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독립운동 투신-31세 순직한 지사 덕암 위석규
24세 독립운동 투신-31세 순직한 지사 덕암 위석규
  • 김선욱
  • 승인 2018.09.13 15: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대인물(5)/덕암 위석규(德菴 魏錫奎)/(상)
독립투쟁 정신 투철…꿈에서도 의병장 되어 왜구 퇴치하기도

요절했지만 71편 시문 남겨-‘학문·문인으로 일가 성취’ 예측

 

덕암 위석규 존영
덕암 위석규 존영

장흥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로 몇몇 분이 있다. 그 중 덕암(德菴) 위석규(魏錫奎) 공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24세 때 고향을 떠나 중국을 거쳐 러시아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한창 나이인 31세에 이국 땅에서 순국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관산읍 당동(堂洞)마을 출신으로 조선조 말엽인 1883년(고종 20)에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長興)으로, 자는 여장(汝章), 호는 덕암(德菴)이다. 증조부는 위도방(魏道昉), 조부는 위영집(魏榮集), 아버지는 위윤조(魏胤祚)이며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장흥 출신 홍의재(弘毅齋) 위봉식(魏棒植) 문인으로 족형(族兄) 위봉식(魏棒植)과 명강(明岡) 백봉흠(白奉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광무 9)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후기 지사였던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의병모집 격문을 보고 의병으로 출사했으나, 이후 면암이 순창에서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체포되어 쓰시마 섬에 유배되고 의병단마저 해산되면서 고국에서 ‘대한독립 투쟁’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했다.

그러나 이듬 해인 1906년(광무 10), 일본의 침탈에 항쟁하기 위해 독립투쟁이 가능했던 중국으로 넘어가 불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만주, 러시아 하바로스크 등지에서 박태문(朴泰文), 강명운(姜明運), 국사성(鞠思成)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특히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끼니를 있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독립자금의 조달 등 모든 일을 다 했으나 항일운동의 여파로 병을 얻어 안타깝게 이국에서 망국의 한을 가슴에 묻은 채 1913년 4월 27일, 러시아 니콜라이스크에서 순직했다. 이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벌린 지 8년만의 일이었다.

덕암 공의 묘는 니콜라이스크 한인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고향에서 유품으로 대신 장사를 지냈다.

■유소년 때-‘신동’으로 불리어져

덕암 위석규 묘(덕암공 衣履藏,부인 해평오씨 합폄)
덕암 위석규 묘(덕암공 衣履藏,부인 해평오씨 합폄)

덕암 공이 자라면서 기우(氣宇)가 청수(淸秀)하고 예능에 숙달해서 학문에 자진근공(自進勤工)하고 어른들의 가르침을 번거로워 하지 않았다.

공은 5세 때 차음으로 글(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하루에 수백 문자를 어렵지 않게 익히며 신동(神童)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1889년(병신년) 6세 때 복재(復齋) 송선생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송 선생이 한번 보고는 특별히 사랑하여 송선생으로부터 많은 학문과 모든 범절을 배울 수 있었다. 7세 이후로는 선생의 가르침이 없어도 홀로 글을 읽으며 문리를 터득하였다.

공은 1883년(을미년) 13세 때 금곡리 연산서재에 취학하였고 연산서재에는 원근의 많은 문사들이 함께 모여 수학하였는데, 공은 그 많은 문사 중 가장 우수한 학동으로 공인받으며, 서재 스승으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리어졌다.

공은 또 1900년(경자년) 17세 때 홍의재(弘毅齋) 위봉(魏棒.1863~1943, 진사 위문덕의 5대손으로 관산 古下面 桂春里生. 강진 오남 김한섭 선생의 제자. 면암 최익현 선생에게 보낸 간찰 6통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홍의재는 학덕이 고명하였고 인륜에 근본을 삼고 경의에 치밀하여 원근간에 수많은 학자, 선비들이 홍의제 공을 추대하여 스승으로 섬기며 배웠다.

덕암 공은 홍의재 문하의 문사들 중에 제일 우수한 선비로 신망받았다. 홍의재 문하에서 덕암공은 <성리대전性理大全>, <중용中庸> 등을 읽으며 우주와 세속의 유전(流轉)한 원리를 탐구하였으며, 한편으로 율곡의 이기학(理氣學) 등을 중심으로 수학하였다.

이 무렵 공은 가례와 소학은 다반사로 매일 습독 실천하고 특히 율곡의 요결, 서적 등은 매일 조석으로 외며 정성껏 습독하였다.

1900년 겨울에 봉명제(鳳鳴齊)에서 명강(明岡) 백 선생을 만났는데, 백 선생은 공에게 일본 침략과 서양문화 최성기 등 국가적 위기에서 선비의 책임감으로 성현의 도리와 의리를 수호하고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로서 도리를 다하라는 내용의 글을 써 증하면서 “…자네는 영오(英悟)한 자질로서 이미 훌륭한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니, 대강의 의획은 다 체득하여 앞날에 덕기가 크게 성취될 것이다”고 말했다.

1901년(신축년)에 공은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독파하고 미진한 부분은 가르침으로 독해했으며, 1902년(임인년)에는 다시 <중용(中庸)>을 천 번에 가깝도록 독파하였고, 여름 가을 사이에 강진의 생관에서 학업을 강마 수련하기도 하였다.

1903년(계묘년) 봄에는 홍의재 선생이 당동리에서 이웃마을로 이사할 때, 모든 시설물 준비가 어려웠고 조석의 생계대책이 곤란지경이었다. 이때 덕암 공은 ‘의연금을 모아 홍의재 선생을 도와드리자’는 간절한 내용의 통문을 여러 동문 사우들에게 발송하여, 스승을 도왔다.

1904년(갑진년)부터 덕암 공은 처음으로 농사일에 종사하여, 낮에는 논밭을 갈고 집에서는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않아 복록도 없던 때라 직접 갈고 심고 물대고 김매는 일 등을 다 하였지만, 저녁 시간에 글을 읽고 외우는 일을 하루도 빼지 않았다.

그 무렵 서구의 사조와 학문이 노도와 같이 밀려왔어도 덕암 공은 전통적인 보수와 한학의 수호자로서 추호의 오염됨이 없었다.(위석규, ‘행장-백형기’, 『덕암유고』, 2000, 165-176면 등),

덕암 위석규 유장지 전경
덕암 위석규 유장지 전경
유장지 표지석
유장지 표지석

■투철한 구국일념- 독립투쟁에 투신

덕암 공의 구국일념과 독립투쟁 의식은 남달리 특출했다.

유고에 꿈의 기록을 남겨둔 글이 있는데(위석규, ‘記夢’, 『덕암유고』, 2000, 9면), 요약하면, 고종 1902년 9월 7일 선생이 꿈을 꾸니, 왜구가 우리나라를 침탈하여 조야를 점거하자, 선생은 동지 23인을 이끌고 죽창으로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선생의 이런 꿈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침탈당하는 당시에서 선생이 민족을 위하고 구국하겠다는 강렬한 단심(丹心)이요 유자(儒者)로서 강직한 신념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은 또,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우국에 찬 울분으로 활복 순국한 민충정 공에 대한 조의하기 위해 한양까지 15일 도보 끝에 한양에 도착, 묘소 참배 등 위문절차를 마치고 귀향하였다. 이때 선생의 우국충정의 격앙된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고 한다.

선생의 지고한 구국일념은 선생이 독립 투쟁에 나서기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유언으로 남겨둔 글에서도 엿보이고 있다.

“…짐승(倭)이 사람과 영토를 침탈하니 장차 모두 죽겠도다. 슬프다. 오국(吳國)이 도수(盜獸)들의 노략으로 국가가 존망지추(存亡之秋)에 다달아 백성이 진멸(盡滅)케 되었으니 우리들은 팔을 걷어 주먹을 쥐고 용약분투(踊躍奮鬪), 만사일생(萬死一生)의 각오로 영토를 지키자. 사람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대의를 따르면 사람이요 사욕을 채운다면 금수(禽獸)다. 고금을 막론하고 국난을 당하여 국가사직을 붙잡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분강개(義憤慷慨) 일어서면 모두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906년 독립전선에 투신하며‘(이 글은 위석규 어록비에 새겨졌다)(위황량, 『천관산에 꿈을 싣고』, 송정문화사, 2006, 288면)

상기 글은 덕암 공이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뛰어들려고 할 때, 항차 불귀의 몸이 될 것을 예측하고, 유물로 몸을 대신할 손발톱, 머리카락 등을 남기고, ’내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유물로 장사하라‘고 남긴 유서의 일부이다.

■문인으로 대성 가능성 보여준 시문

위석규 어록비
위석규 어록비

선생은 요절하였으면서도 시문을 모은 ‘덕암유고’ 2권을 남겼다. 이 유고는 선생의 순직 48주년이 된 1961년에 비로소 초간집으로 발간되었다.

당초 선생의 유고는 별도로 편집된 것이 아니었다. 아들 계동(啓同)이 1926년에 ‘피눈물을 흘리며 쓴다’는 유고 편찬 말미에 붙인 글에 의하면, ‘선친의 손때와 기름 묻은 유묵(遺墨-남긴 글과 시문 등) 등이 모든 책장과 상자에 감추어져 있어 이를 가보로 남기고자 시문들을 다 찾아내어 빠짐없이 기록하였으며, 이 일은 삼종형 경양제(景陽齊)가 주관하여 선친의 유고를 완성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위석규, 『덕암유고』, 2000, 208면)

이 후 선생의 유고는 2000년에 ‘의열록(義烈錄)’을 부록으로 첨가하여 <德菴遺稿-附義熱錄>으로 재출간되었다.

선생의 유고는 2권으로 돼 있는데, 1권에는 시(詩) 35편이 엮어져 있고 2권에는 서간문 16편, 잡서(雜著)18편, 서문 1편. 발문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선생이 남긴 시문은 모두 71편에 이른다.

한학만 수학하여 시문 등이 모두 한문이기 하지만, 특히 한시(漢詩)의 경우, 선생의 출중한 문학적 소양과 성취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학인들의 글에서 자주 인용되기도 했다.

선생의 시문을 몇 편 번안한 <장녕시문長寧詩文>의 저자로 한학자인 김규정(金圭錠)도 “덕암 공은 젊은 날에 중국사서 주자서물을 이해할 정도로 학문이 앞서 있었다. 특히 시와 행간에는 우국탄세(憂國歎世)의 언사(言辭)가 있어 지사(志士)의 위의(威儀)를 잘 보여준다. 만주 연해주 광야에 구국의 길로 나서지 않았어도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을 것이다”고 평했다.

특히 선생의 시문은, 선생이 문인으로 대성할 수 있는 소양 즉, 문인(文人)으로서 기절(氣節)과 문조(文藻)는 물론 사물(대상)에 대한 통찰력이 탁월하여 시인으로서 대성할 수 있는 기질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

덕암 위석규 의렬비
덕암 위석규 의렬비

시문 외 서간문, 잡저 등에서도 표현된 선생의 유고에 나타난 성정은 강직했고, 유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선비로서 덕인(德仁)의 가치관과 투철한 애국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다.

위계반(魏啓泮)은 선생의 유고의 서문에서 “…선생은 자질이 영특하고 출중하여 20세가 못 되어서 이미 큰 뜻이 있는 언어와 문장이 넘치고, 덕망과 기백이 가득 차서 대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으니, 이에 대해 근세에서 평범한 선비들과 문인들이 어찌 감히 따르겠는가. …선생의 유고가 널리 알려진다면 온 고을과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게 될 것이다”고 표현하기도 했다.(위석규, 『덕암유고』, 2000, 15면)-

(다음 호에 계속)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동교3길 11-8. 1층
  • 대표전화 : 061-864-4200
  • 팩스 : 061-863-49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욱
  • 법인명 : 주식회사 장흥투데이 혹은 (주)장흥투데이
  • 제호 : 장흥투데이
  • 등록번호 : 전남 다 00388
  • 등록일 : 2018-03-06
  • 발행일 : 2018-03-06
  • 발행인 : 임형기
  • 편집인 : 김선욱
  • 계좌번호 (농협) 301-0229-5455—61(주식회사 장흥투데이)
  • 장흥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흥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htoday7@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