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인물(5)/덕암 위석규(하) - 24세 독립운동 투신-31세 순직하다
■근대인물(5)/덕암 위석규(하) - 24세 독립운동 투신-31세 순직하다
  • 김선욱
  • 승인 2018.09.2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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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했지만 71편 시문 남겨-‘학문·문인으로 일가 성취’ 예측돼

후손들,추모·선양 사업활발-장천동에 덕암공유장지遺庄地 마련도

 

 

■덕암 위백규의 시 몇 편

▪聞剃髮令下奮筆書壁(단발령을 듣고 울분으로 글을 써 벽에 붙이다)

하늘은 어진 마음을 내리셨지/천성은 하늘이 주신 성품이지만 몸은 내 몸이 아니네/내 몸을 훼상하는 것은 원래 도리가 아니네/살아있는 몸 다 죽은 사람 같구나

上天降此仁상천강차인/吾性非吾身오성비오신/傷毁元非義 상훼원비의/生無不死人 생무불사인

▪秋月(가을 달)

바로 천심 이르는 곳/기러기 높이 날자 별은 성글다/요부 한 번 다녀간 뒤/가을 달은 밝고 청쾌한 것을/아는 사람이 드물구나

直到天心處 직도천심처/雁橫星正稀안횡성정희/堯夫*一去後요부일거후/科得少人知 과득소인지

堯夫*=요부(堯夫)는 송(宋)나라 문인이자 철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의 자(字)다. 동양 철학사에서 소옹은 북송대 선천학(先天學)이라는 새로운 역학의 흐름을 창시한 인물이다. 또 명시를 남긴 시인으로 독서에 심취하여 자기 거소를 안락와(安樂窩)라고 이름하고 자호를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 하였던 인물이었다.

▪送白璿一歸金谷(백선일이 금곡으로 돌아갈 때)

그대의 도(道) 구하는 뜻 높고 깊음을 좋아하였으니/서책을 지고 배우고자 이제 옥림에 미쳤네/나그네 행장 떠나려할 때 악수하고 안부 물어/아양의 한 한 곡조 그 뉘가 알겠는가

愛君求道志高深애군구도지고심/負笈今來及玉林부급금래급옥림/行李臨歸摻袖問행이임귀삼수문

峨洋一曲*誰知音아양일곡수지음

*峨洋一曲 : 높은 산이나 양양한 강하(江河)와 같은 노래 한 곡조. 중국 고대의 거문고 명수 백아(伯牙)가 타는 거문고 곡조를 백아의 지기 종자기(鐘子期)가 태산이나 양양한 강에 비유해 찬탄한 고사(故事)에서 온 말.

▪呈鄭斯文 眞九(정사문에게 바치는 글)

천관산 아래 옥림정사에/높으신 손님이 금년 봄에 오셨구나/청원하오니 오늘 어떤 일을 먼저 할지/바른 것을 붙잡고 그른 것을 배척하는/제일 이름이 높은 사람이 되기를

天冠山下玉林舍천관산하옥림사/仙杖逍遙又是春선장소요우시춘/請君今日先何事청군금일선하사/衛正斥邪第一人위정척사제일인

▪酬尹兼五(윤겸오에 답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이 몸이 태어나니

어찌하여 이 좋은 청춘을 헛되이 보내는가

이제 늦게 배우자니 다른 방법이 없구나

단지 때때로 부지런히 배워서 새것을 얻을 뿐이다

天地中間有此身천지중간유차신/如何抛了好靑春/여하포료호청춘/如今進學無他法여금진학무타법/只在時時着得新지재시시착득신

■덕암공 추모·선양 사업

​덕암공에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 훈장​
​덕암공에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 훈장​

선생의 별세 소식은 영암 출신의 동지로 선생을 병간하였던 박태문이 선생을 장례한 후 장흥으로 부고를 알려와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계유년(1933년)에 선생이 남긴 의구(옷과 신발)를 거두어 묘를 쓰고 초혼장을 치렀다.

이후 1957년 10월에 선생의 묘지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

해방이 되고 한국동란도 끝난 후 1954년에 덕암 공의 추모행사가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방촌리에서 개최되었다.

의관을 정제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날 추모행사에 참여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추모시를 읊어다. 이날 덕암 공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의열(義烈) 추모시만 총 192수가 될 정도였다. 이날 행사는 덕암 공의 독자 계동의 숙원 같은 행사였지만, 이 추모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계동 공은 이듬해인 1955년에 별세했다.

이후 1989년까지 120여 명의 인사들이 전국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의열(義烈) 추모시를 보내오니 그 수가 모두 합하여 298 수가 되었다. 그리고 사림(士林)계의 발의로 1954년의 추모시와 1989년 추모시를 모은 <덕암의열록(德菴義烈錄)>이 1989년에 발간되어 경향 각지에 배본되니, 이로써 ‘장흥 출신의 독립투사 덕암 위석규’는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의렬비 조성이 1987년에 추진되었다. 보훈처로부터 덕암 유공비 건립에 대한 뜻이 유족들에게 전달되었고, 이후 보훈처‧장흥군(군수 이윤하) 등과 협의로, 당시 장흥군수가 추진위원장이 되고, 각 기관단체장 및 유림계 인사들이 추진위원이 되어 ‘덕암의열비건립추진위원회’(이원장 이윤하군수 : 의열비 제막일 1개월 전에 이윤하 군수가 전임되고 이한동 군수가 새로 부임, 추진위원장은 이한동 군수로 교체되었다)가 발족되었다.

이때 정부 보조금 3백만 원에, 군민들의 정성이 모아진 현성금을 더해 1989년 ‘덕암위석규선생의열비’가 장천동(지금의 유장지)에 착공되었다. 이때 의열비 비문은 이숭녕 박사가 지었으며, 글씨는 광주의 저명한 서예가 항정 이돈흥이 썼는데, 1990년 10월 5일 비로소 의열비가 완공되었다.

▲2012년 3월 1일 덕암공 추모제
▲2012년 3월 1일 덕암공 추모제
▲2012년 3월 1일 덕암공 추모제
▲2012년 3월 1일 덕암공 추모제

이어 2000년에는 독립기념관 등의 후원으로 선생의 의렬비 앞에, 선생의 애국정신을 항구적으로 기리고자 선생이 독립 전선에 투신하면서 남긴 어록을 세긴 어록비(語錄碑)를 세우고, 그 전면에 ‘독립지사 덕암위공석규유장지(德菴魏公錫圭遺庄地)’를 표기한 유장비 표석도 세웠다.

2012년은 3.1절 93주년이 되는 해이면서 덕암 공의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이해 3월 1일, 장천동 덕암 유장지에서 ‘3.1절 제93주년 기념 및 독립지사 덕암 위석규 선생 순국 100주년 추모제’가 열렸다.

이날 추모제에는 덕암 선생의 후손(孫 위황량) 등 위씨 종인들과 이명흠 군수, 황월련군의회의장, 김희웅 장흥문화원장, 남도대학 전 박평준학장, 위두환 장흥위씨도문회장, 장흥향교 문상배 전교, 장흥유도회 변종주회장 등 다수의 유림인, 관내 기관단체장, 지역민 등 2백여 명이 참석, 덕암 선생을 추모했다.

이날 이명흠 군수는 “덕암 선생은 의향 장흥군의 충의(忠義)를 실천한 위인이었으며, 특히 망국의 한을 안고, 항일독립에 투신하여 대한인으로서 기개를 떨친 숭고한 인물이었다”면서 “선생의 그 충의, 애국정신이 오래도록 장흥인들의 가슴에 새겨지면서 지역발전과 지역민화합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현재 장천동 덕암 유장지(遺庄地)에는 덕암 의열비, 덕암 공이 독립전선에 투신하면서 남긴 어록비, 의열비건립추진위원회 방명비, 유장지 표지석 등이 세워짐으로써 이곳은 덕암 공의 항일 독립 투쟁의 의기와 애국정신을 기리는 공간이 되었다.

■孫 덕운-덕암공 숭조사업에 앞장

덕암공의 차손 위황량
덕암공의 차손 위황량

 

 

 

 

 

 

 

 

 

 

 

 

 

 

 

 

 

 

 

 

 

 

 

덕암 공의 부인은 강진 군동면 화방리 출신의 평해오씨(91880-1949)다.

부모로부터 삼종지도(三從之道)와 규방의 범절을 익히어 재덕을 갖춘 요조숙녀였다. 1898년 위석규 공과 결혼하여 슬하에 위계동을 두었다.

오 씨는 덕암 공이 순절한 이후, 수절하며 시부모를 지성으로 공경하고 평생 비단이나 색이 든 옷을 입지 않음으로 부군에 대한 애모의 정을 나타냈으며, 아들을 맹모지교로 길러내는 등 표상 같은 열녀의 길을 걸었다. 1949년 12월 5일 향년 70세로 별세하였다.

덕암 공과 평해 오씨의 독자였던 계동은 옥천(玉泉) 욱량(1921-1994), 덕운(德雲) 황량(1927-), 춘오(春塢) 재량(1993-2005), 계암(桂菴) 기량(1938-2016) 등 네 아들을 두었다. 또 증손으로는 ▶욱량은 장산(長山) 용환(1942-), 춘강(春岡) 순환(1945-), 야정(野井) 홍환을 두었고 ▶황량은 천환(1945-), 홍렬을 ▶재량은 유환(1956-), 형근, 보훈, 진욱을 ▶기량은 찬훈(1964-), 성범, 성우를 두었다.

1989년 한식절에 손 욱량(彧良), 황량(愰良)이 모친의 효열의 뜻을 기리고자 덕암 유장지에 ‘평해오씨 효열비’를 세웠다.

특히 선생의 손인 덕운(德雲) 황량은 <덕암의렬추모록> 발간를 비롯, 의렬비건립과 유장지 마련, 덕암공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등 덕암 공에 대한 모선승봉(慕善崇奉) 사업 등을 전적으로 주관·주도하였다.

한편, 덕암 선생은 독립운동 유공으로 1983년 8월 15일에 건국 훈장 애족장(서훈 제1668호)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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