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 故 송기숙 소설가(1)
기획 특집 - 故 송기숙 소설가(1)
  • 김선욱
  • 승인 2021.12.08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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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철한 역사의식으로 '민중의 이상(理想)' 열어왔던 송기숙(1)
7,80년대 독재정권과 싸워 온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유명
'자랏골 비가'서 제시된 민중理想, '녹두장군'에서 완성
광주이야기 '오월의 미소'로 광주항쟁 20여년 족쇄 풀어
김선욱. 시인. 본지 편집인
장흥 앞바다에선 송기숙 선생. 그는 바다를 보며 무슨 작품을 구상했을까?
운주사에서 '운주사 전설'에 담긴 민중의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송기숙 선생

 

 

 

 

 

 

 

 

 

 

송기숙 별세에 즈음 고인의 문학과 일대기를 회고하는 난을 마련했다. 다음 글은 기자가 2004년 4월에 송기숙 선생을 인터뷰했던 내용의 원고로, 당시 선생이 투병하며 활동을 멈추던 때(2006~)의 2년 전이어서, 거의 유효한 내용이다. 3회에 걸쳐 다시 소개한다. 편집자 주

 

 

 

 

 

화순 운주사에 담긴 민중의 이상(理想)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계곡에는 '천불천탑'과 미완의 미륵의 꿈을 담고 있는 ‘와불’로 유명한 운주사지(雲住寺址)가 있다. 1481년에 첫 편찬되고 1530년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의 '능주현'편에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과 각각 천 개 있다(雲住寺在千佛山寺之左右山背石佛塔各一千)"라고 쓰여 있다.

운주사는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찰이었고, 예전의 대규모 사찰도 없어진 이름 없는 절터였지만, 1984년 전남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유적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황석영의 《장길산》, 송기숙의 《녹두장군》에서 '운주사 전설'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송광사의 말사이기도 한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대략 석탑 19기와 석불 90여기 정도만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말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1천개의 석탑과 1천개의 석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는 국운이 일본으로 새나가는 걸 막기 위해 풍수 지리설에 따라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천탑을 천상에서 석공들을 불러 쌓기로 했고, 마지막 석불이 완성되던 찰나, 일을 하기 싫은 한 동자승이 새벽닭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석공들은 아침이 온 줄 알 고 마지막 석불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하늘로 올라가 버려 미륵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도선국사가 도력으로 세운 많은 불탑, 불상 중 압권은 단연 그 마지막 석불이었다는 와불이다. 절 오른편 산 중턱에 누워있는 이 와불은 천불천탑의 마지막 천불이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지배하는 참민중의 세상으로 바뀌고 운주사가 있는 천불산은 새 나라의 수도가 되면서 천년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와불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 것이다.

작가 황석영은 《장길산》에서 운주사는 민중들, 곧 미래불인 미륵의 계시를 받은 반노들이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세우려고 했던 '혁명의 땅'으로 나온다.

혹은 고려 때 일본을 치려던 여몽 연합군이 화순에 머물며 운주사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 석탑의 모양과 문양을 볼 때 몽고침략을 받은 고려 말기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만 정확한 사료는 없다. 와불 아래쪽에는 북두칠성 모습을 옮겨놓은 듯한 칠성바위가 있는데 맷돌 모양돌의 배열 상태와 크기가 북두칠성의 방위각과 밝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이 칠성바위를 연관시켜 칠성바위·와불·석탑의 배치 등이 북두칠성과 북극성 그리고 밤하늘의 별자리와 일치한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만일 이것이 확실하다면, 운주사 석탑들은 바로 밤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땅 위에 구현해 놓은 하나의 천문도(天文圖)인 셈이고,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민중이 꿈꾸는 '하늘의 이상(理想)'을 땅 위에 구현해 놓은, 곧 하늘의 천불을 지상에다 재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운주사를 창건한 주인공에 대한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가장 설득적인 것은 이곳 탑의 독특한 양식이 중국남방 양식으로부터 영향받은 것과 관련된 설화이다, 즉 12세기 초 중국남방에서 해상활동에 종사했던 백제의 유민들이 고향으로 건너와 이 지역의 토호, 민중들과 어우러져 운주사를 창건하고 고토(古土)회복에 대한 비원으로 천불천탑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미륵불의 재림(再臨)을 통해 지상낙토를 꿈꾸었던 소외받고 천대받던 민중들의 비원과 이상이 바로 운주사 창건의 주역들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곳 운주사 경내 안밖 곳곳에 즐비하게 세워져 있는 석불들 거의 대부분이 부처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는 못생기고 질박한 데다 무표정들이어서 무언의 많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민화의 주인공들을 조각했다고 보면 딱 맞을 불상들이다. 비바람에 얼굴 형상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옛날에는 천불이었을, 그러나 지금은 고작 90여기에 불과한 이 집단적인 ‘못생긴 노지의 석불’들은 무언가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낮고 음습한 땅에 엎드려 구원을 바라는 중생의 모습, ‘쨍하고 해뜰 날, 한껏 펼 날’을 고대하는 민중의 아픔으로 느껴지게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열망, 그 소망을 안고 암석 밑에서 산기슭 여기저기서 비바람 맞으며 1천년을 기다리며 숱한 ‘민중의 신화’를 만들어 왔을 것이다.

송기숙의 이상과 운주사

장흥출신의 작가 송기숙 선생은 저항문학의 기수, 민중소설가라는 별명 못지않게 그의 2차례의 투옥과 민주화운동이라는 경력이 말해주듯, 우리나라 작가 가운데 70,80년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아 온 ‘행동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선생의 소설은 읽지 않았어도 민주화 운동가로서 선생을 아는 국민이 적잖을 정도다.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그러한 선생이 국내의 민중소설 제1인자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송기숙 선생을 이곳 운주사에서 만났다. 선생은 예전에는 없었던 운주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운주사와 민중불교의 상관 관계부터 이야기 매듭을 풀어갔다. 운주사지를 2시간 가까이 답사하며 들려준 얘기는 천불천탑이나 와불, 칠성바위 등의 내력과 이에 얽힌 설화를 비롯 자신과 운주사와의 인연, 운주사지의 연원과 민중불교, 황석영 작가와 운주사지의 관계(송기숙 선생은 '운주사 전설'을 황석영한테 이야기했더니, 황석영이가 '장길산'에서 먼저 활용해버렸다고 말했다) 등 거의 운주사지 얘기로 일관했다. (실제로 선생은 전남대학교 박물관조사팀이 운주사를 발굴할 때 함께 참여하면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학술지에 '운주사 전설'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 했다).

선생의 얘기를 들으며, 선생이 굳이 운주사에서 만나기를 희망했던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운주사지, 천불천탑이나 와불에 담겨있는 메세지는 다름 아닌 선생이 지난 7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천착하며 그의 문학적인 역량과 정열을 쏟아온 바로 그 자신의 작품세계가 추구하는 민중의 수난과 저항, 민중의 힘과 비원, 이상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운주사에서 자신의 작가적인 삶과 작품세계를 기자에게 투영해 보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존재 이유, 작품으로 答

선생의 첫 장편으로, 3대에 걸친 한 촌락의 비극적 운명을 집약한 〈자랏골의 비가〉에 이어 1920년대 암태도의 소작쟁의를 소설화한 〈암태도〉, 동학농민전쟁을 통한 민중의 주체사상을 강조한 대하소설 〈녹두장군〉 등은 모두 우리 근현대사에 나타난 민중들의 수난과 항거의 기록들이다.

선생은 이 민중소설들을 통해 민중의 수모와 핍박, 궁기와 곤비를 적나라하게 조명하고 민중적(농민적) 이상세계의 가능성을 열어 보임으로써 무엇을 위해 문학이 존재하는가라는 큰 물음에 그 나름대로 답을 내려주고 있다.

즉 선생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심성에 대해 근본적인 낙관과 신뢰를 갖고, 그것이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역사적인 질곡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며 어떻게 맞서왔는가 하는 민중의 싸움을 형상화해 온 것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백의민족>, <도깨비잔치>를 비롯한 중단편집, 그리고 <자랏골의 비가>, <녹두장군> 등이었다.

특히 <자랏골의 비가>에서 시작된 그의 민중적 시각의 민중세계의 구체화는 〈녹두장군〉에서 완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녹두장군〉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큰 비중으로 평가받는다. 즉 그는 이 작품에서 최초로 갑오농민전쟁을 농민들의 주체적인 농민전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조선말기부터 농민내부에서 일기 시작한 반봉건의식은 결국 근대사회를 향한 민중으로부터의 주체적인 운동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보통 역사소설이 역사학을 추월하거나 견인한 사례가 드문 국내 소설들에서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과 함께 역사학의 토대 위에서 이뤄진 작품이지만, 오히려 역사학을 초월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받았던 <녹두장군>에 대해 평론가 서경석교수(대구대)는 "1966년 문단에 데뷔한 이래 그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농민적 세계의 가능성과 그들의 민중적인 기획의 세계에 대한 형상화는 초기적인 ‘강기’의 문학에서 출발하여 〈녹두장군〉의 방대한 민중운동의 세계에 이르는 긴 과정을 통해 완성 된다”고 평가한다.

또 신경림 이문구 최원식씨는 <녹두장군>을 제9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 그 이유로 "농민전쟁을 다룬 다른 역사소설과는 달리 동학과 농민의 관계에 대한 균형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고 농민전쟁을 농민생활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역사적 진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두 차례의 수형생활과 해직

용산면 포곡리 출신인 송기숙 선생은 장흥고등학교 때(53∼56년) 장흥고 교지 창간작업을 주도하면서부터 문학적인 소양을 쌓기 시작한다. 전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61년), 대학원(문학과)을 다니며(61∼65년) 대학신문사 전임기자로 대학신문편집을 맡기도 하는데, 64년에 평론 ‘창작과정을 통해 본 손창섭’이 현대문학 9월호에서 평론가 조연현 선생에 의해 추천되고, 이듬해 ‘이상서설’이 추천 완료되어 평론가로 문단에 정식 데뷔한다.

대학원을 마치고 65년부터 목포교육대학 교수로 7년을 재임했으며, 73년부터는 모교인 전남대 문리대학 교수로 재임하다 78년 6월 27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형을 언도받아 광주·청주교도소에서 첫 수형생활을 하게 된다. 유신정권이 교수들에게 학생 감시를 강요하며 소위 '학생지도 보고서'를 제출케 하는 등 무단 횡포를 부리자 전대교수 10명과 함께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제하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구속과 복역의 빌미가 된 것이다.

1년 간의 복역 중 이듬해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고, '80년의 봄'을 맞아 다른 교수들은 복직되었으나 선생만은 복권이 되지 않아 복권을 기다리는 중에 '5·18 광주민중항쟁'을 맞는다. 선생은 시민군 협상대표인 수습위원으로 나섰고, 요시찰인물이었던 선생을 계엄당국은 '수습을 빙자한 폭동 지휘자' 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어 징역 5년을 선고한다. 죄명은 '내란죄 중요 종사자'였다. 이로써 선생은 2차 수형 생활을 하게 되고 1년을 복역하게 된다.

84년 8월 17일 전대교수로 복직되는데 해직 7년만의 일이었다. 해직기간 중 선생은 지리산 피아골에 칩거하며 소설을 쓰는 한편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 이 기간부터 선생의 이름 석자 앞에는 '행동하는 지식인' '저항문학의 기수'라는 수사가 붙게 된다. 또 이때부터 선생의 민주화운동의 참여는 더욱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7년 만에 전남대 복직

86년 6월, 당시 호헌 반대 서명교수가 8백 명에 이른다는 사실에 착안한 선생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조직하교 초대의장에 취임하며, 88년 5월에는 전남대학교에 '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를 설립하여 초대소장을 맡는다. 당초 5·18과 관련된 모든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으므로 명칭도 '5·18연구소'였으나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위장으로 만든 이름이 '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였던 것이다.

同연구소에는 리영희·백낙청·강만길씨 등이 이사로 참여, 자료수집과 연구발표 등 광주항쟁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조사를 착수했는데, 참여자 7백여 명의 구술증언과 기타 자료를 집대성, 2백자원고지로 2만5천매 분량의 〈5·18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을 발간한다.

同사료집 발간 작업 과정에서 선생은 〈녹두장군〉을 집필하는 사이, 농민전쟁에 대한 사료가 관변 자료뿐이고 농민군이 남긴 자료는 거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연구소 활동은 주로 항쟁자료 수집에 역점을 두었으며, 90년과 92년 2회에 걸쳐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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