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문학-기록문학(2)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1)
장흥고문학-기록문학(2)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1)
  • 김선욱
  • 승인 2022.04.2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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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공예태후 장흥임씨 기전비
▲공예태후 장흥임씨 사적비

 

 

 

 

 

 

 

 

 

▲공예태후 임씨 존영

<순서>

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 탄생

2. 《고려사》 열전 - 장흥출신 인물들

3.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5. 《고려사》 열전 – 임원후전(任元厚傳)

6. 《고려사》 열전 – 임극충‧임극정‧임보‧임유‧임익‧임황전(傳)

7. 《동문선》 등재 임원준(任元濬)

8. 《동문선》 등재 임경숙

9.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지난호에 이어>

1. 인종 후비 공예태후 임씨 …국역문

임원후의 딸에게 국모가 되는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나다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는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이자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위(李瑋)의 외손녀(外孫女)이다. 비(妃)가 태어나던 날 저녁에 이위가 꿈에서 노란색 큰 깃발이 자기 집 중문(中門)에 세워져 있는데 깃발의 꼬리가 선경전(宣慶殿)의 치미(鴟尾)에 휘감겨 나부끼는 것을 보았다. 비가 탄생하자 이위는 기이하게 여기며 사랑하면서 이르기를, “이 딸아이는 뒷날 마땅히 선경전에서 노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례(笄禮)를 할 때가 되자 평장사(平章事)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김지효(金之孝)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혼인하는 날 저녁에 김지효가 문에 이르자 비가 갑자기 아프더니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이에 〈신랑에게〉 사죄(謝罪)하며 돌려보내고 점쟁이더러 병을 점치게 하였더니 이르기를, “근심하지 마소서. 이 따님의 귀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니 반드시 국모(國母)가 되실 겁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이자겸(李資謙)이 이미 두 딸을 임금에게 들였는데 그 말을 듣고 미워하여 곧 〈왕에게〉 아뢰어 임원후를 폄적(貶謫)하여 개성부사(開城府使)로 삼았다. 한 해 남짓 지나고 개성부의 관리[府倅]가 태수 청사의 대들보가 갈라져 큰 구멍이 만들어지고 황룡(黃龍)이 구멍으로부터 나오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 관리가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임원후를 찾아가 그 꿈을 다 말하고 하례(賀禮)하여 말하기를, “사군(使君)의 댁에 반드시 특별한 경사[異慶]가 있을 터이니 공(公)께서는 알아 두십시오.”라고 하였다. 인종이 일찍이 꿈에서 들깨[荏子] 5되와 해바라기[黃葵] 3되를 얻고, 이를 척준경(拓俊京)에게 말하였더니 척준경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들깨라는 것은 임(任)이니 임씨 성(姓)을 후비로 맞아들일 조짐이며, 그 수가 다섯인 것은 다섯 왕자를 낳을 상서(祥瑞)입니다. 〈해바라기의〉 황(黃)이란 것은 황(皇)이니 황왕(皇王)의 황(皇)과 같고, 규(葵)라는 것은 규(揆)이니 도규(道揆)의 규(揆)와 같습니다. 이른바 황규(黃葵)란 것은 황왕(皇王)이 올바른 도리를 붙잡고 나라를 다스릴 상서이며, 그 수가 셋인 것은 다섯 아들 중 세 아들이 나라를 다스릴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임원후의 딸이 인종과 혼인하여 왕자를 낳고 왕비로 책봉되다

왕이 이미 이자겸의 두 딸을 내보내고 〈인종〉 4년(1126)에 〈임씨(任氏)를〉 뽑아 궁(宮)으로 들여 연덕궁주(延德宮主)라 불렀다. 〈인종〉 5년(1127)에 의종(毅宗)을 낳자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그대 임씨는 덕이 있는 가문에서부터 일어나 궁에 들어와서 여인들을 가르쳐 늘 경계(儆戒)하여 서로 이루어주는 도(道)를 받았을 뿐, 음험(陰險)하게 사사로이 찾아뵈려는 마음이 없었다. 순진(純震)한 맏아들을 얻어 사간(斯干)의 길몽(吉夢)을 도왔으니 이에 가까운 신하에게 명하여 좋은 하사품을 내린다.”라고 하고 은그릇과 채색 비단, 베와 곡식, 안장 딸린 말을 하사하였다. 〈인종〉 7년(1129)에 책봉하여 왕비로 삼고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옛날 현명한 임금[哲王]이 천하를 가질 수 있던 것은 단지 자기의 덕이 무성함으로만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대개 또한 내조(內助)의 현명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짐(朕)이 외람되게 천명(天命)을 이어받아서, 나라의 기틀을 물려받아 지켰고, 임금이 집안을 이룩한 것은 인륜(人倫)의 대의를 소중히 여긴 것이며, 하늘이 짝을 지어준 것은 마땅히 군자에게 좋은 배필[好俅]을 주려는 것이다. 아아! 그대 임씨는 일찍이 부녀자의 자질[婦才]을 가지고 덕망 있는 벌족[德閥]에서 일어나, 움직임은 반드시 예절에 말미암았고, 집에 머무를 때는 여공(女工)을 잊지 않았다. 처음부터 빈(嬪)이 되어 이에 아들을 낳았으니 어찌 다만 집안의 좋은 일이겠는가, 실로 나라의 아름다움을 더한 것이다. 이에 전장(典章)에 의거해 위호(位號)를 더하라. 이제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개가 부절(符節)을 지니고 책봉하는 명을 받들어 〈그대를〉 왕비로 삼는다. 아아! 검약(儉約)하면 그 몸을 지킬 수 있으며 엄숙하고 공손하면 그 직분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짐의 뜻을 체득하여 길이 아름다움을 누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인종〉 8년(1130)에는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을 낳았다. 임금이 또 사자를 보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그대는 하늘[俔天]의 자질을 지니고 귀한 왕비[儷極]의 자리에 있으면서 즐거이 좋은 짝이 되어주었고[關雎之窈窕], 왕비로서의 일[卷耳]에 힘써 복무하였다. 이에 활집을 허리에 차는 상서(祥瑞)에 부응하여 아들을 낳는 경사[弄璋之慶]를 보게 되었으니 〈짐(朕)이〉 찬탄(贊嘆)하고 가상함이 끝이 없어 은혜와 예우를 마땅히 넉넉하게 하려 한다.”라고 하고, 그로 인하여 예물(禮物)을 내려주었다. 〈인종〉 9년(1131)에 명종(明宗)을 낳자 임금이 또 사자를 보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그대 임씨는 내직(內職)을 맡고 중궁(中宮)의 자리를 바르게 하며 첫 아들을 낳아 이미 그 그릇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아들을 많이 낳았으니[螽斯] 이 또한 그대의 현명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렇듯 아들을 낳은[羆熊] 상서는 저 연매(燕媒)의 뒤를 이었다고 이를 만하니 마땅히 이 총수(寵數)을 받아들여 길이 큰 복[洪休]을 지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왕후 임씨의 어머니를 진한국대부인으로 추증하다

〈인종〉 16년(1138)에 비(妃)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죽자 왕이 소복(素服)을 입고 정전(正殿)을 피하니 백관이 표(表)를 올려 조위(弔慰)하고 사흘 동안 소복을 입었으며, 이씨에게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을 추증(追贈)하였다.

왕후 임씨를 왕태후로 책봉하다

공예태후(恭睿太后)는 의종(毅宗)과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 명종(明宗), 원경국사(元敬國師) 왕충희(王冲曦), 신종(神宗), 승경(承慶)·덕녕(德寧)·창락(昌樂)·영화(永和) 네 궁주(宮主)를 낳았다. 의종이 즉위하자 그를 높여 왕태후(王太后)로 삼고 거처하는 궁전(宮殿)을 후덕전(厚德殿)이라 하였으며 부(府)를 세워 선경부(善慶府)라 하고 관속(官屬)을 두었다.

왕태후 임씨가 둘째 아들 대령후 왕경을 태자로 삼으려 하다

처음 태후(太后)가 둘째 아들을 사랑하여 그를 태자(太子)로 세우고자 하였으므로 그런 까닭에 왕이 원망하였다. 하루는 〈태후를〉 모시고 앉아 〈왕이 태후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였더니 태후가 맨발로 전(殿)을 내려가 하늘을 우러러 맹서하자 갑자기 우레와 비가 크게 몰아치며 〈왕이 앉은〉 자리로 번갯불이 들이쳤다. 왕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몸을 구부려 태후의 옷 아래로 들어갔는데 잠시 뒤 궁전 기둥에 벼락이 내리쳤다. 왕이 크게 뉘우치고 깨달아 드디어 모자(母子)의 사이도 처음과 같이 되었다.

왕태후 임씨가 아들 왕충희의 죽음으로 근심하다가 홧병으로 죽다

명종(明宗) 12년(1182)에 충희(冲曦)가 죽자 왕은 태후(太后)가 비통해 할까 두려워하여 아뢰지 않았다. 몇 달을 보내고 태후가 그를 듣자 여러 장수들이 해를 입힌 것이라 생각하여 분하고 억울해하여 기(氣)가 다치고 막히는 병을 얻었다. 이 때 신종(神宗)은 평량공(平諒公)에 봉해졌는데 그 또한 치질(痔疾)로 오랫동안 찾아뵈러 가지 못하니, 태후는 신종도 충희와 더불어 같이 화(禍)를 입었는가를 의심하였다. 왕이 명하여 요여(腰輿)를 타고 들어와 알현(謁見)하게 하니 태후가 기뻐하면서도 울먹이며 말하기를, “나는 〈네가〉 죽었다 여겼는데 뜻밖에 다시 너의 얼굴을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평량공이 말하기를, “모후(母后)의 병환은 마음을 지나치게 힘쓴 때문이오니 풍악(風樂)을 베풀어 즐기시고 〈기분을〉 풀도록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음악[管絃]을 연주하고 왕과 평량공이 더불어 술잔을 올려 장수(長壽)를 빌고 즐겁게 하자 기운이 조금 내려갔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병이 도져 훙서하니 나이 75세였다. 순릉(純陵)에 장사하고 시호(諡號)를 올려 공예태후(恭睿太后)라 하였다.

금에서 사신이 와서 공예태후 임씨의 제사를 참관하고 제문을 올리다

이듬해(1183)에 금(金)에서 사신(使臣)을 보내어 제사(祭祀)를 지냈는데, 그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영령(英靈)께서는 일찍이 좋은 집안[慶閥]에서 나셔서 와서는 제후국(諸侯國)의 빈(嬪)이 되셨다. 처음에는 부도(婦道)로써 그 지아비를 대하였고 만년에는 어머니의 자애로움으로 그 자식들을 지키다가 갑자기 자식들의 봉양을 거스르고 〈돌아가시니〉 참으로 슬프고 불쌍하다 이를 만하다. 마땅히 부의(賻儀)를 보내는 은혜를 더하여 그로 인해 주효(酒肴)를 갖춘 제사를 베푸나니, 정혼(貞魂)이 만일 계신다면 총수(寵數)를 흠향(歆饗)하소서.”라고 하였다.

恭睿太后任氏傳 … 원문

恭睿太后任氏, 中書令元厚之女, 門下侍中李瑋之外孫. 妃誕夕, 瑋薨有黃大旗, 竪於其第中門, 旗尾飄縈於宣慶殿鴟尾. 妃生, 瑋奇愛之曰, “此女後當遊宣慶殿.” 及笄, 平章事金仁揆子之孝聘之, 婚夕, 之孝至門, 妃暴疾幾死. 乃謝遣, 卜人占病曰, “勿憂, 此女貴不可言, 必爲國母.” 時李資謙已納兩女于王, 聞其言, 惡之, 卽奏貶元厚爲開城府使. 歲餘, 府倅夢太守廳事樑棟坼, 作大竇, 黃龍從竇而出. 詰朝, 倅具朝服, 詣元厚, 具陳其夢, 以賀曰, “使君家必有異慶, 公其識之.” 仁宗嘗夢得荏子五升, 黃葵三升, 以語拓俊京, 俊京對曰, “荏者任也, 納任姓后妃之兆也, 其數五者, 誕五子之瑞也. 黃者皇也, 與皇王之皇同, 葵者揆也, 與道揆之揆同. 所謂黃葵者, 皇王執道揆, 御邦家之瑞也, 其數三者, 五子之中, 三子御國之兆也.”

임원후의 딸이 인종과 혼인하여 왕자를 낳고 왕비로 책봉되다

王旣出資謙二女, 四年, 選入宮, 號延德宮主. 五年, 生毅宗, 王遣使下詔曰, “汝任氏起自德門, 入司陰敎, 受儆戒相成之道, 無險陂私謁之心. 得純震之長男, 協斯干之吉夢, 爰勑邇臣, 式將好賜.” 賜銀器·彩段·布穀·鞍馬. 七年, 冊爲王妃, 詔曰, “古先哲王之有天下也, 非獨由已德之茂, 盖亦有內助之賢. 朕叨承景命, 嗣守丕基, 王假有家, 重人倫之大義, 天作之合, 宜君子之好俅. 咨! 爾任氏, 夙以婦才, 起於德閥, 動必由於禮節, 居不忘於女功. 自初作嬪, 爰得有子, 豈特室家之好, 實增邦國之休. 是用擧以典章, 加之位號, 今遣某官某, 持節冊命, 爲王妃. 於戱! 儉約可以保厥身, 肅恭可以共其職, 當體朕意, 永孚于休.”

八年, 生大寧侯璟, 王又遣使下詔曰, “汝以俔天之資, 居儷極之貴, 樂關雎之窈窕, 服卷耳之勤勞. 乃符帶韣之祥, 載見弄璋之慶, 歎嘉無己, 恩禮當優.” 仍賜禮物. 九年, 生明宗, 王又遣使下詔曰, “玆爾任氏, 典予內職, 正位中宮, 震索得男, 旣主其器, 螽斯多子, 亦由爾賢. 謂玆羆熊之祥, 協彼燕媒之后, 宜膺寵數, 永保洪休.”

왕후 임씨의 어머니를 진한국대부인으로 추증하다

十六年, 妃母李氏卒, 王素服避正殿, 百官表慰, 素衣三日. 贈李氏, 辰韓國大夫人.

왕후 임씨를 왕태후로 책봉하다

后生毅宗及大寧侯暻·明宗·元敬國師冲曦·神宗·承慶·德寧·昌樂·永和四宮主. 毅宗卽位, 尊爲王太后, 殿曰厚德, 立府曰善慶, 置官屬.

왕태후 임씨가 둘째 아들 대령후 왕경을 태자로 삼으려 하다

初后愛次子, 欲立爲太子, 以故王怨之. 一日, 侍坐語侵, 后跣下殿, 仰天而誓, 忽雷雨大震, 電光入座. 王驚懼, 俛入太后衣下, 俄而震殿柱. 王悔悟, 遂爲母子如初.

왕태후 임씨가 아들 왕충희의 죽음으로 근심하다가 홧병으로 죽다

明宗十二年, 冲曦死, 王恐后悲痛, 不白. 居數月, 后聞之, 意諸將害之, 憤恚, 得氣攻鬲病. 時神宗封平諒公, 亦患痔, 久不入覲, 后疑神宗與曦同禍. 王命腰輿入謁, 后且嘉且泣曰, “吾以爲死, 不意復見爾面.” 平諒公曰, “母后之疾, 勞心致然, 請張樂悅解.” 於是, 奏管絃, 王與平諒公上壽爲樂, 氣少下, 未幾復篤, 薨壽七十五. 葬純陵, 上謚恭睿太后.

금에서 사신이 와서 공예태후 임씨의 제사를 참관하고 제문을 올리다

明年, 金遣使來祭, 其文曰, “惟靈, 早自慶閥, 來嬪侯藩. 始以婦道, 相其夫, 終以母慈, 保厥子, 遽違榮養, 良可哀憐. 宜加賻贈之恩, 仍致酒殽之奠, 貞魂如在, 寵數其歆.”

2. 장흥임씨, 5남 4녀 낳아 인종 총애 독차지

《고려사》 열전 ‘인종’ 편을 보면, 인종이 공예태후를 왕비로 맞아들인 것은 그의 부친인 임원후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있을 때인 인종 4년(1126년) 6월 을묘일로 기록되어 있다.

궁에 들어 온 이후 임원후 여식 임씨의 기록을 보면 ▶인종 5년(1127) 여름 4월 경오일에 장남 낳다 ▶인종 7년 2월 기사일에 왕비로 책봉되다 ▶인종 8년에는 2남 대녕후 경(大寧侯 暻)을 낳다 ▶인종 9년 10월 경진일에 아들 호(晧)를 낳다 ▶인종 11년(1133)에 장남 철(撤, 후에 현晛으로 개명)이 왕태자로 책봉되다 ▶인종 19년 정월에 왕태자 철이 관례를 치르다. ▶인종 21년(1143) 왕씨(王氏)가 태자비로 간택되다 ▶인종 21년 7월 경신일에 아들 탁(晫)을 낳았다 ▶인종 24년(1146) 2월 갑자일에 인종이 별세하다. 향년 38세요, 재위 24년이었다. ▶인종 24년 2월 갑자일에 인종은 임종 직전 왕위를 태자 현(晛)에 양위하다. 이가 곧 의종(毅宗)이다. ▶의종 1년(1146년) 3월에 공예태후는 왕태후로 승격되다 ▶의종 2년(1148)에 왕자 경(暻)은 대녕후(大寧侯), 호(晧)는 익양후(翼陽侯)로 책봉되고 첫째공주는 승경궁주(承慶宮主)로 둘째공주는 덕녕궁주(德寧宮主)로 책봉되다 ▶의종 9년(1155) 9월 정미일에 임원후가 별세하다 ▶의종 5년 4월에 세쨋누이는 창락궁주(昌樂宮主)로, 넷째누이는 영화궁주(永和宮主)로 책봉되다 ▶의종 8년(1154) 9월 기미일에 정안공 인원후(임원애)가 별세하다. ▶의종 24년(1170년) 9월에 의종은 정중부에 의해 퇴위당하고 익양공 호(晧)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명종이다. 의종은 명종 3년 10월에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사살당하니, 향년 47세요 재위 25년이었으며, 왕위를 내놓은 기간은 3년이었다.

명종 13년(1183년) 11월 계미일에 공예태후가 별세하니, 향년 75세였다. 인종의 왕후가 되어 5남 4녀 9남매를 낳고, 남편과 자녀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임씨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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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전 원문은 전체 문장이 연결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역자가 편의상 단락을 구분하고 소제목도 붙인 것으로 추측된다.

2) 출전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5%88%97%E5%82%B3&types=o#articleList/kr_088_0010_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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