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왜 장흥이 ‘장흥시’로 승격되지 못하였을까
사설 - 왜 장흥이 ‘장흥시’로 승격되지 못하였을까
  • 김선욱
  • 승인 2022.11.16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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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일제 때 장흥에 대한 경계로 군(郡)으로 약화 … 생태문명 요청시대, 장흥은 최고 복지(福地)로 부활 가능 크다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때 왜 장흥은 장흥시로 승격되지 못했을까?

조선조에 전남에서 목사고을이었던 나주와 부사고을 순천은 후에 시가 되었지만, 순천만큼 아니, 그 못지않게 큰 고을이던 장흥(부)은 군(郡)으로 강등되고, 관할지도 대폭 축소되면서 후엔 강진보다는 조금 크지만 보성보다는 작은 군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단순이 지정학적, 행정적인 이유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였는가?

장흥과 유사한 나주의 예를 들어보자.

대한제국(1897.10.12.∼1910.8.29) 이전 조선조 말까지 나주는 말 그대로 전라남도의 중심 고을이고 전남의 최대도시였다. 광주는 그때만 해도 대도시 나주의 변두리 쯤에 위치한 작은 촌락쯤에 불과했다.

1895년 조선 정부는 기존의 8도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제로 나누면서 전라도는 전주부, 남원부, 나주부로 나누었다. 당시 초대 나주부 관찰사는 한일합방 후 총독부로부터 남작작위를 받은 친일파인 윤웅렬이었다. 이 무렵 전국에서 의병들이 자주 봉기했는데 그 중에서 나주는 의병활동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1985년에는 나주의 고위 관리들이 살해되기도 했다. 이에 윤웅렬은 나주를 떠나 나주의 외곽도시였던 광주로 도망가 거기서 성벽을 쌓고 도정 업무를 보았다. 1986년 나주 등지의 봉기가 진압되고 23부제가 1년 만에 13도제로 바뀌면서 기존의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나누어지고, 윤웅렬도 그대로 전라남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그는 기어코 나주로 내려가지 않고 광주에 남아 광주에서 도청 업무를 보게 되면서 이른바 나주는 광주에게 도청을 빼앗긴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시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조선의 도시들도 현대화되는 기간으로, 철도가 지나거나 항구로 개항한 도시들인 부산, 군산, 목포 등이 성장해가던 시기였다.

나주는 당시 호남선이 지나는 요충지였음에도 광주에 도청을 빼앗기며 예전의 전남 중심부로서 기능을 잃어버렸고 도시화·현대화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항구적으로 광주시에 짓눌린 소도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 시초는 한 친일파 관찰사의 의지에 의해 그로부터 ‘미운 털’이 박히면서 그리된 것이었다.

이 예는 당시 19세기 말 우리나라 도시권으로 진입이나 행정 구획이 지정학적·행정편의 등의 타당성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1895년 조선 정부는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하면서 장흥부는 장흥군으로 강등된다. 이때부터 10여 년 전 1884년 장흥에서는 장흥동학의 최후 격전이 치러지면서 박헌양 부사와 관군 95인이 순절한 대사건이 있었다. 그 동학전쟁 이후 동학군 색출을 이유로 일본 헌병대는 계속 장흥에 상주했다. 당시 청나라와 싸워 이겼던 대일본제국으로서 가장 요주의를 하게 한 곳이 장흥이었던 것이다. 일본헌병대 장흥 주둔은 단순히 동학군 색출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혹시 반란에 대한 경계요, 그래서 더욱 요주의가 필요한 이유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로 이해 동학란 이후에도 일본은 물론 조선 정부도 장흥에 대해 악감정을 가졌을 것이고 제1 요주의로 장흥을 경계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장흥동학란으로 장흥이 정부나 일제에게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힌 것이다. 전북에서 전주부와 남원부가 생겼으므로 당연히 전북지역보다 세가 큰 전남지역도 나주부 외에 중남부에(국토 균형상) 중심고을로서 장흥부를 두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정부와 일제는 장흥을 군으로 강등시켰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술 더 떠 그 이듬해인 1896년에는 (완도군 신설을 이유로) 이전 장흥부 관할이었던 7개 섬들(지금의 금일읍·금당면·생일면·고금면·신지면·약산면·청산면)을 완도군에 이관시키면서 장흥군의 세를 아주 약화시키고 말았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1914년, 23부제의 군현을 통합, 현재의 시군 체제의 근간이 되는 행정개편을 추진했는데, 이때 일제는 다시 장흥군 소속의 3개 면인 회령면, 천포면, 웅치면 등 3개 면을 보성군에 이관시켜버리고 만다. 1986년 완도의 7개 섬 이관에 이은 두 번째의 장흥군 약세화 추진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때 일제가 장흥 중심을 관통하며 장흥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던 예양강의 이름을, 장흥과는 아무 연관도 없던 탐라국(耽羅國)의 탐(耽)자와 강진군(康津郡)의 진(津)자를 붙인 ‘탐진강’으로 불리게 했을까.

만일, 조선조 말, 일제강점기 때 타군으로 이관됐던 지금의 완도군 7개 섬과 보성군 웅치면, 회천면이 장흥군에 계속 이속이 되었다면(현재로 최소 4,5개읍에 20여개 면 존치), 아마 근대화 과정에서 장흥은 필연적으로 지속 발전되면서 장흥시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 말엔 조선 정부와 일제에게,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에게 철저히 ‘미운 털’이 박힌 장흥이었기에, 당초부터 장흥은 시(市)는 커녕 군(郡)으로서도 약세를 면치 못하는 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시화‧산업화·근대화 과정에서 장흥은 도시권에서 가장 원거리에 속한 지정학적인 이유로 더욱 소외와 침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전남을 원으로 그렸을 때, 그 정중앙에 해당하는 곳이 장동‧장평이라고 한다. 전남에서 3핵3축인 광주권, 목포권, 순천‧여수권에서 가장 원거리에 위치한 곳도 장흥이다.

장흥의 이러한 지정학적‧지리적 요인으로, 한때 전남 도청 이전 후보지로 장흥이 최적정 후보지로 선택되기도 했지만,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전남 도청이 남악신도시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다 알만 한 사람들을 알고도 남는다.

이제 지구촌에는 기후위기로 인한 생태문명이 절실히 요청받고 있다.

생태문명권- 여기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자연 생태계이다. 탐진강, 득량만, 장흥호반 등 풍부한 수자원에 400m∼5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무려 30여 개가 분포한 산림자원, 대한반도에서 최남단으로 온화한 기후 등등 장흥의 생태자원은 비교 우위의 강력한 경쟁력을 갖는다.

최 근년 들어 특히 장흥읍 억불산 기슭에 도시의 귀촌인들이 몰려들고 있다. 우산리, 평화리 일대에 신축 가옥이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다. 보성읍이나 강진읍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힐링의 시대, 웰리스의 시대, 건강 100세 시대를 맞아 도시민들이 유독 장흥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장흥의 생태자원, 즉 풍부한 산림자원 때문이 아니겠는가.

장흥이 지속 가능한 미래비전으로 생태문명의 선도를 자임하는 군(郡)으로서 생태문명의 비전을 창출해간다면, 예전에는 타의에 의해 장흥시는 못되었지만, 이제는 자의적으로, 장흥시가 전혀 부럽지 않은, 가장 복 받은 땅인 ‘복지(福地)로서 장흥’의 희망시대를 능히 열어갈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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