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목은 이색, “장흥부민…길이길이 평안한 삶 얻다” 의미는?
사설 - 목은 이색, “장흥부민…길이길이 평안한 삶 얻다” 의미는?
  • 김선욱
  • 승인 2022.02.0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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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永得安生’ 이색(李穡)이 각계각층 리더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도호부의 ‘제영(題詠)’과 ‘역원(譯院)’조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시가 출전된다.

‘제영’조엔 ‘땅은 다하여 하늘이 바다에 이어 있고(시제)’에 이어 땅은 다하여 하늘이 바다에 이어 있고, 성은 높은데 비가 내리니 산이 어둡네. 예부터 유락(流落)한 나그네, 몇이나 살아서 돌아왔던고 地盡天連海。城高雨暗山。古來流落客,問幾得生還?”이고 ‘역원’ ‘벽사역’에 나오는 시는 “바다는 벽사역에 가깝고 하늘은 황보성(皇甫城)에 열렸도다. 《시경》의 홍안(鴻鴈) 편을 노래하니 길이길이 편안히 살게 되었구나 驛院 碧沙驛 …“海近碧沙驛,天開皇甫城。好歌《鴻雁》什,永永得安生”이다.

전자의 시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시다.

주지하다시피, 고려왕조의 대표적인 마지막 충신이었던 이색의 말년은 기구하고 참담했다.

죽기 4년 전, 1392년 7월 30일, 이색은 장흥으로 유배를 왔다.

1389년부터 1392년까지 4년간 이뤄졌던 그의 유배 중 장흥 유배는 사실상 그의 마지막 유배였다. 고려 왕조가 바람 앞에 촛불이던 1389년 12월 장단 유배를 시작으로 시작된 유배는 6차례의 유배, 이배, 해배, 재유배 등의 과정 끝에 1392년 7월에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60이 넘은 노구의 몸으로 어느 한곳도 아니고 이곳저곳으로 유배되고 해배되었다가 다시 유배되기를 거듭했던 4년간이었다. 하여 장흥 유배 때는 이성계의 등극으로 언제 사약이라도 받을지, 과연 살아서 한양 집(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지, 참으로 앞날이 불투명했던 때였다.

그런 과정이어서 “예부터 유락(流落-타향살이)한 나그네, 몇이나 살아서 돌아왔던고?(살아서 돌아갔던고?) 古來流落客,問幾得生還?”의 시가 씌여졌을 것이다.

이를 달리 보면, 이 시는 당시, 장흥부와 장흥부민들의 처지를 의미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4년간 유배로 인한 타향살이는, 바로 왜구 침입으로 13년간 철야현, 보성군을 헤매며 유랑했던 장흥부, 장흥부민들의 처지와 절묘하게 일치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13년간 유랑하다 귀향했을 때 그 피난민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살아 귀향했을까. 하여 “예부터 유락(流落-타향살이)한 나그네, 몇이나 살아서 돌아왔던고?(살아서 돌아갔던고?)” 라는 시구는 바로 장흥부의 처지, 장흥부 백성들의 처지를 의미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랑을 마쳤지만 장흥부와 장흥부민의 위기는 여전했다. 언제 또 왜구 침입으로 유랑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앞날에 대한 위기였다. 또 유랑의 아픈 기억(府-장흥부-가 현-鐵冶縣-에 빌붙어 살았던 일 등)으로 인한 수치도 견딜 수 없었다. 그것들은 곧 일종의 위기의식이었다..

하여 장흥부민들은 공분하여 적극적으로 그 위기 극복에 나선다. 장흥부 출신 사대부로서 향리에서 늙어 은퇴한 자, 뜻있는 아전들, 백성 중 거센(다소 힘이 있는) 자들은 다 마음에 분해하여 “우리 장흥부는 은대(銀帶) 이상 관원이 다스리는 곳인데, 지현(支縣)의 지관(知官-수령)에 붙어있어 너무 부끄럽지 않았는가(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되지 않아야 한다, 도호부로서 그 위상에 걸 맞는, 왜구 침입 방지를 위해서라도 튼튼한 새로운 성곽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으고 1392년 2월에 새 부사 황보공(皇甫公)에게 부로(父老)들이 나서 진정하였다.

하여 결국 그 새 둥지이던 중령산에 새로운 성곽을 쌓게 되니 바로 중령산황보성이었다.

그해 2월 17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7일에 준공하였고, 그해 이색이 장흥부로 유배온 것이 7월이었으니, 그때는 중령산 황보성 조성이 한창때였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산성 조성이 부민들의 진정으로 의해서 비롯되었고, 조성 과정에서도 힘 있는 부민들의 지원과 참여가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색은 그 산성 기문(記文)에서, 당시 그 산성 조성을 적극 지원하고 참여했던 부민, 이른바 토호세력의 리더의 명단도 명기해 놓고 있다.

이처럼 당시, 진정으로 민관(民官) 협동으로 새로운 성곽이 구축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중령산성의 조성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을 이색은 이 산성의 기문인 ‘중령산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를 남겼을 뿐 아니라 시 한편을 작시(作詩)하니 앞에서 소개한 ‘역원’ ‘벽사역’에 나오는 시다.

이 시에서 “시경 홍안(鴻鴈)편을 노래한다”는 말에서 홍안(鴻雁)은 《시경(詩經)》의 ‘홍안지십(第三 鴻雁之什) ’홍안(鴻雁-기러기)‘ 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 시는 곧 유랑생활하며 고생하다가 안정적인 삶을 누리게 된 것을 기뻐하는 유랑생활을 회고하는 시다. 그러므로 장흥부민도 고난의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터에서 안정되고 즐겁게 살게 되었다는 의미가 이 시에 담겨 있다. 그래서 “길이길이 편안히 살게 되었구나 永永得安生”는 시어가 씌여진 것이다. 즉 유랑 같은 곤고한 일을 겪었고 적극적인 노력으로 불안한 삶에 대한 위기를 극복하여 길이길이 안전할 삶을 얻었다는 장흥부민에 대한 찬시(讚詩)인 것이다.

지금 장흥군은 위기다. 기후-환경위기, 인구급감과 지자체 소멸 위기 등, 과연 길이 흥할 수 있을 것인지, 지속가능한 장흥군이 될 것인지에 대한 위기국면이다. 더구나 과거 7세기동안 호남의 서남부의 부사고을로서 전남부의 중심부 역할을 해왔던 그 영화와 문화적 전통은 경쟁력을 잃은 지 오래이다.

이 위기국면 앞에 장흥군의 수장과 장흥을 이끌어 갈 도의원, 군의회의원 등 장흥의 리더들을 선택하는 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 위기국면을 타개할 능력과 자질, 지속 가능한 장흥의 비전을 제시할 시대정신에 충일한 리더들이 선택돼야하는데 과연 그리될 것인지.

이제는, 6세기 전 유랑의 아픔을 겪은 이후의 위기국면에서, 장흥부의 리더들과 장흥부 부민들이 당대의 장흥부 현실에 통분해하며 들고 일어서 그 위기국면을 해결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던 그 역사의 교훈을 되살려야 한다.

이제는 즉 장흥 사회각계 각층의 리더들이, 은퇴한 공직자들이, 장흥의 원로들이, 의식있는 장흥군민들이 이제는 구경만하지 말고, 지연 혈연에 매이지만 말고 사심이 아닌 진정한 공심과 공분으로 적극적으로 일어서야 한다. 우리의 장흥군민 모두가, 과연 누가 제대로 길게 흥할 장흥의 비전을 밝혀주어 밝고 빛나는 장흥의 길을 밝혀주고 장흥의 위기를 타개해갈 수 있을 것인지, 그러한 자질과 능력을 가진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6세기 전, 이색이 노래한 “길이길이 안정을 얻었다永永得安生”의 의미요, 당대 장흥부민의 그 민심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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