경지정리는 1971년, 전기시설은 1971년에, 마을내 가로등은 1990년도에 마을 앞 도로변이나 주요 골목에 모든 가로등 20개가 설치되었고, 교통편은 2000년대 들어 마을 앞으로 버스가 운행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교통편의를 돕고 있다.(하루 5회 운영)

■마을 산업- 축산업 성시

예전에는 주로 농사가 주 산업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서며 수익농업으로 농가들이 대규모 한우신업에 뛰어들었다. 현재는 △김일진 한우 200두 △노영국 한우 240두 △김봉연 한우 70두 △김점중 한우 200두 △이상열 한우 60두를 사육하고 있다.

신기마을 사람들
신기마을 사람들
신기마을 사람들
신기마을 사람들
신기마을 사람들
신기마을 사람들

■마을 출신 인물들

▶임종석 = 신기마을 출신으로 6세 때 신기마을에서 안양면 수양리로 이사, 안양서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하였다. 한양대학교를 졸업했다. 1989년 전대협 의장을 맡으면서 노태우 정부에 대한 학생시위 주도와 임수경 방북사건으로 인해 구속되기도 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 서울 성동구),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을 지냈으며,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2014)을 거쳐 제22대 대선 문재인후보 선거캠프의 비설실장으로 활동하였으며 2017년 문재인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청와대에 입성, 현재도 비서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김용채 = 신기마을 출신으로 1972년 경찰 초급간부(경위)로 출발하여 1989년 총경, 1998년 경무관 승진과 경찰종합학교 교수부장, 1999년 치안감으로 퇴직하였다. 이후 2000년 대불대학교 정교수 및 인문사회대학장을 역임하였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박사학위도 받았으며 경기대학교 행정대학원과 한양대학교 공공정책 대학원 등에서 겸임교수로 출강하였다. 또 민주평통 제12기·13기 관악구협의회장, 관악구 유관단체장협의회장, 관악구 적십자봉사회 후원회장 등을 역임했다

▶김남일 = 1982년에 금호고속에 입사하여 2004년 정년퇴임하였다. 퇴임 후 귀향하여 2009년, 2012년 정남진 장흥농협 이사를 역임하고 2013년 신기마을 이장 등을 역임하며 고향 지키기에 앞장 서 오고 있다. 금호고속 재직 시 18년 무사고, 현금 1천5백만원 주인에게 돌려주기 등 모범적인 업무로 ‘모범기사’ 표창을 비롯하여 퇴직 후 노인, 소녀가장 돕기 등 이웃사랑과 경로사상 실천으로 장흥군수, 장흥경찰서장 표창등 수많은 표창과 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이러한 선행과 모범적 나눔운동으로 ‘한국현대인 인물열전’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기타 인물

△임능주 : 장흥중학교 서무과장 △김상두 : 광주, 외과의사 △김점중 : 장흥군 번영회장 역임

△김종삼 : 법원 사무관 퇴직 △김의중 : 초등학교 교장 △김용배 : 육군소령 △김영표 : 초등학교 교장 △황성율 : 탁구선구자

▲마을 역대 이장

△1963.1.1 최상채 김동식 △1978.2.14 김의천 △1994.10.19 김상일 △2003.1.24. 윤재남 △2014.1.1. 김남일(연월일-취임일)

▲역대 부녀회장=△1996년 이오례 △2016-2017년 김초심 △1997-2015년 김숙희 △2018년 –백오님 △1980.3.8 황성률

■ 마을의 문화역사

(1) 원효암자·의상암자 터

-위치 : 금산리 산1-1번지 소재

“義尙庵 在獅子山 西陵 ... 令無岁旱 禱雨於此. 元曉庵 在義庵左 ...今丁丑僧采惠 重創” - 1747. 『장흥읍지 丁卯誌』, 府東坊 佛字 條”

의상암 사지 원효암 사지 조사에서 “금강사는 사자산(현재의 제암산) 북쪽에 있고 원효암자는 의상암 좌편에 있으며 혜채가 창건했다고 하나 창건과 폐사 시기는 알 수 없다고 보고되어 있다(문화재관리국, 『문화유적 총람 하』, 1977, p305/전라남도, 『문화유적 총람』,1986, p 358/장흥문화원, 『장흥문화 』, 2014, p183-192)

의상암·원효암 사지 장소는 제암산 남서쪽 계곡부 중턱이다. 장흥 공설공원묘지 주차장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포장도로를 따라 약 450m 정도 진입하면 제암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이 등산로를 따라 약 900m를 올라가면 원효암 사지로 추정되는 사지와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급한 경사면을 타고 약 100m를 올라가면 의상암사지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확인된 여러 유물 중 명문 와편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명, ‘한(閑)’ 명 외편이 확인되었는데, ‘태평흥국’명 와편은 976년에서 984년까지 사용하던 연호이고, 석불 입상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이곳 두 암자는 고려전기대 사세가 컸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2) 의상암지 석불입상

-종목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이름 : 장흥전의상암지석불입상(長興傳義湘庵址石佛立像)

-내용 : 원래 장흥읍 제암산 중턱 금산리 의상암 절터에 있던 것으로 1994년부터 보림사로 옮겨졌다. 1975년, 장흥교도소 직원들이 의상암지에서 발견하여 장흥교도소(장흥읍 원도리)로 이전했다가 1994년 보림사로 이전했다. 현재는 보림사 대웅보전 좌측 뒤편 보호각에 봉안되어 있다. 이 석불은 1998년 02월 05일에 전남유형문화재 제191호지 지정되었다.

장흥교도소에 있을 때는 목 위 부분이 없었으나 후에 의상암자 터에서 묵 부위를 발견, 지금은 완전한 형태로 봉안돼 있다. 몸 뒤의 광배(光背)와 목 부분에 약간의 파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계란형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 위까지 U자형 주름을 이루고 있다. 양 팔에 걸쳐진 옷자락은 물결 모양의 주름을 만들면서 무릎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미타여래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원만한 얼굴, 높은 머리묶음, 상체의 옷주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장흥공설공원묘지

금산리 산 28번지 일원(장흥읍 제암산길 413)에 위치한 장흥공설공원묘지는 1988년에 장묘문화 개선을 위해 군소유림 1만6천평에 군비 23,880천원을 투입하여 기반시설 및 배수로 개설을 완료하여 공설공원 묘지를 조성하였다. 이후 1990년에는 1090기, 1991년에는 3,680기 등으로 분묘가 확장되어 2017년 현재는 1만 여기의 분묘가 설치되어 있다.

글 김선욱/사진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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