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수상 - 휘적휘적 시월이 간다
장흥수상 - 휘적휘적 시월이 간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10.1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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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수필가

시월이 왔다.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시월이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숲에서 여름이 빠져나간 숲의 표정을 읽고 있다. 장엄한 기운이 완숙하게 점령한 시월 풍경은 여유롭다. 극히 차분하고 조용하게 보내고 싶은 계절. 늦여름 어느 언저리에서 휘적거리며 가을을 들어내는 그 어디쯤이 시월이다. 햇살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나무의 간격도 한결 헐거워져 나뭇잎을 바라보는 소소한 일상이 따뜻하게 밀려드는 계절도 시월이다. 시월에는 흔들리는 구절초를 보다가 까닭 없이 그리움이 튀어나오는 계절이고, 삶의 뒤뜰을 조용히 훔쳐보는 것도 시월이다.

왁자지껄한 시내를 벗어나 숲에 쪼그리고 앉아 시월 꽃들에 안부를 묻는다. 이고들빼기, 물봉선,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이질풀, 알며느리밥풀, 개여뀌, 미역취, 쥐꼬리망초, 가는오이풀, 등골나물, 마타리, 산박하, 사광이아재비, 마삭줄, 꽃향유, 참취꽃, 뚝갈, 달맞이꽃이 숲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피었다. 왠지 수척해 보이는 자리에 별스럽게 노란 미역취가 유난히 흔들린다. 가느다란 꽃대에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머지않아 꽃은 속살을 거두어들이고 씨 하나를 품을 것이다. 이것이 풍요와 결핍이 공존하는 시월이다.

시월의 숲길에 어디 들꽃뿐이랴. 나뭇가지에 내걸린 가을 소리. 며칠 전 지나간 소낙비에 나뒹구는 삭정이와 흩어진 낙엽에서 상처 난 시월을 보았고, 뜨겁게 몸 달구던 알밤이 여름을 토해놓은 시월을 보았다. 사람들의 눈길에 사로잡힌 알밤은 인간의 욕심을 채웠다. 이제 남은 것은 산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들도 먹고살아야 한다. 한 톨도 남김없이 싹 쓸어 가는 비정한 우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빈 밤송이 껍질만 쇠잔한 바람에 나뒹구는 곤궁한 모습이 아니라 옹골찬 알밤 한 톨이라도 품고 있어야 밤나무밭을 찾아든 다람쥐의 발걸음이 가벼워질 것 같다.

시월이 깊어지고 있다. 이런 날은 나란히 찍히던 옛 발자국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 시월이면 설핏 기억되는 사람이 있기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개를 내저어 기억에서 떨쳐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난히 목을 길게 빼고 먼 산을 바라보게 되고, 보고 싶다는 언어를 감추고 서성거리게 되고, 밤에는 대문 앞에 등불 하나 걸어두고 밤새워 뒤척거려야 한다. 그럼에도 나의 시월은 오래된 사랑 하나쯤 숨겨두고 설레고 싶다. 그 사람이 설핏 거려 늑골 사이를 쑤셔와 신열을 앓더라도, 남몰래 슬그머니 끄집어내어 미소 한번 지으며 추억하고 싶다. 네게 이런 풋풋한 사랑 하나 남아있지 않다면 나의 시월은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시월에는 가슴을 다 채우지 못한 그 무엇이 흔들리기에 시인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해 달라고 노래했다. 그렇다. 시월에는 기도하고 싶다. 시월에 드리는 기도는 삶을 재충전하는 기도이고, 고통을 치유하는 언어이다. 생각을 털어놓고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한 기도이고, 나를 낮추는 행위이다. 절대자에게 바라는 간절함이 아니라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한 다짐이고, 흔들리는 삶을 곧추세우기 위함이다.

시월에는 언어를 내려놓고 싶고, 생각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달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가슴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고, 어린나무에 안부를 물으며 겸허한 마음으로 숲에 머물고 싶다. 어느 숲 해설가는 숲에서 눈을 뜨면 당신과 당신의 세상이 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나와 나의 세상이 보인다고 말한다. 시월의 숲에서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 쉬는 것만으로 힐링이고 행복하다.

시월에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부끄러운 것들을 기억하고 성찰의 시간을 갖고 싶다. 꼬리를 찾지 못한 쓸쓸함과 허무함에 울컥, 눈물을 훔치고 싶다. 시월에는 순간순간 무엇인가를 더 느끼고 있다. 의식하지 못한 감정까지도 끊임없이 새겨진다. 시월에는 무심코 지나친 것들이 낯익은 모습으로 나타나 문득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시월, 숲속 바윗돌에 걸터앉아 “시월의 어느 멋진 날” 노래를 듣는다.

성악가 김동규의 풍성한 목소리에서 가을향기가 풍겨 나온다. 중후한 첼로 소리와 버무려진 노랫말 한 구절이 또렷하다.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 살아가는 이유 / 꿈을 꾸는 이유 / 모두가 너라는 걸 / 네가 있는 세상 / 살아가는 동안 /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휘적휘적 시월이 간다. 시월이 가면 달달한 숲 내음도 멈출 것이고, 풀벌레 소리도 침묵하고, 흔들리던 나뭇잎도 땅으로 내려와 뒹굴 것이다. 이제 한 계절 늘어놓았던 감정을 허물없이 털어내야 한다. 강둑에 쪼그리고 앉아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비워내야 한다. 숲이 흔들리는 가벼운 몸짓처럼 우리도 가벼워져야 한다. 시월이 가기 전, 비대해진 감정의 겉치레를 털어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붙들고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할 수는 없다.

내일의 시월은 오늘처럼 속절없이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까칠한 숲의 풍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시월이었으면 좋겠다. 뭉클뭉클 가슴으로 들어오는 안온한 시월을 느끼고 싶다. 이제는 까닭 없이 쓸쓸하고 결핍했던 시월을 내려놓고, 조금은 가난한 시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비대해진 나를 보듬고 있기에는 시월은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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