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古문학/산문2/정명국사 천인의 〈천관산기〉 - 신라 하대, 천관산은 불국토(佛國土)였다(3)
장흥의 古문학/산문2/정명국사 천인의 〈천관산기〉 - 신라 하대, 천관산은 불국토(佛國土)였다(3)
  • 김선욱
  • 승인 2022.01.2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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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의 천관보살 신앙, 가지산사 원표에 의해 유포 가능성 커
천관산, 화엄종·관음보살 신앙도 널리 유포 됐을 것으로 유추
시인. 본지 편집인
▲천관보살, 관음보상 신앙이 널리 유포됐던 천관산
▲당대 48전당이 들어서만큼 위세, 위영이 대단했던 천관사.

 

 

 

 

 

 

 

 

 

 

 

(지난호에 이어)

3. 천관보살 신앙의 유포 과정

천관보살, 대중 진화적 방편 통한 교화행 수행

천관보살은 어떤 보살이었을까.

불경에서 천관보살은 명칭만 보일 뿐 성격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이 별로 없다.

《80화엄》(권60) 입법계품에서는 보현(普賢)·문수(文殊)를 머리로 하여 보살 140명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모든 보살은 다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성취한 보살들이라 하여 근본적으로 모든 보살 사이에 차별을 두지는 않고 있다. 다만 천관보살은 파라밀행(波羅蜜行)과 관련 있는 보살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 천관보살이 문법주(問法主)로 등장하고 있는 경전 《대수긴나라왕소문경大樹緊那羅王所問經(5세기 초 구자국龜玆國-오늘날 쿠차 현에 위치하던 고대 도시국가-출신 학승 구마라집이 번역, 총 4권)을 통해서 천관보살의 본디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경에서 천관보살이 세존에게 어떻게 보살도의 성취와 보살행의 수승(秀昇)한 능력을 얻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세존의 답은 이러했다,

“보살이 4법을 성취해야 잡종장엄(雜種莊嚴)의 변(辯)을 얻는다. 무엇이 4법이냐 하면, 보살이 일체중생에게 해(害)를 끼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며, 모든 사물에 대한 사랑(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며, 법을 연설하는 자가 있으면 그 설을 끊지 말고 즐거운 마음을 일으켜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며, 법 등을 베푸는데 제 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즉, 천관보살은 교화방편에서 보살도와 보살행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것을 권장한 것이다.

이처럼 이 경을 통해서 나타난 천관보살은 대중 친화적 성격이 강한 보살로 여겨지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한 깨달음뿐 아니라 중생들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이타행을 아울러 대중 친화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고 강조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보살은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기악(伎樂)과 가무(歌舞)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세존의 설에서, 천관보살은 기악이나 가무 방편 등 대중적인 방편을 통하여 중생 교화, 중생 제도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짐작하게 있다.

이처럼 천관보살은 보살도와 보살행에서 대중적이고 실천적인 면이 강조되는 보살이었고, 이런 성격의 보살신앙으로 인하여 장흥지역 같은 변방의 천관산에서 천관보살 신앙은 지역의 토착세력과도 연대가 강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원표, 가지산에 가지산사 창건

《송고승전》에 의하면, 원표는 천보 연간(742~756)에 중국에서 활동하며, 중국 복건성 지제산 에서 천관사상(화엄사상)을 지제산 일대에 보급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린 신화적 인물이다. 원표의 마지막은 “하늘로 올라 가버렸다 騰空而去”고 묘사돼 있다.

그러던 원표가 756년에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 3년 뒤인 759년 장흥의 가지산에 보림사(정명은 가지산사)를 창건한 인물로 나타난다.(《新羅國 武州 迦智山 寶林寺 諡 普照禪師 靈塔碑銘 幷序》)

그리고 경덕왕(재위 742~765)이 원표의 가지산사에 면세 면역의 상징인 ‘장생표주’를 내려줄 정도로 원표는 신라왕실에 친화적인 인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원표가 가지산사를 세운(759년)후, 40여 년이 지난 800년 경 애장왕(재위 800~809) 때 통령(通靈)이 탑산사와 천관사(첫 사찰이름은 화엄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 89암자도 차츰차츰 세워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천관사, 탑산사를 중심으로 화엄사상이 전파되며 특히 《80 화엄》 보살주처품의 천관보살 신앙이 수용되며, 천관산은 천관보살의 상주처가 되었을 것이다.

당대 천관산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왜, 무슨 근거에 의해 당대 중앙 무대(경주, 경상도 등)도 아닌 반도 서남부로 백제의 고토였던 변방의 장흥의 천관산이 ‘천관보살 신앙의 천관보살 상주처’로 대두되었을까?

신라통일 후 백성 대화합 위해 화엄종 널리 전파

우리나라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장흥은 삼한시대의 마한에 속해 있었다.

지방제도가 어느 정도 실시되던 백제시대는 오차(烏次-관산읍. 대덕읍. 용산면 일부와 회진일대)·고마미지(古馬彌知)-장흥읍과 유치 남부일대, 용산·안양·강진군 군동면 일대)·계천(季川-장평·장동면과 유치 동북부 일대)·마사령(馬斯良(양)-지금의 보성군 회천면과 안양면 일대)현이 장흥지역에 속해 모두 지금의 장성 지역에 있었던 구지하성(久知下城)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삼국통일 이후 신라 경덕왕 때는 오차현은 오아현(烏兒縣), 고마미지현은 마읍현(馬邑縣), 계천현은 계수현(季水縣), 마사량현은 대노현(代勞懸)으로 바뀌게 되면서 복홀군(伏忽郡)에서 보성군으로 명칭이 변경된 지금의 보성군에 속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라 하대에 장흥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대개 이 시대 장흥 지역에서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759년에 원표(元表)가 가지산에 가지산사를 세웠고, 그로부터 100여 년 후인 860년경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보림사를 창건했다(이때 보림사는 구산선문의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으로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였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러나 최근 보림사가 가지산문으로 정착되기 이전에 이미 장흥지역에는 천관산을 중심으로 한 화엄종과 함께 신라에서는 유일하게 정착이 된 ‘천관보살 신앙’이 뿌리내린 곳이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니까 7~9세기 장흥지역은 지제산(천관산)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종(華嚴宗)에 이어 가지산 보림사를 중심으로 하는 선종(禪宗) 등 당대 불교의 핵심 세력이 호남권에서는 가장 성세했던 곳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 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1457~1464년 간행)(이하 《보림사사적기》), 《동문선》의 ‘천관산기(天冠山記)’ 등의 기록에 나타난다.

특히 신동하 박사(동덕여대 국문학)는 지난 2000년 2월 발표한 ‘신라불국토사상의 전개양상과 역사적 의미’라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천관산기(天冠山記)’ 등을 인용하여, ‘불국토 사상의 하나로 전개된 불탑·건탑의 아육왕설이 장흥의 천관산에서 재현되었으며 진신상주(眞身常住) 신앙의 하나인 천관보살 신앙은 장흥의 천관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주장했다.

신라하대 장흥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①원표의 가지산사 개산 ② 탐산사·천관사를 중심으로 한 화엄 불국토, 천관보살 신앙 정착 ③보림사 개산 ④장보고와 해상왕국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중 ‘장보고와 해상왕국’은 간접적으로 장흥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세 가지 역사적인 사건인 천관산과 천관보살 신앙, 구산선종의 보림사의 등장은 바로 장흥을 중심으로 일어난 큰 사건이었다.

불국토의 화엄종, 진신상주 신앙 전파

먼저, 천관산을 중심으로 한 화엄 불국토와 천관보살 신앙의 발흥 과정을 알아보자.

당시 전남지방에서 화엄종과 관련된 곳이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인 화엄사와 함께 보살주처 신앙으로 천관보살(天冠菩薩) 신앙이 수용된 천관사를 중심으로 한 천관산 일대가 대표적인 불교세력이었다.

신라의 불교는 귀족으로부터 평민층까지 널리 확산되어 국가·사회의 지배 이념이 된 당시의 ‘중심적인 가치관’이었다.

특히 교종의 5교 중 대표적인 종파로 의상(義湘, 625~702)으로부터 비롯된 화엄종은 신라 불교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고 사회 전반에 걸쳐 끼친 영향도 컸다.

이처럼 신라통일 변환기에 화엄종(華嚴宗)을 일으킨 의상은 왕실의 지원으로 부석사(浮石寺) 등 전국의 10여 곳에 화엄종 사찰을 건립하고 화엄의 교종을 확립하는 일에 힘써 ‘해동(海東) 화엄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로 이룬 확장된 영토와 증가된 백성들을 새롭게 편제하는 중앙과 지방의 제도적 개편을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이 요구되는 사회의 대변환기에 있었다.

이때 중국에서 화엄종을 연구하고 돌아온 의상은 원효(元曉, 617~686)와 더불어 새로운 신라 불교사상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화엄종단을 이끌었다.

의상은 신라국 통일 후 안정된 사회를 지향하는 국가적 분위기에 상응하도록 교단을 운용하였다. 즉 의상의 화엄사상은 당시 삼국통일과 관련해서 대화해의 사상이 요구되었던 시대적 요청에 부응, 이른바 ‘전제왕권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주도하였고 이러한 화엄종의 대표적인 신앙이 ‘화엄경’의 실천체계 핵심인 ‘입법계품(入法界品)’을 근거로 하여 전개되었고 이것이 바로 오대산 관음보살 신앙과 미타신앙 등 보살주처(菩薩住處) 신앙. 즉 진신상주(眞身常住)신앙이었다.

이 진신상주 신앙은 바로 신라사회에서 오랫동안 토대를 구축해 온 신라 불국토(佛國土) 신앙의 한 형태였다.

관음보살 신앙은 의상이가 낙산에서 관음 진신을 친견하고 나서 낙산을 중심으로 전파한 진신상주 신앙이었다. 이 관음보살은 물론 ‘보타락가 산에서 상주하며 설법하고 있다’는 ‘화엄경’의 그 관음보살로 이 신앙은 관음보살이 신라 국토 동해변에 실제로 머무르고 있다고 하는 이른바 진신상주의 믿음을 신라 사회에 뿌리내리게 했다.

또 미타(彌陀) 신앙, 곧 정토(淨土)신앙도 의상이 관음신앙 후에 화엄종찰인 부석사에서 교단의 중심 신앙으로 확립했던 것으로, 이 역시 이미 현세의 불국토적 성격을 가지고 확고한 터를 잡고 있던 관음신앙과 마찬가지로 화엄경설을 토대로 한 진신신앙의 하나였다.

이처럼 기층만을 위한 ‘화엄경’의 관음신앙이 당시 보살주처(菩薩住處) 신앙의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리고 《80 화엄》 전래된 이후에는 오대산의 문수보살 신앙과 지제산의 천관보살 신앙으로까지 발전된다.

《80 화엄》에, 천관보살 신앙 적시

그렇다면 당시 한낱 변방에 불과했던 장흥지역에 어떻게 해서 화엄신앙, 그것도 신라시대 우일의 천관보살 신앙이 전파될 수 있었을까.

당시 의상은 전국의 산천을 편력하며 많은 사찰은 건립하고 주석하게 된다.

신라시대 사찰은 주로 국방상 취약 지구에 건립하여 그 지역의 유민들을 회유하고 교화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삼국통일 이후 왕명에 의해 의상 자신이 직접 건립한 소백산 부석사와 원주의 비마라사(毘摩羅寺)였고 ‘화엄10찰’이라는 사찰들도 이와 같은 이유로 건립됐다.

또 8세기 중엽, 당시 삼국의 백제 영토에 속했던 지역인 지리산 화엄사의 경우, 황룡사 소속의 승려 연기(緣起)가 창건했다는 설에 의혹이 많았는데, 지난 1789년 ‘신라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되면서 화엄사 창건 조사였던 연기는 경덕왕 때 실존 인물이었고, 그가 화엄경사경을 발원으로 제작했으며 그 화엄경 사경을 이 사찰에 봉안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결국 화엄사도, 신라 하대의 지리적으로 또 국방상 중요한 요충지였던 지리산 지역을 대표하는 화엄10찰이었는데, 이 화엄사 역시 ’화엄경사경’ 등을 통해 화엄 불국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화엄종의 불국(佛國土)사상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상의 발자취가 남쪽의 영암 월출산 및 달마산, 그리고 장흥 천관산에까지 미쳤음을 알려주는 기록도 있다.

지금은 해남군에 속해 있지만 당시 영암군에 속했던 달마산 미황사(美黃寺-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경덕왕 8년(749)에 의상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황사의 창건(創建)에 대하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암군 산천조(山川條)에 “고려 때 승려 무의 정오(無畏 丁午 - 려 후기의 스님, 이름은 정오(丁誤), 원혜국사(圓慧國師)의 법제자. 충렬왕에 의해 왕사로, 충숙왕에 의해 국통으로 봉하여졌다. 1302년에 월출산 백운암에 잠시 머물렀다)의 기(記)에 …그 암자(도솔암)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하던 곳이요,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 통교사(通敎寺)가 있다”고 하여 통일신라 때 의조화상이 미황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1692년에 건립한 1692년에 건립한 건립된 ‘미황사사적(美黃寺事蹟碑)’에도 의조화상이 미황사를 창건한 구체적 내용이 기술돼 있다.

또 천인은 ‘천관산기’에서, 천관산에는 의상이 살았던 의상암(義相庵)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의상이 실제로 달마산 도솔암에서 처럼 천관산에서 머물렀다고 전재한다면, 천관산에도 위상에 일찍이 관음신앙이 유포되었던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천관산, 관음신앙도 유포 되었을 것

‘천관산기’에도 관음신앙과 연관 있는 기사로 의상대사와 의상암을 비롯하여, 미타암(彌陀庵) 그리고 화엄홍진(華嚴洪震)의 화엄신중(華嚴神衆)과 신중암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당대 천관산의 불교 정황을 기록해 《지제지》에 이 보다 많은 관음신앙과 관련된 다수의 기록이 보인다.

《지제지》 ‘봉호((峰號)’조의 ①‘관음봉(觀音峯)’ 소개에서 “(바다에서 해 돋는 장면이) …마치 장육금신(丈六金神-부처의 형상)이 연화대(蓮花臺) 위에 도사려 제신(諸神)의 호위를 받는 것 같으므로 염불승들이 저도 모르게 땅에 엎드려 절하며 관음진신(觀音眞身)을 보았다고 장담한다” ②‘진죽봉(鎭竹峯)’소개에서 “불설에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불경을 돌배에 싣고 이곳에 와 쉬면서 그 돛대를 여기 꽂았다” ③‘석선(石船)’ 소개에서 “불설에 서축(西竺) 사공이 돌아감을 고하고 그 한 팔을 잘라 관음보살(觀音菩薩)에 시주하고 후세의 신표(信標)로 삼겠다고 하니 관음보살이 뱃전에 붙여두라고 명했다” ④‘삼신봉(山神峯)’ 소개에서 “전설에 의하면 애장왕이 왜적을 물리치고 삼신사(三神師)를 이 산에 머물게 하고 항상 이 봉우리에서 관음보살께 예배드리며 화엄경을 설하게 하니 왜구가 스스로 물러나 이 이름을 붙였다” ⑤‘신상봉(神象峯)’ 소개에서, “불설에 신상(神象)이 이곳에 머물며 관음보살의 설법하는 자리를 호위한다고 한다” 등의 기사들이 좋은 예이다.

이러한 기록들에 의해 당대 천관산에도 관음신앙이 널리 유포 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상은 위상은 화엄종 신앙 전파에 그쳤을 뿐, 천관보살 신앙을 전파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천관보살이 등장하는 《80 화엄》은 의상 이후에 번역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의상은 702년(성덕왕 6년)에 입적하고 《80 화엄》은 그가 입적하기 3년 전에 완간되었기 때문에 의상의 화엄 사상은 《60권 화엄》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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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新羅國 武州 迦智山 寶林寺 諡 普照禪師 靈塔碑銘 幷序》 …겨울 10월에 왕이 다시 명을 내려 스님과 속인 사신인 영암군 승정 연훈법사와 교지[]를 받든 풍선(馮瑄) 등을 보내어 왕의 뜻을 전해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거처할 것을 청했다. 드디어 마지못해 석장을 날려 가지산문(迦智山門)으로 옮겨 들어가니, 그 산은 곧 원표대덕이 옛날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원표대덕은 법력으로써 정사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건원 2년 왕이 특별히 명하여 장생표 기둥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그 표주(標柱)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冬十月, 敎又遣道俗使, 靈巖郡僧正連訓法師, 奉宸馮瑄等, 宣諭)綸旨, 請移居迦智山寺, 遂飛金錫, 遷入山門. 其山則元表大德之舊居也. 表德以法力, 施于有政, 是以, 乾元二年, 特敎植長生標柱, 至今存焉.

2) 신동하, ‘신라 불국토사상의 전개양상과 역사적 의의’,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02

3)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 국역(國譯)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Ⅳ』, 566567.

4)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院),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8, 1989, 674

5)위백규, ‘봉호(峰號)’ 지제(支堤誌), 장흥문화원, 1992, 62-64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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