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의 재건과 장흥 회령포
기획특집 -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의 재건과 장흥 회령포
  • 장흥투데이
  • 승인 2021.12.2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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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회령포에서의 수군 정비와 의미
제장명/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장흥문화원은 지난 11월 25일(목)일 오후 1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장흥통합의학컨벤션센터에서 ‘의향 장흥의 인문학적 기반과 계승·발전을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제장명교수(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는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의 재건과 장흥 회령포’를 발표했다. 이 논고에서 장 교수는 ①칠천량해전 직후 조선 수군의 상황 ②전라도에서의 조선 수군의 정비 과정 ③장흥 회령포에서의 수군 정비와 의미에 대해 발표했는데, 다음 글은 장흥군과 밀접한 ‘장흥 회령포에서의 수군 정비와 의미’의 내용의 요지이다.-편집자 주

칠천량해전 직후부터 명량해전 직전까의 수군 정비 과정에서 장흥지역의 역할은 어떠했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장흥지역에서 수군은 장흥부사가 관할하는 읍수군과 회령포만호가 지휘하는 회령포 진수군이 있다.

여기서는 이순신이 장흥부에 들어서서 수군정비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통제사 이순신은 보성까지 거쳐 오면서 군사와 전선, 그리고 군수물자를 확보하였다. 추가로 모집한 군사는 120명으로 늘어났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 늘어났을 수 있다.

이순신은 그동안 모은 병력과 군수물자들은 수시로 찾아온 부하 장수들의 전선 편으로 이송했을 것으로 보인다.(일부 연구에서는 120명의 군사가 군영구미로 가기 전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역원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미 이전에 이순신을 찾아온 부하들에게 병력들을 인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순신 역시 그동안의 수군정비 노력을 보성에서 마무리 하고 최종 대비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회령포로 이동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이순신이 회령포로 이동하기까지 과정을 살펴본다.

『난중일기』에 보면 8월 15일~16일까지 보성 열선루에서 숙박한 이순신은 8월 17일 아침식사 후에 장흥땅 백사정(白沙汀)으로 갔다. 백사정의 현재 위치는 장흥읍 축내리 축내저수지로 비정하고 있다.(이수경,‘난중일기의 백사정과 군영구미 위치 검토’ 108쪽).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군영구미(軍營仇未)로 갔다.

군영구미는 당시 장흥부의 선소가 위치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회령포로 갈 함선을 기다렸는데, 이는 이전에 부하들에게 지시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배설이 보내주기로 한 함선이 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유숙했다.

(…)

좀 더 부연한다면 1556년(명종 11) 보길도 일대에 왜선이 상륙하자, 소식을 들은 장흥 부사가 출동하여 이진(梨津)의 권관(權管)과 함께 왜선을 나포하였다.(明宗實錄 권21, 11년 7월 癸酉, 丙子.)

을묘왜변 직후 1556년 장흥 부사가 전선을 타고 해전에 나섰다는 것은 당시 장흥부에 전선이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전선의 정박처와 전투를 위한 무기, 군량 등이 비축되어 있는 창고시설도 마련되었을 것이며, 그곳에서 군영의 시설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

여기서 장흥 회령포에서의 수군전력 정비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회령포의 역사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선행연구를 토대로 하여( 회령포진의 탄생과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이병혁, 「전라도 장흥도호부 수군(水軍) 만호진(萬戶鎭) 회령포(會寧浦) 연구」 『호남문화연구』 61,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29~232쪽에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다.)

회령포진의 역사에 대해 살펴본다. 회령포만호의 병선이 정박했던 회령포진은 처음 병선을 정박시켰던 1422년(세종 4)부터 1425년(세종 7)까지 3년 동안은 장흥부의 동쪽인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관내의 포구에 소재해 있었고, 이후 정박처를 옮겨서 옛 이름을 그대로 붙인 회령포진은 장흥부 남쪽 지금의 장흥군 회진면 관내의 포구에 위치하였다.

그 후 1485년(성종 16)과 1490년(성종 21)사이에 회령포성의 축성을 계기로 현재의 위치인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會鎭里)에 고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병혁, 위의 논문 제4장). 다시 말해 회령포진은 1422년(세종 4)에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인 옛 장흥부 회령포에 처음 설진되어, 3년 후인 1425년(세종 7)에 장흥부 주포 즉 지금의 장흥군 회진면에 이설되었다.(그러나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장흥향교에서 주관하여 일제강점기인 1938년 무인년(戊寅年)에 시작하여 1940년에 발간한 장흥지(長興誌)에 기록된 “회령진은 명종 9년(1554) 보성군 회령면에서 옮겨 와서 회령진으로 개칭하였다.”라고 한 기사가 그것이다.

이런 내용이 여러 자료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됨으로써 최근까지도 회령포진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한 바 있다(이병혁, 위의 논문).

회령포만호진이 처음 설치된 1422년의 전라도 수군처치사영은 무안현 대굴포(大堀浦)에 있었다.

지리적으로 전라좌도에 속한 회령포는 전라좌도를 관장하는 도만호인 고흥지역 여도량(呂島梁)에 있는 여도 만호진을 거진(巨鎭)으로 하여 내례(內禮)・돌산(突山)・축두(築頭)・녹도(鹿島)・마도(馬島)・달량(達梁)・어란(於蘭) 등 7개 만호진과 함께 전라좌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무안현에 있던 전라도 수군처치사영이 1432년(세종 14) 10월에 목포(木浦)로 이설되고, 1440년(세종 22)에는 지금의 해남 황원곶(黃原串)으로 옮겨져서, 1466년(세조 12)의 관제개편으로 전라도수군절도사영이 되었다.(조원래 (1993), 「임진왜란과 전라좌수영」, 전라좌수영의 역사와 문화, 순천대학교박물관, 136쪽.)

이후 1478년(성종 9)에 순천부 내례포(內禮浦)에 왜구가 침입하여 군기와 화약을 탈취한 사건을 계기로 조정에서 전라도 순찰사 이극배(李克培)의 계청을( 성종실록권100, 10년 정월 계해) 받아들여 이듬해인 1479년(성종 10)에 내례포에 수군절도사영을 추가로 설치하여 전라도의 수군을 강화하였다. 이때부터 해남에 있던 기존의 수군절도사영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 내례포에 신설된 수영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 되었다.

1457년(세조 3)부터 시행된 조선의 국방체제인 진관체제에 따르면 이 시기 전라도의 수군 편제는 좌・우 절도사영에 있는 수군절도사인 수사(水使, 정3품) 의 휘하에 수사를 보좌하는 본영의 우후(虞侯, 정4품)와 직접 수군을 통솔하는 첨절제사(僉節制使)인 첨사(僉使, 종3품)가 있고 그 다음으로 각 포구의 만호(萬戶, 종4품)가 배속 되어있었다.

이후 경국대전에(경국대전 권4, 「병전」, 외관직, 전라도) 나타난 전라도 수군의 편제 에 의하면 회령포는 주진인 전라좌수영 관할 하의 첨절제사진인 흥양의 사도진(蛇渡鎭)에 달량(達梁)・여도(呂島)・녹도(鹿島)・발포(鉢浦)・마도(馬島)・돌산(突山) 등 7개 만호진과 함께 소속되었다. 회령포진의 주진관이 같은 전라좌도의 여도진에서 사도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송은일(2016), 앞의 논문, 48쪽에서 사도(蛇渡)가 여도(呂島)를 대신하여 첨절제사진으로 승급된 시기를 도만호가 첨절제사로 바뀌었던 1466년경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할 체제는 영속되지 않고 변화를 계속하였다.)

1522년(중종 17) 6월 왜구가 추자도(楸子島)에 침입하자, 강진현 완도의 가리포(加里浦)에 진관(鎭管)을 설치하여 첨절제사를 배치하고 이곳을 전라우수영에 배속시켰다.

동시에 전라좌수영의 돌산도(突山島)에 방답진(防沓鎭) 진관을 설치하면서, 좌수영 관할의 마도(馬島)를 우수영에 이관하고 달량(達梁)을 폐지하여 소속 수군과 선박을 가리포에 이관하였다.(송은일(2016), 앞의 논문, 48쪽에서 사도(蛇渡)가 여도(呂島)를 대신하여 첨절제사진으로 승급된 시기를 도만호가 첨절제사로 바뀌었던 1466년경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할 체제는 영속되지 않고 변화를 계속하였다). 그 때까지도 회령포는 여전히 전라좌수영 사도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1555년(명종 10) 5월에 왜구가 지금의 해남군인 영암의 달량포(達梁浦)에 침입하여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전라병사 원적(元積)과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이 전사하고, 장흥부와 강진의 병영(兵營)이 약탈을 당하고 회령포진성이 소각되는 등 을묘왜변(乙卯倭變; 달량포 왜변)이 발발하자, 이를 어렵사리 토벌한 조정에서는 전라우수영의 군사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전라좌수영 관할의 장흥 회령포를 우수영관할인 완도의 가리포진(加里浦鎭) 소속으로 이관하여 우수영을 확대 개편한 가운데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다.(정성일(2011)

회령포진성의 축조는 다른 연해 제진의 축성과 함께 추진되었는데, 1490년(성종 21) 4월에 높이가 13척, 둘레가 1990척 규모로 축성되었다.(『성종실록』 권239)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회령포성(會寧浦城)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9백 60자, 높이가 10자이고, 안에 샘이 1개가 있다고(『성종실록』 권239) 하였다.

회령포진의 관원・병선과 입방군(入防軍)인 군사의 수효가 최초로 기록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회령포진은 종4품직 무관인 수군만호가 중선 4척과 별선 4척의 병선과 472명의 군사, 그리고 뱃사공인 초공(梢工) 4명을 거느리고 장흥부의 남쪽인 주포에 소재해 있었다.

그러면 임진왜란 당시 회령포진의 전선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경국대전(經國大典)』 (1485)에는 대맹선 1, 중맹선 1, 소맹선 2, 무군소맹선 4척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전선 척수는 다른 만호진의 전선 수와 비슷하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만호진에 통상 판옥전선 2척이 있었던 사실을 통해 볼 때 회령포에도 비슷한 규모일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회령포진은 당시 이순신이 수군정비를 마무리 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를테면 이순신은 칠천량해전 이후 통제사에 재임된 후 8월 3일부터 공식적인 임무를 시작한 후 불과 보름 기간 동안 순천, 보성, 장흥을 거치면서 모집한 군사와 군수물자를 이곳 회령포에 집결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말을 타고 육로로 이동하면서 수군을 정비했다면 이제부터는 전선을 타고 해상으로 이동하면서 수군전력을 강화시키는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해상작전과 해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컨대 회령포는 칠천량 해전 이후 수습된 조선 수군의 총집결지로서 그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배설이 이끌고 온 전선과 그동안 수보하였던 기타 전선들을 확보하여 12척의 전선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이진을 거쳐 어란포에 도착했을 때인 8월 26일에 전라우수사로 새로 부임한 김억추가 전선 1척을 구비하여 합류하였다.

이때 총13척의 판옥선이 확보되어 명량해전을 준비하게 된다.

아울러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명량해전에서 큰 활약을 한 해상의병들도 이 시기에 모집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장흥출신의 마하수 부자는 대표적인 인물로 드러나고 있다.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이라는 대회전을 맞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대책으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재임명하여 수군 재건의 중책을 맡겼다.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결과를 탈출해온 장수들로부터 듣고는 향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전라도로 향했다.

이때 이순신 곁에는 도원수 권율이 지원해 준 군관 9명과 군사 6명이 전부였다.

이순신은 육로로 전라도에 도착하여 수군을 정비해 나갔다. 그리하여 순천과 보성을 거치면서 병력과 군수물자를 확보하였으며, 전선을 수습하였다.

그 결과 장흥 회령포에 도착했을 때 전선 12척을 정비하고 수백 명의 병사들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불과 보름간의 단기간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수군 정비의 집결지가 바로 장흥 회령포이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거느리고 온 전선과 자체 수보한 전선을 합하여 12척의 전선을 확보하였다.

이순신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다른 자료에는 이 기간 장흥부사에서 전라우수사로 승급 부임한 김억추의 활약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어쨌든 이러한 수군 정비의 결과 명량해전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었다.

장흥은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선 수군이 재건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곳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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