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인물편(1) / 고영완① - ‘장흥 근대 정치인’으로 위명 남겨
■근·현대 인물편(1) / 고영완① - ‘장흥 근대 정치인’으로 위명 남겨
  • 김선욱
  • 승인 2018.06.0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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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조선학생동지회에 참가, 독립운동 참여해

야당정치인으로 평생을 민주수호와 민권운동에 몸 바쳐

고영완(高永完.1914~1991)은 1914년 2월 11일 생으로 1991년 8월 6일 작고한 근대 장흥의 대표 인물이다. 장흥고씨(長興高氏) 중시조 고말로(髙末老)의 34세손이고 고중연(髙仲木+筵=고중연은 고려 말 홍건적 제2차 침입 때 공민왕을 호종하여 경상북도 지역으로 피난하였는데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호종공신으로 책봉되고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장흥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의 25세손이다.

고영완의 호는 무계(霧溪)다. 무계는 1914년 2월 11일 부친 고동석(高東錫)과 모친 백종규(白鍾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장흥국민학교·서석국민학교·중앙고보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 도쿄 센슈대학(専修大学)을 졸업했다.

무계는 해방이 되기 전인 43년 전북 장수군 반암면과 남원군 산동면 월석리의 고남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무계는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민주당 후보로 장흥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1950년과 1960년 2회에 걸쳐 대한민국 제2대,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와 5·16로 인해 제대로 임기를 채우지는 못하였다.

무계는 야당생활을 하면서 민주수호와 민권운동에 평생을 몸 바쳐 일해 오다 1991년 8월 6일 77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무계의 고택에는 현재 장남 고병선(高秉善.1935년생, 전 중앙일보 기자)이 지키고 있다.

무계는 고병선 외에도 차남 고병관(高秉琯, 1937년생, 작고), 3남 고병돈(高秉焞,1944년생, 광주전남 광복회유족회장), 4남 고병학(高秉學.1947년생), 장녀 고병은(高秉殷, 1933년생), 차녀 고은숙(高殷淑, 1942년생, 보성출신의 이용훈 전대법원장과 결혼) 등 4남 2녀를 슬하에 두었다. 또 무계의 손자로는 고의중(삼성전자 변호사 및 이사), 고기중(철도기술관리공단 차장), 고양중(한국은행 기획실과장), 외손으로 배공신(미국 세계적 통신사 불름버그 한국대표), 이경재(신한은행 차장), 이위재(조선일보 사회부차장), 신승훈(인천지검외사부 부장검사) 등이 있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고영완

고영완은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39년 12월에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상흠(金相欽:김성수의 4남)·서영원(徐泳原:서재필의 종손)·윤주연(尹柱淵:윤선도 10세손) 등이 중심 되어 조직한 항일결사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에 참가하여 동회의 전라도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비밀결사의 조직의 특성상, 전라도 책임자에는 김상흠과 사돈이 되는 고완남(고영완의 여동생. 고완남이 김성수의 자부), 장성출신으로 고영완의 외종사촌 백재호(광복회 사무국장)등이 주축이 되었다.

同회는 3·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 동안에 이들은 同회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로 하고 동경유학생 등 해외 유학생과도 연락을 맺어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하였다.

특히 고영완은 귀국 후 동지들과 함께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냉천동약수터·연희전문학교 뒷산·벽제관 등 각지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기르는 한편 동지 규합 및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同회의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 학생 이근갑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同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고영완등 13명의 주축학생들은 1941년 9월 3일 일경에 체포되었다. 고영완은 체포 후 함경북도 경찰국으로 이송돼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때 해남출신의 윤주연 징역 2년, 김상흠 2년, 서영원 외 4명 징역 1년 6월, 고영완 외 5명 징역 1년, 연락책으로 고영완의 여동생이었던 고완남도 징역 6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정치에 입문하다

해방 이후 미군정하에 있던 대한민국은 47년 9월1 7일 열린 제83차 유엔총회에서 미국 대표인 마샬 국무장관의 제의로 정부수립의 길이 열렸다.

마샬의 제안은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는 동시에 그 국회가 정부를 수립케 하기 위해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한다’는 내용이었지만 북한 주둔의 소련군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48년 5월10일 치러졌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제헌국회였다.

당시 정당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비롯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단민당, 대성회 등이 있었다.

해방 전까지는 좌익 성향을 보였던 무계 선생은,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이 되어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이범석李範奭이 경제적 혼란과 사상 갈등을 극복하고 새 역사 창조에 기여할 청년들의 수련을 위해 1946년 10월 9일 결성한 우익 청년운동단체)에 가담하였다.

미군정하(1945년 말∼1948년 8월 15일)에서 초대 장흥군수를 역임한 후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반탁反託운동기관인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金九 중심의 신탁통치 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가 통합하여 1946년 2월에 발족한 단체-범국민적인 반탁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의 활동 반대, 좌익운동의 봉쇄 등이 행동 목표였으므로 좌익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우익진영의 대표적 정치단체였다)에 참여한다.

무계는 독촉국민회 전남장흥군지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계몽반이 동원 애국심 강조’-촉국민회의와 독촉연맹에서는 위원장 고영완, 송형식 양 씨를 비롯하여 회원으로서 조직된 계몽반을 군내 각지에 파견하여 부락마다 순회하며 애국심을 강조하였는데 각지에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한다-동아일보.1947.7.10.)

그러나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독촉국민회에서 탈퇴하며 이승만, 이범석 등과 결별하고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 1945년 9월 인촌 김성수, 송진우 등 우익 인사들이 결성한 대표적인 보수 정당. 8·15광복 이후 1년만인 1945년 9월 16일 고려민주당과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등이 합당해 만들었다)에 입당하며 한민당으로 입후보한다.(동아일보.1948.2.25)

당시 제헌국회 의원 후보로서 민족진영 측에서 2명의 후보로 무계와 손석두 씨가 후보로 나왔으나 같은 우익 계열인 손석두가 고영완을 지지하며 자진 사퇴하였으나(‘중간파 입후보로 장흥 손 씨 기권=전남 장흥군에서는 민족진영 측에서 고영완 손석두 양 씨가 입후보로 출마하였는데 그 난립을 이용하여 중간진영의 김중기 씨가 출마하여 중간파와 좌익의 협조를 얻어 민족진영의 당선이 우려되던 바 손석두 씨는 자진하여 자기의 투표 지반을 동지 고영완 씨에게 일체 양보하여 후보 난립 방지에 좋은 모범을 떨치었다.’-동아일보.1948.4.21.), 좌익 계열의 지지를 받은 중도 성향의 무소속 김중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김중기(金仲基, 1901년 생) 씨는 1945년 8·15광복 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지방조직인 장흥읍을 맡았다.

장흥출신으로 대한민국 제1대 국회의원이었던 김중기의 이력을 보면,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장흥읍장(초대)을 역임했으며,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재선을 노리고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 이후 한국동란 때 월북하였고,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냈지만, 1957년 3월경 순안농장에 배치되고 1959년 초 숙청사업 시 함북 무산방면으로 추방된 것으로 알려져, 1959년이 그의 사망 연도로 표시되고 있다.

무계 선생은 1948년 11월 이승만에 의해 대한민국 감찰위원회(오늘날의 감사원. 감찰위원회는 공무원의 직무감찰을 위해 1948년 설치되었다가 1952년 폐지되었으며, 다시 1961년 1월 부활되었다가 1963년 심계원과 통합된 감사원의 전신을 말한다)의 정보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경향신문.1948.11. 6.)

그러나 초대 감찰위원장 정인보가 장관 파면의결과 관련하여 국무위원들과 마찰을 일으키다가 1949년 7월 자진사퇴하자, 그와 함께 사퇴하였다. 이때부터 이승만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선거는 1950년 5월 30일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무계는 1만540표를 얻어 7천923표의 2위 이세옥을 크게 누르고 당선되었다. 제헌국회 의원 김중기는 3천여 표를 얻어 4위에 그쳤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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