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문학-기록문학(5) 임원후는 공예태후의 부친이었다(상)
■장흥고문학-기록문학(5) 임원후는 공예태후의 부친이었다(상)
  • 김선욱
  • 승인 2022.07.0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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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임씨들 중앙의 정치 무대 기둥으로 뿌리내린 시발점 돼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순서>

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 탄생

2. 《고려사》 열전 - 장흥출신 인물들

3.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5. 《고려사》 열전 – 임원후전(任元厚傳)

6. 《고려사》 열전 – 임극충‧임극정‧임보‧임유‧임익‧임황전(傳)

7. 《동문선》 등재 임원준(任元濬)

8. 《동문선》 등재 임경숙

9.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정안사의 전경

 

 

 

 

 

 

 

 

 

 

▲장흥임씨 선열들을 모신 장흥임씨 사당 ‘정안사’의 표지석
▲장흥임씨 발상지 정안사 사적비

 

 

 

 

 

 

 

1. ‘임원후 열전’-국역문

임원후(任元厚)의 초명(初名)은 임원애(任元敱)이다. 과거에 급제하였고, 인종(仁宗) 초에 여러 차례 옮겨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으며, 합주(陜州)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개성부(開城府)로 옮겼는데 모두 치적이 높았다. 왕이 임원후의 딸을 맞아 비(妃)로 삼으니, 드디어 〈임원후〉를 예빈소경 어사잡단(禮賓少卿 御史雜端)으로 임명하였으며 갑자기 참지정사(叅知政事)로 발탁하였다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바꾸었다.

묘청(妙淸)과 백수한(白壽翰)이 간사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니 임원후가 상서(上書)하여 그들을 죽여서 화근을 끊을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답하지 않았다. 다시 참지정사 판공부사(判工部事)가 되었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서경(西京)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서를 내려 임원후와 김부식(金富軾)을 중군수(中軍帥)로 임명하였으며, 곧이어 임원후에게 명령하여 도성에 머물며 지키게 하였다. 후에 동덕좌리공신(同德佐理功臣)의 칭호와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부(開府儀同三司 檢校太傅)를 하사하였다. 곧이어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삼았다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고쳤는데, 〈임원후〉가 표문을 올려 최진(崔溱)에게 양보하려 했으나 〈왕〉이 답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어 전주(銓注)를 매우 공정하게 하자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여 이르기를, “산도(山濤)도 이보다 더 잘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후〉 수태보 판서경유수사(守太保 判西京留守事)를 더하였다.

의종(毅宗)이 즉위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고 정안후(定安侯)로 봉하였으며, 조회할 때 〈임원후〉에게 전각에 올라와 절하게 하니[行禮] 간관(諫官)들이 논박하였다. 드디어 선충안사좌리동덕(宣忠安社佐理同德功臣) 칭호와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상주국 정안공(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守太尉 上柱國 定安公), 식읍(食邑) 2,000호, 식실봉(食實封) 600호를 더하였으며, 부(府)를 설치하여 수령부(壽寧府)라 이르고 요속(僚屬)을 두었다. 〈의종〉 10년(1156)에 죽으니 68세였다.

임원후는 도량이 넓고 깊었으며 풍채에 위엄과 무게가 있었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였다. 재상이 되어서도 근검하고 청렴결백하였으며, 10년 동안이나 부귀를 누렸다. 묘청의 요망한 말을 재상들이 모두 따르고 믿었는데, 임원후만은 홀로 물리치고 따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에 감복하였다.

아들은 임극충(任克忠)·임극정(任克正)·임보(任溥)·임유(任濡)·임항(任沆)이다.

任元厚 列傳-원문

元厚, 初名元敱. 登第, 仁宗初, 累遷殿中內給事, 出守陜州, 移開城府, 俱有政績. 王納元厚女, 爲妃, 遂授禮賓少卿·御史雜端, 驟擢叅知政事, 改同知樞密院事.

妙淸·白壽翰, 以邪說惑衆, 元厚上書請誅之, 以絶禍萌, 不報. 復爲叅知政事·判工部事, 進中書侍郞平章事. 西京叛, 詔以元厚及金富軾, 爲中軍帥, 尋命元厚, 留衛都城. 後賜同德佐理功臣號·開府儀同三司·檢校太傅. 尋判兵部事, 改門下侍郞平章事, 表讓崔溱, 不報. 未幾, 判吏部事, 銓注甚公, 人稱之曰, “山濤蔑以加矣.” 加守太保·判西京留守事.

毅宗卽位, 拜門下侍中, 封定安侯, 令朝會上殿行禮, 諫官論駁. 遂加宣忠安社佐理同德功臣·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尉·上柱國·定安公, 食邑二千戶, 食實封六百戶, 開府曰壽寧, 置僚屬. 十年卒, 年六十八.

元厚器宇宏深, 風彩嚴重. 博通經史. 爲宰相, 勤儉淸白, 享富貴十餘年. 妙淸妖說, 宰執皆傾信, 元厚, 獨擯之不從, 人服其明.

子克忠·克正·溥·濡·沆.

2. 사임원후수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賜任元厚授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곽동순(郭東珣)

-《동문선》 제25권 > 제고(制誥)

천관(天官)과 천작(天爵)은 천하의 공기(公器)니, 어진 자와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요, 사사로운 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관후하여 장자의 풍도가 있고 동정(動靜)은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 등용되어 일을 행하던 때로부터 앉아서 도를 의논하는 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적이 있어서 탁월한 종공(宗工)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남다른 은혜를 거듭 내리어 장래의 공효를 보려 한다. 이것은 안팎 사대부들의 공론에 의한 것이며, 내가 사사로운 정으로 경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68

賜任元厚授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郭東珣]-원문

天官天爵。天下之公器。可以與賢者共之。不可私於人也。卿寬厚有長者之風。而動靜得大臣之體。自作而行事之時。至坐而論道之日。厥有成績。卓爲宗工。予其申錫異恩。以觀來効。玆所以採搢紳中外之公論。非朕私於卿也。

3. 임원후에게 문하평장사를 제수한다

[除任元厚門下平章]- 곽동순(郭東珣)

- 《동문선》 제25권 > 제고(制誥)

문하. 고금을 통하여 천일(千一)의 기회를 만나기 어려운 것인데, 상하의 이견(利見)이 마침 이오(二五)의 시기에 있다. 생각건대, 나와 정치를 같이하는 신하는 일찍이 시국을 구제하는 소망이 일치하였다. 이에 큰 임명을 내려 조정에 들이게 한다.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병부사 수국사 상주국(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判尙書兵部事修國史上柱國) 임원후(任元厚)는, 참으로 왕좌(王佐)의 재주요, 명신(名臣)의 후손이다. 학문은 성명(性命)의 이치를 궁구하여 사업에 응용하고, 행실은 법도(法度)에 맞아 모자라거나 지나침이 없었다. 언관과 시종신의 벼슬로부터 왕명을 출납하고 정치를 논사하는 소임에 이르렀다. 어진 말과 의로운 낯빛으로 물러나서도 보익하였고 나와서는 충성하였다. 하물며 중궁(中宮)의 어진 것은 실로 규문(閨門)의 훈계가 두터웠던 까닭이요, 동궁(東宮)이 왕위를 맡게 된 것은 가세(家世)의 남은 경사임에랴. 몸에는 나라의 편안하고 위태함이 매어 있고, 나라와 더불어 좋고 궂음을 같이하였다. 유악(帷幄)에서 계책을 협찬하였고, 여러 번 승진하여 대신에 이르렀다. 오전(五典)을 선포하여 백성을 다스려서 사도(司徒)의 직책을 완수하였고, 육사(六師)를 거느려서 나라를 통솔하여 하관(夏官)의 병정을 고르게 하였다. 그대의 덕을 내가 잊지 못하므로 은혜를 더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에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로 태위(太尉)의 직을 주어 만기(萬機)를 협찬하게 하고, 봉각(鳳閣 중서성)과 난대(鸞臺 문하성)의 두 성(省)을 겸하여 백관의 장이 되게 하여, 담담한 관부(官府)를 진압하게 하고, 혁혁한 명성을 더욱 더하게 한다. 특별히 수 태위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제수하고 나머지는 전과 같이 한다.…

除任元厚門下平章-원문

門下。今古相望。難逢千一之會。上下利見。適在二五之期。眷予共政之臣。早協濟時之望。渙其大號。揚于王庭。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判尙書兵部事修國史上柱國任元厚。眞王佐之才。出名臣之後。學窮性命而措諸事業。行在繩墨而道於中庸。自言語侍從之官。至出納論思之任。仁言義色。退補進忠。况中壼得賢。實自閨門之訓篤。而星儲主器。莫非家世之慶餘。以身繫其安危。與國同其休慼。俾贊謀於帷幄。累進秩於鈞衡。敷五典以擾兆民。司徒之職可考。統六師以平邦國。夏官之政乃均。德予曰篤不忘。誠有加而無已。是用金印紫綬。領太尉而贊萬機。鳳閣鸞臺。兼兩省而長百辟。以鎭潭潭之府。以增赫赫之瞻。可特授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餘如故。

4. 재신 임원후 재걸사면 불윤

宰臣任元厚再乞辭免不允 - 최유청(崔惟淸)

-《동문선》제29권>비답(批答)

임원후(任元厚)에게 교유하노라.

두 번째 표(表)를 올린 것을 보고서 모직(某職)에서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고, 아울러 모(某)를 천거해서 대신 맡겨 달라는 일에 대해서 잘 알았다. 나라의 안위가 재상에게 달렸음은 사람의 행동이 팔다리에 달린 것과 같나니, 진실로 서로 돕는 친근한 사이가 아니면, 어떻게 임금이 가만있어도 저절로 다스려지는 정치를 이룩하겠는가.

경은 온후한 도량에 고명한 재주를 가졌다. 문벌은 외척을 겸했고 직위는 재상의 요직을 차지했다. 허물을 고쳐줌으로써 짐의 마음을 열어 주고, 유학(儒學)으로 꾸며 줌으로써 나라의 정치에 협찬했다. 그 공로가 많았으니 그 갚음도 응당 커야겠다. 그러므로 승진하는 절차에 따라서 재상의 중임에 앉힌 것이다.

천관(遷官)은 차제에 의해서요, 임명은 사정으로써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무능하다고 핑계하면서, 도리어 동렬(同列)에게 미루는가. 한호(罕虎)가 자산(子産)에게 정권을 넘겨 준 것이 비록 옛일로서 전해 오기는 하지만, 백익(伯益)이 웅비(熊羆)에게 사양한다고 해서 어디 이미 내린 명을 철회하였던가. 겸손을 지킴을 고집하지 말고, 나의 기대하는 심회에 부합되게 할지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호 (역) | 1968

宰臣任元厚再乞辭免不允-원문

敎任元厚。省再上表陳乞辭免某職。幷擧某自代事具悉。惟國之安危繫宰相。猶人之動止由股肱。苟非相與之至驩。孰得無爲而自化。卿以渾厚之量。挺高明之才。地兼賢戚之崇。位據公台之重。彌縫其闕。內以沃朕心。緣飭以儒。外以贊邦理。厥功惟茂。其報宜豊。肆循進律之文。以正秉鈞之任。遷之由次。用匪以私。奈何退託於不能。而以盛推於同列。罕虎授于子産。雖古事之或傳。伯益讓于熊羆。豈成命之容改。毋固謙冲之守。以符眷注之懷。

장흥임씨, 찬란히 꽃피운 임원후

임원후의 열전은 《고려사》(권 95, 열전 제8)의 ‘임의 열전’부에 첫 번째로 등재돼 있다.

"고려시대의 전라도 인맥을 더듬어오노라면,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난 휘황한 성좌, 한 가문에 속하는 거대한 인물 군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눈부심과 경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다. 고려시대 전라도에 이런 벌열(閥閱)이 있었던가. 그 가문이 정안임씨다.…" 이는 김정수씨가 펴낸 〈전라도 사람들〉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귀절(201쪽)이다.

정안임씨는 선·숙·예종 조에 명신으로 평장사를 지낸 임의(任懿)에 의해 중앙 정치무대에 탄탄한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장흥임씨 일문을 고려의 명문을 찬란하게 꽃피워낸 사람이 임의의 둘째아들이었던 임원후(任元厚.1089∼1156)였다.

시호가 문정(文定)이었던 임원후는 선종 6년(1089)에 태어나 초명(初名)을 원애(元敱)라 하였다. 그래서 사서에는 ‘원애’로 많이 나오기도 한다. 그의 아버지 임의공이 이미 중앙 정치 무대에 탄탄한 발판을 마련해 놓았으나, 그는 과거인 문과에 급제하여 당당하게 관계로 진출한다. 그는 기상이 출중하고 도량이 크고 풍채가 엄연하고 묵직하였다. 역사와 경전에 통달했고 재상이 된 뒤에도 근검 청백하였다고 하니, 그의 출세는 결코 부친의 은덕만이 아니고 그의 인품, 자질, 학문 등을 갖춘 스스로의 힘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계에 진출한 이후인 인종 초년에 승진을 거듭하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고 합주(陜州)의 원을 거쳐 개성부로 옮겼는데, 그는 어디서나 치적을 올렸던 것으로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치적으로 그는 1127년(인종 5) 예빈소경어사잡단(禮賓少卿御史雜端)에 이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등을 거쳐 공부판사(工部判事)를 지내고 34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난세에 올바른 처신으로 명재상 기반 닦아

한 인물의 성장에는 대체적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이 크게 작용한다. 주로 난세에 큰 인물이 나타나기 쉬운 것도 난세라고 하는 그러한 시대상의 영향 때문이다.

임원후가 조정에 들어가 바야흐로 한창 날개를 펼치려던 고려 인종 조는 고려왕조가 일대 위기를 맞이하던 시대였다. 즉 14세의 어린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은 권력 암투의 아수라장이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인종은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李資謙)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하기도 하고, 묘청(妙淸)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金富軾)이 중심이 된 개경세력 사이에 끼게 되면서 일대 왕권의 위기를 맞는다.

즉, 이자겸의 외척세력과 한안인을 중심으로 한 관료세력이 정권을 다투다 결국 이자겸 측이 한안인(韓安仁, ?∼1122년) 측을 역모로 몰아 숙청시키는 '왕보의 역모사건', 척준경(拓俊京, ?〜1144))이 군사 수십 명으로 왕성을 포위하고 난을 일으키는 '척준경의 난', 이자겸이 인종을 제거하려는 '이자겸의 난', 승려 묘청을 앞세운 서경세력이 일으키는 '묘청의 난'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왕조가 일대 위기에 직면하기를 수 차례였고, 이러한 수차의 내란을 겪는 과정에서 임원후는 이 난국을 슬기롭게 돌파하면서 조정의 중심 세력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이에 따라 임원후를 구심점으로 한 장흥임씨는 자연히 인종 이후에 고려의 명문 귀족으로 탄탄한 기반을 닦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딸이 인종 왕비, 인종의 국구 되다

예종의 뒤를 이어 맏아들 해(楷)가 외조부인 권신 이자겸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인종이다. 이자겸은 대대로 왕실과의 중혼으로 인한 겹겹의 세도 외척이었다.

즉 그의 증조 이자연(李子淵, 1003〜1061)의 세 딸이 문종의 비였고, 자겸의 부친 이호(李顥)의 딸(자겸의 누이)은 순종의 비였으며, 자겸의 차녀는 예종의 비였다. 예종의 비가 낳은 아들이 인종이니 자겸은 인종의 외조부가 된다. 그럼에도 이자겸의 욕심은 끝이 없어 셋째·넷째 딸까지 인종의 비로 들였다. 딸을 둘이나 외손부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왕권은 자연스럽게 이자겸에게 넘어가면서 그가 국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전횡(專橫)하게 되었다. 그래도 양이 차지 않는 자겸은 마침내 왕위를 노려 인종 4년(1126)에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자겸의 난은 임원후에게도 자연스럽게 '탄탄대로'를 열어준다.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임원후의 관직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였다. 즉 고려시대에 왕실·친족의 보첩(譜牒)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이던 전중성(殿中省)에서 일하던 종 6품직 하위직이어서, 다행히 그 아수라장이 같던 정쟁의 소용돌이 밖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왕보의 난', '이자겸의 난' 등을 거치면서 수백 명이 관직을 삭탈 당하고 유배를 갔던 와중에서서 무사히 큰 고비를 넘긴 그는 이로써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게 되고 점차 상승국면을 타기 시작한다.

이자겸 난이 평정되면서 이자겸의 두 딸이자 인종의 두 왕비도 폐출되었다. 그리고 이 때 새 왕비의 간택에서 임원후의 딸이 뽑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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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사세가 권제15>인종 4>6(1126620) 을묘 이자겸(李資謙)의 딸인 두 왕비를 쫓아내고,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임원애(任元敱)

2) 《고려사절요10>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위(李瑋)가 졸하였다. 이위는 시중 정공(靖恭)의 아들로 부자가 대를 이어 총재가 되었고, 딸은 임원애(任元敱)에게 시집가서 왕비를 낳으니 집안이 부귀하고 번성하였으나, 재물을 모으고 인색하였다. 門下侍中致仕李瑋侍中靖恭之子父子相繼爲冢宰女適任元敱生王妃門戶貴盛而殖貨吝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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